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장 하나님 나라 복음] 하나님 공의의 심판(롬2:1-29)

로마서 2장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 공의의 심판이라는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공의롭게 심판한다. 유대인도 심판하고 헬라인도 심판한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한다.

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함 2:1-16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세계의 상태에 대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악하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유대인들의 상태 역시 매우 암담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똑같은 공의의 조건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다루신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한다.

1. 유대인들의 판단하는 행위를 규탄함(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사도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말을 한다. 바울은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는 말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비난을 그들에게 돌린다. 유대인들은 불쌍한 이방인들을 아주 형편없이 무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비록 우상숭배자들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악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핑계치 못하리라. 본성의 빛밖에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 핑계할 수 없다면 율법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2,3)

그는 여기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의로우신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2절). 즉 외모에 따라 되지 않고 행실에 따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범하고 있는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죄를 성토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매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그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치 죄를 반대하는 설교가 그 죄책을 보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가 보라.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이것을 피할줄로 생각하느냐. 그 문제는 아주 명백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죄인들의 양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호소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할 수 있느냐?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형식적인 겉치레에 속으시며 가장 의로우신 재판관이 그렇게 매수되겠느냐?”

3.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 백성의 비난(4,5)

[1]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곧 ‘그의 인자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고 있다(4절). 우리가 빛에 대해서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그만큼 사랑에 대해서도 더욱 죄를 범하게 된다. 고의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 특히 사람의 악을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한 다음 더욱더 대담한 죄를 범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한다. 길이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방법이다. 그는 죄인들을 짐승처럼 몰지 않으시고 인도하시며 위로하신다. 사랑의 끈으로 이끄시는 것이 곧 그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곧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베푸시는 그의 선하심을 생각한다면 우리모두는 틀림없이 회개하게 될 것이다.

민수기 1장 짧은 설교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인구조사

[2]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다(5절). 이러한 진노를 일으키는 것은 ‘회개치 아니하는’ 고집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회개치 아니하는 고집스러운 마음이라면 그 진로가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하나님을 성나게 한다는 것이 진노를 쌓는 다는 말에는 많다는 의미가 있다. 영원히 써도 없어지지 않을 만큼 많이 쌓였는데도 죄인들은 여전히 거기에다 진노를 더 쌓고 있다.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어떤 경우에는 은닉이란 뜻도 나타낸다. 언젠가는 이 비축물들이 터져 쏟아지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죄인들에게 길이 참으시는 날이지만 머지않아 진노의 날이 올 것이다. 그 진노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성냄과 같이 흥분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로운 심판 곧 죄를 벌하시는 그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지금은 종종 죄인들의 번영으로 인해 감추어지지만 머지 않아 그것이 온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4. 하나님의 판단의 의로움(6-11)

[1]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다(6절).

1)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이 사실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되는데(7,10절). 이는 그가 기꺼이 자비를 베풀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은혜를 베푸시는 대상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다(7절).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해 주실 자들은 첫째로 ‘의로운 목적에 굳게 선 자들이다. 실제적인 모든 신앙의 밑바닥에는 거룩한 대망이 깔려 있는데, 이 대망은 하늘처럼 높은 소망과 목표를 견지하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구하는 데는 손실이 따르며 또 그것을 구하려는 열망과 그 열망에 일치하는 노력과 추구가 수반되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로운 목적에 굳게 서서 의로운 길을 고수하는 사람들 즉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은 반드시 선을 행한 사람이어야 한다(10절). 선을 알고 있고 선을 약속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벽이슬이나 아침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일시적인 기분이나 첫 걸음에 보상해 주지 않는다. 면류관을 얻게 하는 것은 바로 인내이다.

즉 참고 계속해서 행함이다. 이 인내는 선행의 오랜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일의 어려움도 참는 것이다. 선을 행하되 계속해서 행하려고 하는 자들은 상당히 인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은혜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천국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며 여기서 말한 대로하자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다(10절). 흔히 이 지상의 헛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얻되 ‘영광과 존귀’뿐 아니라 ‘평강’도 얻을 것이다.

