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주일 설교문] 아브람의 소명과 애굽 이주(창12:1-20)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이 하란 땅에 있는 아브람을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한다. 원래 데라가 가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와서 그곳에 머물렀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인도하여 천국으로 이끌어 가신다.

아브람 가족의 가나안 이주와 가나안 땅 기근

I.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12:1-3

우리는 여기서 아브람이 그의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부르심은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장차 그를 통해 이루어질 특별한 일을 위해 그를 따로 떼어 세워 두고자 계획된 것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 7:2에 나오는 스데반의 연설을 통해서 그 부르심이 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소 간에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이 부르심의 신적 권위를 조금도 의심할 수 없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서로 간의 교제를 시작하시고자 하신 이 최초의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둘째, 이 부르심은 그가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보타미아에 있을 때 그에게 내려졌다. 어떤 사람들은 하란이 갈대아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여전히 아브람이 살던 고향의 한 지역이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아브람이 그곳에 5년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곳이 자기가 지시하신 곳이 아님을 알려 주실 때까지는 그곳을 자기의 본토라고 부르며 거기에 정착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긍휼을 쌓아 두고 계시다면 그는 우리가 가나안에 이르기도 전에 아무 곳에서나 쉬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역사가 이룩되어 우리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 은혜롭게 계속해서 그 부르심을 되풀이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 자체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보게 된다.

1. 시험하는 명령(1)

너는 너의 본토을 떠나라(1절).

(1) 그는 이 명령에 의해서 그가 자기 고향과 절친한 친구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한 하나님을 따라가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지를 시험받았다. 그의 고향은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친척과 그 아비의 집은 그에게 끊임없는 시험거리였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한 언제나 그들로 인해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리신 이 명령은 신실한 아브람의 모든 영적 후손들을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들어오게 하는 복음의 부르심과 매우 일치 되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육신적인 애정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물러나야 한다. 둘째, 죄와 죄를 일으키는 모든 원인들 그리고 특별히 나쁜 친구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세워 두어 온 불의의 우상들을 버려야 하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의 순전함을 위협할 때는 기꺼이 그들과 헤어져야 한다. 셋째,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거룩한 무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우리의 본향이나 집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여인숙으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초월하여 살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2) 그는 이 명령에 의해서 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준 것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줄 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순히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는 비록 하나님을 따르려고 자기 본토를 떠남으로 인해 전혀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는 아무런 보증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야만 했다.

2. 격려하는 약속(2)

여기에 한 가지 격려하는 약속이 있다. 아니, 사실 그 약속은 여러 가지 매우 크고 값진 약속들이 함축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는 그것을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약속이 따른다. 우리가 그 명령을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약속이 들어 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2절).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백성 가운데서 이끌어 내실 때 그로 다른 한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주셨다. 하나님은 그를 들감람나무의 가지로 있는 데서 잘라내어 참감람나무의 뿌리로 삼으셨다.

1)이 약속은 아브람의 마음의 짐을 크게 덜어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에게는 자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자기 자녀들의 궁핍과 필요에 대해서 적절하게 은총을 베푸시는 법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모든 상처에 대한 처방 약을 가지고 계신 분이 가장 아픈 상처를 위해서 먼저 한 처방을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2)이 약속은 아브람의 믿음을 크게 시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는 오랫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2) 네게 복을 주어. 네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러면 네게 조상이 되는 축복을 주리라는 말씀이다.

(3)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그는 자기 고향을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름을 잃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영영 이름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로 큰 민족을 이루시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고자 하셨다.

요한계시록 22장 헬라어 원어성경 설교문

(4)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즉 이 말씀은 네 행복이 행복의 표본이 되어서, 자기 친구를 축복하려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아브람처럼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참조, 룻 4:11). 또한 이 말씀은 네 생명이 네가 머무는 곳에 복이 되리라는 뜻이다.

(5)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절). 이 약속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일종의 공수 동맹의 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6)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약속의 절정을 이루는 약속이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그 안에서 ‘모든 약속이 예와 아멘이 되시는’메시야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이 이제까지 받았던 복 중 가장 크고 놀라운 축복이시다. 또한 그는 가정의 축복이시다. 그로 인해 구원이 집에 이르기 때문이다(눅 19:9).

Ⅱ. 아브람의 순종 12:4,5

(1)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서 자기 고향을 떠나되 먼저는 우르에서 후에는 하란에서 떠났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나'(히 11:8) 자기가 누구를 좇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2) 그가 떠날 때의 나이는 ‘칠십 오세’였다. 그 나이는 보다 안정과 정착을 누려야 하는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 늙은 나이에 다시 세상을 시작하게 하실지라도 그는 복종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이 들어 이루어진 회심의 한 모범을 보게 된다.

(3) 그는 일행과 짐들을 함께 이끌고 갔다.

1) 그는 자기 아내와 조카 롯도 함께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내가 마음이 맞아 함께 천국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되는 일이다. 그의 친척 롯도 아브람의 훌륭한 모범에 감동을 받았다. 필시 아브람은 롯의 아비가 죽은 후에 그의 보호자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롯은 기꺼이 그를 따라가고자 했을 것이다.

