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설교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에 대해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아 나타났지만 교만했다. 게바와 아볼로 파로 나누어져 싸웠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 서로 싸우고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하니 분쟁이 일어났다.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서로 싸우게 된다.
Ⅰ. 서문과 소개 1:1-9
여기서 우리는 이 서신 전체에 대한 사도의 서문을 볼 수 있다.
1. 편지의 기명(1,2)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이다. 그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도 있었다(고전 9:1,2). 그러나 가장 훌륭하고 신실한 사역자라 할지라도 이런 식의 비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1절). 여기서 바울은 사도라는 명예를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고 자신이 사도됨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짓교사들이 바울을 깍아 내리던 이때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자격을 주장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도적인 자격과 권위를 지키려는 것은 바울의 교만함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소스데네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형제 소스데네는 한때 유대인의 회당장이었으나 후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기자신의 이름으로만, 또한 단수로만 말하고 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와 부르심을 입은 자들'(2절)이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으므로 세례에 의하여 자신을 주께 바치며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과실이요 잘못이다.
이렇듯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의도인 것이다. 바울은 또 이 편지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의 주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남은 자들을 두고 계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의 보편적인 교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사도의 축복(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와 평강은 실로 복음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의 요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혜와 평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강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 평강을 누리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은혜요 그 다음이 평강이다.
3. 고린도 교인을 위해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4-7)
바울의 대부분의 서신은 친구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그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감사한다. 첫째, 4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의 말씀과 같이 그들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믿음으로 예수께 연합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둘째, 풍성한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심을 인함이다.
어떤 은사에 있어서는 그들은 어느 교회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성하게 받았다(7절). 5절에서 그는 ‘구변과 지식’에 대해서 상술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에 근거를 두지 않는 화려한 구변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언변은 공허하며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배로운 지식을 가졌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펼칠 만한 구변이 없으므로 결국 그것은 보화를 보자기에 싸 두어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두 은사를 함께 주실 때 그 사람은 탁월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 6절에서 두 은사는 그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한 확인이었다.
어떤 교외가 이러한 은사가 충만하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사명을 갖고 있다는 더욱 확고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한 터전 위에 그들의 신앙을 갖고 있을 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7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주의 재림에 대한 고대는 더욱 더 간절해진다.
4. 장래 소망을 격려함(8,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장래의 소망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들에게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들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끝까지 보호받으므로 이런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8절).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특권을 소망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또 특별히 우리의 이런 소망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의 부르심을 듣고 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이 어긋나서 실망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되이 나가기만 한다면 그는 절대로 우리에게 신실치 않게 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Ⅱ. 분열의 원인 1:10-13
이제 바울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1]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애로 하나가 되기를 권면한다(10절). 그리고 그들의 분쟁을 책망한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불행한 분쟁을 수습하기 원하는 어떤 사람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매우 온건한 태도로 말하고 있다. 즉 그가 말하는 바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가 되어라.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나 분파는 피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큰 믿음 가운데서 한 마음을 품어라. 즉 감정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으니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라는 의미인 것이다.
[2] 바울은 분쟁의 근원을 암시한다(11,12절). 교만이 밑바닥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역자로 인하여 다투었다. 쟁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파당을 짓고 그들 당의 우두머리로 사역자들을 각각 추대해 놓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성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또 어떤 사람들은 게바, 즉 베드로를 성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 사역자들은 다 그만 두고 다만 그리스도에 속했음을 주장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을 온전하게 화합시켜 주는 복음과 그 기관인 교회가 차별과 불화와 분쟁의 원동력이 되어 버렸다. 교만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심각한 적대 관계에 빠지게 하는가! 심지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을 경쟁하는 사이로 만들기까지 한다.
[3] 바울은 그들의 불화와 분쟁에 대하여 충고한다(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천만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가 너희들의 희생 제물이 되어 너희를 속죄했느냐? 아니면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너희가 나에게 예배하고 그 신성한 예배로 나의 제자가 됐느냐?” 사역자들이 아무리 우리에게 유용한 도움을 준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나뉠 수 없는 것 같이 그들 사이를 구별할 아무런 이름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Ⅲ. 바울이 준 세례 1:14-16
여기서 바울은 그들 가운데 행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단지 몇 사람에게만 세례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고린도의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행 18:8)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사람만 세례를 주고 그 외에는 세례 준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전혀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자기의 제자를 만들고 그들의 머리가 되는 그런 상황을 유발시키는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세례 주는 일은 다른 사역자들에게 맡기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자기에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뜻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17절) 라고 말했으며, 세례를 주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도록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며, 또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사역이 무엇인가를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행한 중요한 일은 복음(17절)과 십자가의 도(18절)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를 전하는 일이었다.