2) 화를 나타내심에 있어서(8,9절): 하나님의 화를 당할 대상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당을 짓는 자들이다. 고의적인 죄는 모두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다.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신앙의 진리는 알뿐만 아니라 지켜져야 한다. 진리에 불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불의를 좇는’ 것이다. 진리의 종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곧 불의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화의 결과는 ‘노와 분’과 환난과 곤고이다. 이런 것들이 죄의 삯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에게’ 쏟아지는데, 그것은 영혼이 그 진노를 받을 그릇이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영혼이 이 진노를 받는다. 지옥은 노와 분이 결과로서 영원한 화란과 공고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툼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황금홀에 절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그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다(11절).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실 때 그의 외적인 특권들을 고려하시지 않고 그의 진정한 상태와 성향을 보신다. 은총을 베풀거나 화를 내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큰 특권을 받은 ‘유대인’이 먼저(첫째)라면 다음(또한)은 그러한 특권은 받지 못했지만 자기의 악행에 대한 형벌을 결코 면제받지도 않고 자기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결코 잃지도 않을 이방인이다.

5. 하나님의 공의로움(12-16)

정도가 다른 세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었다.

[1] 본성의 빛: 이방인들에게는 이 빛이 있으며 그들은 이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즉 본성적인 양심 외에 달리 어떤 지침이 없는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들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율법을 어긴 죄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성의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본성의 빛이 이방인들에게는 기록된 율법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 없이 범죄’하였다고 모순처럼 들리는 말을 하였다(12절).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죄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들이 비록 기록된 율법은 갖지 못하였지만 그와 같은 것을 가졌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율법의 행위란 우리에게 해야 할 바를 가르치고 우리가 한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1) 그들에게는 본성의 빛에 의해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였다(14절). 그들에게는 정의, 공평, 명예, 순결, 사랑 그리고 자비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되었다.

2)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있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의 마음속에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는 것이 있었다. 양심이 곧 증인이 되어 일시적으로 압제 당할지라도 머지 않아 가장 은밀한 일까지도 증거할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양심의 증거에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양심은 이방인 세계에 켜둔 완전히 꺼지지 않는, 아니 전혀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촛불이다.

그들의 ‘생각이 서로’ 송사하거나 변명한다. 그들이 이러한 본성의 법과 명령을 지키거나 혹은 어김에 따라서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거나 무죄를 판결하게 된다. 이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을 대신해서 율법 노릇을 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제 범죄한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해도 의로우시며 또 그들은 무지를 이유로 내세울 수도 없다.

[2] 율법의 빛: 이 빛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12절).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그들은 아주 순전하고 분명한 율법의 빛을 받았으면서도 범죄한 자들이다. 이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율법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죄가 훨씬 더 무겁듯이 그들의 형벌도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첫째는 유대인에게'(9절)돌아가는 이다.

유다서 헬라어 설교말씀 거짓 이단을 조심하라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율법을 갖고 있고 율법을 들으며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의롭게 되지 못하고 오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13절). 그들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그들이 받은 율법대로 살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구원받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들음이 아니라 행함이다.

[3] 복음의 빛: 복음을 받은 자들은 복음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16절). 내 복음에. 복음이 대체로 바울의 복음이라고 불려졌는데, 이는 그가 그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을 그가 심판의 날에 관하여 한 말로 생각한다. 마지막 날에 관하여 계시된 바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온 세상의 심판을 위하여 정해진 날이 있다. 그 날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날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사실만큼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없다. 그때에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일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밝혀지는 위대한 날이다.

Ⅱ. 유대인들의 죄 2:17-29

사도는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하였는데, 이제 그는 여기서 그 위대한 진리를 유대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1. 그들의 고백을 인정함(17-20)

바울은 그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고백을 인정한다. 바울은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바를 알았다.

[1] 그들은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는 특별한 백성이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그것은 아주 명예로운 칭호였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다는 이 사실을 그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칭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악하였다. 가장 악한 행실들이 가장 훌륭한 이름 아래 감추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율법을 의지하며, 그들은 이 특권을 가지고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그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지라도 이 특권이 얼마든지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외적인 특권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의지만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 기뻐하는 것은 모든 신앙의 요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되 겉으로만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모든 외식의 요약이다. 영적인 교만처럼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

