사무엘상 1장 복음 설교말씀은 한나의 서원기도와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서 말씀한다. 사사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인생을 살았다. 그때 한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들을 달라고 서원한다. 그러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다. 한나의 서원기도로 출생한 아들이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사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다.
I. 사무엘의 가문 1:1-8
여기서 사무엘 선지자가 출생한 가정의 내막을 잘 알 수 있다. 사무엘의 부친의 이름은 엘가나였으며 레위 자손이었고 역대상 6:33,34에서는 보는 바와 같이(레위 지파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가문인) 고핫의 자손이었다. 그는 또한 에브랏이라고 하는 베들레헴의 유대인 즉 에브라임 사람 숩의 자손이었다(룻 1:2). 레위 족속인 이 집안은 처음에는 베들레헴에 자리잡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엘가나가 속한 그 중의 한 지파가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였다. 이 엘가나는 라마 또는 라마다임에서 살았는데 라마다임이란 윗 동네와 아랫 동네의 “두 라마”를 뜻하는 말이다.
(1) 그 가정은 경건한 가정이었다(1-3절). 이스라엘의 가정이 모두 그래야 하지만 레위 지파에 속한 가정은 특히 경건해야만 했다. 목회자의 가정은 모범적인 신앙 가정이 되어야만 한다. 엘가나는 중요한 절기에는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3절). 아마도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군의 여호와란 하나님의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것 같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가 매우 미약했는데 반해 이스라엘의 원수들의 군대는 매우 강력했다.
그래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만군의 여호와가 되신 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엘가나는 시골에 사는 레위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꼭 성막에 올라가야 할 직위나 직무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예물을 가지고 성막에 올라감으로써 이웃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였다. 그의 그러한 행위는 다음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더욱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다.
1) 그 당시 이스라엘은 대체로 타락해 있었으며 신앙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2) 엘리의 아들인 흡니와 비느하스가 그 당시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일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위를 악용해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엘가나는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제사장들은 임무를 다하지 않았을지라도 엘가나는 자기 임무를 다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그 가정에는 불화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죄악과 슬픔이 있었다(4-8절).
1) 불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엘가나가 두 아내를 얻은 데 있었다. 그것은 우기 주님께서 제정하신 근본적인 혼인 제도를 어기는 것이었다. 혼인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마 19:5,8). 두 아내를 얻는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야곱의 가정에도 그리고 여기 엘가나의 가정에도 불행한 일이 생긴 것이다.
2) 이러한 잘못의 결과 두 아내 사이에 불화가 생겨난 것이다. 두 아내에게는 각기 다른 축복이 있었다. 브닌나는 레아처럼 태의 열매가 풍성하여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러므로 브닌나는 비록 자기가 첩이며 남편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만족해야만 했다. 한나는 라헬처럼 자식은 낳지 못했지만 남편에게 대단히 사랑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질도 각기 달랐다. 브닌나는 자식을 많이 둔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오만 불손해졌다. 한편 한나는 자식이 없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우울하고 불만스러워했다. 그래서 엘가나는 그 둘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①이렇게 가정에 불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제단앞에 나아가는 일을 그만 두지 아니하였다. 다른 일로는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에는 합심했던 것이다. 가정의 기도로 그 가정의 불화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가정의 불화로 인해서 기도를 멈추게 해서는 안된다.
②엘가나는 최선을 다해서 한나를 위로했으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나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4,5절). 제사를 드리는 날 엘가나는 화목제를 드리면서 가정의 화목을 기원했다. 첫째, 한나가 괴로워하며 모욕을 당하고 의기 소침해 있어서 엘가나는 한나에게 더욱더 사랑을 표시하려고 애썼다. 둘째, 엘가나는 한나에게 화목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 줌으로써 자기의 지극한 애정을 표시했다. 이렇게 우리도 충분히 기도함으로써 친구와 친척들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도록 하자.
③브닌나는 매우 심술이 사나운 여자였다. 첫째, 브닌나는 한나의 불행을 보고 나무라며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멸시하고 하늘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조롱하였다. 둘째, 브닌나는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하였다. 셋째, 브닌나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더욱 심하게 굴었다. 아마 다른 때보다도 그 때 더욱 두 여자가 같이 지냈기 때문이며 엘가나가 어느 때보다도 그때 한나에게 더 많은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브닌나는 고의적으로 한나를 괴롭혀 한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의 마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④불쌍한 여자 한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7절). 자기의 결함으로 인해 한나는 세상적인 슬픔에 깊이 젖어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즐거움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심령이 괴로워하며 마음 속에 지나친 분노를 품기 잘하는 자들은 자신을 미워하며 생활에서도 그리고 신앙에서도 위로받지 못한다.
⑤엘가나는 자기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한나를 위로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8절). 결혼함으로써 한 몸이 된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도 하나가 되어서 서로의 어려움을 같이 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한 편이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한 편이 결코 평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엘가나는 자기가 한나의 불행을 보충해 줌으로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으리라고 암시한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8절).
“내가 그대를 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않느뇨.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인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로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는 당연히 여기면서 위로받는 데는 약하기 때문이다. 균형을 잘 유지하려면 우리에게 불리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리한 것에도 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도 정당하게 보지 못하며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
Ⅱ. 한나의 기도 1:9-18
엘가나는 한나가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을 보고 온유한 말로 나무랐다. 그리하여 엘가나의 꾸지람은 좋은 효과를 가져 왔다.
(1) 엘가나가 나무라자 한나는 음식을 먹었다. 한나는 먹고 마셨다(9절). 엘가나가 한나를 나무라자 한나는 더 이상 슬픔 가운데 빠지거나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격정을 조절하는 것은 식욕을 조절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자기부인의 일부이다.