2)그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도 함께 가져갔다. 즉 ‘그들이 모은 모든 소유’와 유동 자산을 가져갔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였다. 하여 자기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4) 그들은 여행 끝에 목적지에 무사히 다다랐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5절). 그들은 앞에서도 이 여행을 떠났으나(11:31) 얼마 가지 못해 이내 여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 여행을 계속하였고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의해 무사히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은 새로운 계시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고 약속하신 땅이 바로 그곳임을 알게 되었다.

Ⅲ. 가나안 땅에 들어감 12:6-9

사람들은 아브람이 그처럼 비상한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에 가게 되었으니 그가 거기에 도착한 후에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고 사람들의 주목도 거의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자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1) 그는 그가 도착한 땅에서 거의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1) 그가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가득하였고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람의 눈에 그들은 사악한 이웃이요 악한 지주들로만 보였다.

2) 또한 그가 그곳에 정착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경건한 모든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나그네로 보아야 하고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체류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써 이 세상을 이국땅처럼 생각하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힘있게 여행을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2) 그는 자기가 따르는 하나님에게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1) 하나님은 그에게 선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절).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게서 우리의 장막과 제단을 떼어 놓을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떼어 놓지 못한다.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긍휼은 부모들에게도 자비가 된다. “내가 이 땅을 줄 것이나 네게가 아니라 네 후손에게니라.” 그것은 순서가 전도되어 그의 후손에게 베풀어진 은혜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것을 또한 자신에 대한 은혜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히 11:16).

2)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7,8절).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답례했고 자기편의 잘못으로 이 교통이 단절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결심한 자로서 하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는 장막을 치는 곳마다 하나님의 단을 세웠다. 그리고 그 단은 기도로 성화되었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이 사실에서 볼 때 가정 예배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새로운 고안물이 아니라 옛날부터 모든 성도들이 행해 온 관습인 것이다. 우리도 어디로 가든지 우리의 믿음을 함께 가져가야 할 것이다.

Ⅳ. 아브람의 애굽으로의 여행과 그의 잘못 12:10-13

(1)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이었다. 그 기근은 아브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아주 강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그는 자기를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신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서 부양하시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을 때에도(합 3:17,18) 여호와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시험받았다. 의무를 이행하며 축복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근심과 낙망에 부딪치는 수가 있다.

(2)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셔서 한 곳에 기근이 있을 때 반드시 다른 곳에는 풍성함이 있게 하신다. 우리는 쓸데없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잠시 가나안을 떠나야 했을 때 그는 고향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애굽으로 가고자 했으니 이는 그가 떠나온 곳을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으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참조, 히 11:15,16).

(3) 아브람은 사래가 자기 아내임을 부인하고 그녀가 자기 누이인 것처럼 꾸밈으로써 큰 잘못을 범했다. 성경은 아주 칭찬받은 성도들의 비행에 관해서도 공평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그들의 행동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서이다. 아브람의 생각 저변에는 다음과 같은 질투 어린 소심한 추측이 깔려 있었다. 즉, 그는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미모에 매혹되어 만일 그들이 자기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녀를 아내로 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처치할 방도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브람이 가장 크게 은혜를 받은 것은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신 후’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백향목이 이처럼 흔들리는 판이라면 버드나무는 오죽할 것인가.

Ⅴ. 사래에게 닥친 위험과 하나님의 구원 12:14-20

(1) 사래는 그녀의 순결이 애굽 왕에 의해 더럽혀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왕에게 천거하자 즉시 그녀는 마치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로 이끌려간 것같이(에 2:8)바로의 궁으로 이끌려 갔다. 이는 그녀를 왕의 침상에 들이기 위함이었다.

(2) 사래는 이 위험에서 구출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는 우리를 우리의 죄로써 다루시지 않는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비유 설교문

1) 하나님은 바로를 징벌하셔서 그의 죄가 진척되는 것을 미리 막으셨다.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저지하여 다시 우리의 본분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징벌은 복 된 징벌이다.

2) 바로는 아브람을 꾸짖고서는 그에게 많은 예물을 주고 떠나가게 하였다.

①그 책망은 온건하였으나 아주 정당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18절). 바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즉 이 말은 만일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자기 궁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많은 덕과 명예와 양심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곤 한다. 여기서 바로가,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선량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된 아브람처럼 그런 실망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은 최선의 것을 희망하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②예물을 주어 떠나게 한 것은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처사였다. 바로는 그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되 조금도 그녀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돌려보내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20절). 바로는, 기근이 끝나고 아브람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자기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안전하게 그 나라를 떠날 수 있도록 그를 호위하여 인도하게 하였다.

아브람의 이 애굽에서의 구출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건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있다. 아브람이 기근 때문에 애굽에 들어간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역시 기근 때문에 그것에 들어갔다. 그는 바로에게 큰 재앙이 내려짐으로써 구출되었는데 그의 후손들도 역시 그렇게 구출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동일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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