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설교 말씀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말씀한다. 성령의 은사에는 병 고치는 은사와 예언하는 은사와 영을 분별하는 은사와 방언하는 은사와 통역하는 은사에 대해서 말씀한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성도는 성령의 은사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Ⅰ. 신령한 은사들 12:1-11
신령한 은사들, 즉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또 은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과 구원을 주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은혜가 전혀 없는 곳에 큰 은사가 있을 수 있다. 이 고린도 교회는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데서 야기된 혼란으로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1]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2] 바울은 구원을 받기 전에 그들이 처해 있었던 비참한 상태를 상기시켰다(2절). 전에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버리신 나라의 백성이었다. 이러하였던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가!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를 상기시킴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감사를 느끼게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전에 그들이 한 행동은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던 것이었다. 정말 비참한 상태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도, 자기들의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이런 일을 행했었다. 성령께서 이러한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들 속에 내주 할 수 있었겠는가?
[3]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은사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3절). 그러나 유대인도 이방인도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협잡군이라고 모독하고 그 이름을 저주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또 그를 신성모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를 저주함으로써 자체 모순되는 일을 하는 일을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어진 믿음이 아니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그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
[4] 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한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4절). 교회에는 여러 직임과 직책들이 있다(28-30절). 그러나 동일한 한 분의 주님께서 이 모든 직임을 정하셨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6절). 여러 가지 은사가 그들 각자에게 주어졌지만 그 본질은 동이라고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종류들 중 몇 가지를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8-10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그는 복음의 신비스러운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할 능력을 받았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즉 신령한 것(2:13)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풀기 힘든 문제가 있을 때, 권면하고 상담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즉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믿음을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즉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즉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성경을 설명하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즉 거짓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는 능력이다.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혹은 성령의 감화로 여러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혹은 외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은사를 말한다.
[5] 이러한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7절)은 그것들은 받은 자들의 유익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떠한 은사를 내리시던 간에 그 받는 자는 그 은사를 교회의 선한 일에 사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랑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11절).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을까? 은사는 사람의 뜻으로, 혹은 그것을 사모한다는 이유로 그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자의로, 기쁘신 뜻대로 주어진다.
Ⅱ. 한 몸의 많은 지체들 12:12-2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간의 몸에’비유함으로써 고린도 교인 중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1]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며 많은 지체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룬다(12절).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으니라(13절).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의 지체가 되며 한 몸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는 것이다. 잔을 마심으로 또 성령을 마시므로 그 지체로 존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세례이다.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는 성령의 세례 덕분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은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자유자든 노예든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2] 각 지체는 각기 독특한 형태와 위치한 용도를 가진다. 가장 하찮은 지체라도 몸의 한 부분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아마 발과 귀는 손과 눈보다는 덜 유용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15,16절) 또한 몸의 모든 지체는 신비스럽게도 동일한 부위에 동일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없다. 몸의 지체 중 가장 하찮은 것도 가장 귀중한 지체와 똑같은 한 지체로 한 몸에 속해 있음이 틀림없다. 모든 지체가 다 그리스도에게는 귀한 존재이다. 몸의 지체는 기능상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만 한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라(20절).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다. 몸의 지체의 다양성은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도 그 은사의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의 각 지체의 배열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른 것이다(18절). 그리스도의 몸도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위치에서 맡겨진 임무를 완수해야하며 다른 지체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21절). 몸의 모든 지체는 상호간에 필요하며 또한 상호간에 유용하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 모든 지체가 몸이나 혹은 다른 지체에 유익하다.
남은 지체도 불필요한 지체도 없으며 모든 지체가 각 지체가 몸에 유익하다. 따라서 어떤 훌륭한 은사를 지닌 교인이 좀 뒤지는 은사를 지닌 교인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눈은 손이 필요하며 머리는 발이 필요하다. 인간의 신체 구조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의 몸이야 얼마나 더 조직적이겠는가?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23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각 지체에게 이 같은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큰 지혜로 몸의 각 지체가 분열하지 않도록 질서를 세우셨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25절). 사람의 몸의 지체들은 지체 상호간 서로 도움과 보호로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큰 의무 중 하나는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이다.
Ⅲ. 은사의 종류 12:27-31
[1] 여기서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
1) 기독교인과 그리스도, 그리고 기독교인들 간의 관계,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모든 지체는 다른 지체와 상호 협동의 관계가 있다.
2)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각양의 질책, 그리고 그가 부여하신 여러 은사와 은총들(28절). 이 점을 살펴보면 첫째, 이 은사들과 직책들은 매우 풍성하고 다양하다. 그리스도는 축복과 은총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남아 돌 만큼 부요하게 받았다. 둘째, 이들 직책과 은사들의 서열을 살펴보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제일 앞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우리도 그것의 참 가치를 따라서 서열을 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서열 중에서 가장 뒤에 나오는 은사가 방언을 하는 은사이다. 이 모든 은사들 중에서 그 자체로서는 가장 무용하고 무의미한 은사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은사를 아주 귀하게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꺾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 방법인가! 인간은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을 가장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러한 은사들은 다양하게 분배된다. 모든 구성원과 제직들은 모두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다(29,30절). 성령께서는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은사를 내리신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와 직책으로 만족한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상호간에 봉사를 해야 하며 몸 된 교회의 선함을 증진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
[2] 사도 바울은 권면과 암시로 이 장을 맺는다.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는 당연히 가장 좋은 가장 가치 있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은혜가 더 귀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권면이 아니라 책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너희는 서로 상대방의 은사를 시기하는구나 너희는 그것들에 대하여 서로 다투고 분쟁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우월성에서 연유되는 분쟁임이 확실하다. 이런 우월성에서 형제의 사랑을 허물과 분쟁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서로 떠밀어 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성숙한 사랑으로 빛나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직책이나 능력 등 일시적인 자랑거리로 과시하는 것보다 훨씬 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