(2) 엘가나의 나무람은 한나로 기동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짐을 내 어깨에 지며 고생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서 여호와께 기도함으로 맡겨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한나가 이 문제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평소보다 간절히 간구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럴 때이다. 그들은 실로에 있었으며 바로 성막 문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곳은 바로 “기도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그들은 화목제를 드렸었다. 이제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자.
1) 한나의 기도 속에는 아주 간절함이 있었다. 한나의 기도에서 우리는 기도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①한나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기도로 승화시켜 경건한 격정으로 나타내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10절). 우리도 우리의 불행을 이처럼 선용하여야 한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②한나는 울면서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는 메마른 기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통곡하였다. ③한나는 매우 독특하고 겸손한 간구를 드렸다.
그녀는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는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④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엄숙히 서원하며 약속하였다(11절). 그 아이는 레위인 태생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드려질 것이다. 그러나 한나의 서원으로 인해서 그 아이는 나실인이 되어야 하며 성별된 유년기를 보내야만 한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를 얻고자 할 때는 약속을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구속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고 그로 인해 위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비를 기대한다면 행할 의무를 약속드리자. ⑤한나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조용히 말했기 때문에 아무도 한나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13절).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아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하나님께는 사람의 생각도 말과 다름없다.
2) 그 때문에 한나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엘 리가 대제사장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사사였다. 엘리는 성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 보았다(9절). 성막을 여기서는 성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성막이 이제는 정착했으며 성전의 구실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는 거기 앉아서 문안도 받고 지시도 내렸다. 그런데 그는 어디선가(아마도 은밀한 구석이었을 것이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다.
한나의 이상한 태도를 보고 그는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한나에게 말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14절).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자 이와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행2:13). 이처럼 타락한 시대에는 술 취한 여자들이 성전문에 있는 것을 보기가 예사였던 것 같다. 어떤 질병이 유행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 병에 감염되지 않았나 하고 의심받게 된다. 한나는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엘가나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먹고 마신것처럼 엘 리가 꾸중을 하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3) 한나는 겸손히 자기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으려고 변명한다. 한나는 정정당당히 자기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는…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15,16절). 자신을 변명하는 한나의 말씨는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았다. 한나는 엘리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한나는 평상시보다 훨씬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때문에 자기가 술 취한 것처럼 보인 것이라고 엘리에게 말한다.
4) 엘리는 아주 자비하게 축복함으로써 자기가 경솔하게 나무란 것을 보상하였다(17절). 한나의 기도를 언짢게 생각했던 것만큼 이번에는 한나의 기도를 격려해 주었다. 또한 엘리는 ‘평안히 가라'(17절) 고 말함으로써 한나의 결백함에 만족하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5) 한나는 흡족해서 돌아갔다(18절). 한나는 돌아가서 화목제를 드리고 남은 음식을 먹었으며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행복한 변화가 생겼는가? 한나는 기도함으로써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는 그 문제로 인해 근심하지 않았다. 한나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으며 엘리도 한나를 위해서 기도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기도한 바대로 자비를 베풀어주시거나 또한 다른 방법으로 자기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리라고 믿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기도는 곧 마음의 안정이다.
Ⅲ. 사무엘의 출생 1:19-28
(1) 절기가 다 지나자 엘가나와 그의 가족은 집으로 돌아갔다(19절) 그들에게는 갈 길이 멀었고 많은 자녀들을 데리고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께 다같이 경배드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출발을 했다. 기도를 하며 음식을 먹은 것은 결코 길을 지체하는 것이 아니다.
(2)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드디어 여호와께서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한나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한나는 이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20절). 사무엘이란 이름의 기원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을 가진 “이스마엘”의 기원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 어머니의 기도가 상달되어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 아들을 낳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난가 사무엘이란 이름을 지은 이유를 말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 이름이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감사함을 표현함으로써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만 한다(시 116:1,2). 사무엘 즉 ‘하나님께 구하였다’고 말해야 할 시기 적절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채워주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가! 사무엘은 하나님께 구한 아들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이다.
(3) 한나는 정성을 다하여 그 아들을 키웠다. 그 이유는 아들이 몹시 사랑스러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었다. 한나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편에게 집에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에게는 해마다 열리는 삼대 절기에 참석할 의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나는 늘 참석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오랫동안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키우느라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자들은 한나의 경우를 보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은혜롭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나는 아들이 충분히 자라서 성전에 데리고 갈 뿐만 아니라 성전에 드고 올 만한 때가 되면, 그때 비로소 성전에 올라가고자 했다. 즉 한나는 한번 아들을 성전에 데리고 가면 다시는 데리고 돌아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그 아이가 비로소 지성소를 섬기는 일을 시작한다. 더러는 이때를 젖 떼자마자, 그러니까 약 세 살 때쯤이라고 한다. 또 더러는 그 아이가 여덟살이나 열살 때쯤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어리더라(24절). 한나가 어떻게 아들을 바쳤는가 보자. 첫째, 제물과 함께 : 수소 셋과 소제물을 바쳤다(24절). 어린 아이의 나이 한 살마다 수소 한 마리씩 바친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수소 한 마리는 번제로 또 한 마리는 속건제로 드리고 마지막 한 마리는 화목제로 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선하심에 감사함으로 : 한나는 그것을 엘리에게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엘 리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어서 안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바라게 되었기 때문이다(26,27절).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27절). 셋째, 한나는 이 아이에 관한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바쳤다.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28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16). 이 기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칠 때는 그들이 엄연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도록 하자. 게다가 그들이 여전히 우리의 위로가 되는 우리의 자녀란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5) 어린 사무엘은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8절). 즉 그는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찍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예배드리도록 인동해서 가능한 한 그들이 예배에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며 그들이 더 훌륭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