[2] 그들은 지식이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들이었다(18절). 하나님의 뜻만이 유일하게 서고 다른 모든 뜻은 그 안에서 녹아 합쳐질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바로 잡힐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시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 지극히 선한 것은 좋게 여기며.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잘 안다는 말은 “서로 다른 것을 분변한다”즉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안다는 말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8절 난외주를 참조하라-역주). 때로는 선과 악이 아주 밀접하게 붙어있어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적어도 자신들은 아무리 모호한 경우에라도 털끝 만한 차이를 가려내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논쟁에는 정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종교적 논쟁에 아주 능숙하면서도 경건의 능력에는 아주 문외한일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 여기서 말하는 대로하자면 그들은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다’고 하겠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는 실제로 동의하지만 그 동의가 그만 육신과 마음의 정욕에 압도되어 버릴 수가 있다. “더 나은 것을 바라보면서 더 악한 것을 좇아가노라”.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율법’에서 그들의 모든 교훈을 끌어내는데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들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데 그만큼 열심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20절에서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라고 불린다. 지식의 모양은 단지 경건의 모양만 산출 할뿐이다(딤후3:5). 지식의 모양이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3]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백성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였다(19,20절).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 말은 먼저 유대인들 전체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둠 속에 갇혀 앞을 못 보는 불쌍한 이방인들의 안내자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그들에게 배우기 위해 즉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그들에게 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이 말은 그들의 랍비와 선생들에게 적용된다. 바울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는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교만한 자부심을 보다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즐겨 되뇌이는 말이었다. 아무리 잘한 일이라도 떠벌이고 자랑하면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2.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함(21-24)

[1] 그들은 알면서도 죄를 지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을 자신들은 범하였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21절). 가르치는 일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종의 사랑의 행위이다. 물론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설교로 세운 것을 생활로 무너뜨렸다. 말씀의 성과를 가장 방해하는 자들이란 자신들이 전하는 선한 교훈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강단에서는 언제나 설교를 잘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강단을 떠나서는 아주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도는 유대인들이 많이 짓는 세 가지 죄목들을 특별히 언급한다. 첫째는 도적질이고 둘째는 간음인데(22절), 유대 랍비들 중 많은 수가 이 죄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셋째는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죄이다. 이 죄가 우상을 가증히 여긴다고 고백한 자들에게 씌워졌다. 구약 교회의 말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였다”(말 3:8,9)는 책망을 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자기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횡령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죄는 우상숭배와 거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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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은 그들의 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23,24절). 그들이 자랑하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이 그들에게 영광이 된 반면에 그들 자신은 하나님과 율법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를 비난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치욕거리가 되었다. 기록된 바와 같이(24절).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그 해당 성경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이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들이 죄를 지음으로 일으키는 큰 악은 그들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앙에 끼치는 불명예이다. 너희로 인하여 모독을…받는 도다. 즉 “네 자신이 받는 비난이 너의 하나님께 돌려지고 너로 말미암아 신앙이 손상된다”는 말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은 가르치는 자들이 들어야할 좋은 경고이다.

3.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의 무용성(25-29)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즉 순종하는 유대인들은 순종의 보상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만일 너희가 율법을 따라 살려고만 한다면 너희의 유대교가 너희에게 유익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 그리고 너희는 더 큰 빛을 받고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만일 그들이 받은 빛에 따라 산다면 할례 받은 유대인들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고 가르친다.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26절),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27절). 이 말은, 본성의 빛의 지시에 진심으로 복종한다면 즉 율법의 내용을 실행한다면 유대인들이나 다름없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이방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순종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예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의 제도를 지킨 무할례자들이었다.

그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불순종의 죄가 더욱 가증되었다(27절).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문서로서 그것을 읽을 뿐 법으로서 지키지 않는다. 외적인 특권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혜택을 덜 받고 별로 큰 소리 치지도 않는 사람들의 순종은 보다 큰 혜택을 받아 아주 으시대면서도 그에 따르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죄를 부채질 할 것이다.

[2] 그는 참된 할례를 기술한다. (28,29절). 그것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며(28절) ‘의문에 있는’ 할례도 아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외적인 제도를 전혀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적절한 때에는 유익하다) 그 자체를 의지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산다는 이름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려면 아브라함의 일을 해야 한다. 참된 할례는 ‘이면에 있고 ‘마음’에 있으며 ‘신령’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바른 칭찬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가면이나 그럴듯한 고백에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겉치레 속에 숨어 있는 본래의 모습을 꿰뚫어 보신다. 이 사실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표면적 육신의 세례는 세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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