바울은 자기 개인의 사상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근원이시다. 그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산다. 이것이 바울의 전한 내용이고 모든 사역자들이 전해야 할 내용이며 그 위에서 우리 모든 성도가 살아가야 할 터전인 것이다.
Ⅳ. 바울의 전도 방법과 그 의도 1:17-31
[1] 사도 바울이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 태도는 ‘말의 지혜로 아니하며'(17절),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 2:4),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17절) 하며, 성공이 진리의 힘이 아닌 인간의 기교를 빌어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삭막한 교리가 아닌 신령한 능력의 말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평이한 말로 알아듣기 쉽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했다.
즉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민의 구주이시므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믿어야 함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진리는 인공적인 치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그 자체가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며 인간의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지는 거룩한 권위로 이 세상을 정복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평범한 전파는 이방 세계의 모든 철학과 웅변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
[2] 우리는 이러한 전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이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마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8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23,24절)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첫째,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다.
비록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 맞는 표적으로 그들을 만족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던 것이다(22절). 둘째,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구주의 사건을 실소에 붙였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다. 평이한 십자가의 교리는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경멸하였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받을 소망을 품으라니! 비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죄인으로 판결을 받아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믿으라니! 이것은 학식과 인간적인 이성과 교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인간적 자만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명심하자. 셋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셨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은 그의 다른 어떤 사역에서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훨씬 더 큰 지혜와 능력을 깨닫는다.
[3] 구약의 예언과 같이 우리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십자가의 승리를 볼 수 있다(사29:14).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9,20절).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학문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십자가의 영광스런 승리 앞에 부끄럽고 무색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실 때 그 구원의 길을 독자적으로 정하셨다.
이런 이유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21절). 이방 세계의 자랑하는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인간이 그들의 허망한 지식으로 득의 양양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1) 전파되는 내용이 세상의 지혜자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살고 그가 저주받음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으며 그가 정죄함을 받아 우리의 삶이 의롭게 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다. (2)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지혜로운 자나 유명한 웅변가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한 명도 동원되지 않았고 다만 몇 명의 어부들만이 부름을 받아 이 소식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다. 또한 이들이 모든 나라로 제자를 삼도록 위임을 받았다. 학식과 지혜가 있다고 거만을 떠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보고 그 진리 자체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이다(25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기독교는 외면적으로 매우 비천하고 연약해 보인다. 어떤 면에서건 세상적으로 특출난 사람이 복음의 전도사역을 위하여 선택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육으로 지혜 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 또는 고상한 자들에게서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평가하는 것처럼 평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세상의 약한 것들과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천한 태생과 낮은 계급과 무식한 자들을 택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쓰신다. 하나님은 어떤 도구와 그릇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시기에 가장 적합할까 하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신다. 지체 높은 신분이나 인격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자도 거의 없다. 전도자들이 가난하고 비천했던 것 같이 믿는 자도 대부분 그러하였다. 지혜자나 권력자나 귀족 중에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복음 속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가!
[4]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얼마나 적절한 지혜를 내셨는가를 살펴보자. (1) 인간의 교만과 헛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27,28절). 즉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유대인들이 그처럼 가치 있게 여겼던 그들의 제도를 부끄럽게 하셨다. 그들에게 제도가 있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항상 이방인들을 ‘없는 것들’이라고 일컬었다. 아무튼 이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모든 교만을 꺽기에 적절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만이 구원의 방법을 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계시하고 알린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놓여있다. 복음의 섭리는 인간을 겸손하게 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2) 복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주의 손이 전도자와 함께 하셨고 또 듣는 이들의 마음에 감화시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전하는 이에게나 듣는 이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 되셨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30절). 우리는 어리석지만 그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의롭게 하신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하지만 그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속박되었으나 그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은 ‘모든 육체가 주안에서 자랑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31절).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계획에 의하여 인간은 낮아지며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