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제1권 13장] 하나님 말씀의 영구성

8. 말씀의 영구성

여기 몇몇 개들이 짖고 있는데, 그들은 말씀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감히 부인하지 않지만 은밀히 그의 영원성을 훔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셨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5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일종의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사역과 관계되는 여러 명칭들은 창조 사역이 있은 후에 그에게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불린 것). 그러나 하나님에게 새로운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말하는 그런 명칭은, 경건한 마음은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무슨 우발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주장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 : 17)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후에는 만유의 창조주가 되신 바로 그 말씀이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모세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어떠한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결론을 지으려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 : 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 5)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 : 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더 나아가 나는 여기서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는 구속의 문제를 다룰 때까지 미루어 두고자 한다.2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시편 45편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 : 6)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27 이를 왜곡한 채 “엘로힘”(Elohim)이라는 명칭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배자로도 불리는 분에게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명칭은 어떤 부가어(附加语)가 없이는 결코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 7 : 1)이라고 하신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바로에게”를 소유격 “바로의”라고 읽는데, 그것이야말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비범한 탁월성 때문에 뛰어난 것이 자주 “신적”인 것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그러한 해석은 곤란하고 무리한 해석이며, 더욱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 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 : 6).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그를 부르시는 이름이라”고 고쳐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성자를 다만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명백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의도일 뿐인데 이 구절에서 그렇게 많은 칭호들을 성부이신 하나님께 쌓아 올린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것과 같이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 : 5-6, 33 : 15 -16)고 한 예레미야서의 이 한 구절보다 더 명백한 말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은 다만 칭호에 지나지 않으며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그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 실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 : 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신이 세운 제단에 이 명칭을 붙였고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것을 붙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여기서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 : 35).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 : 15)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다른 구절에 대하여는 더 큰 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 : 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이름을 예루삼렘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지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근원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덧붙여 설명된 것이다.

10. 영원한 하나님의 천사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증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교묘한 이론을 내세워 피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 : 11, 12, 20, 21, 22, 7 : 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천사는 식물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 : 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 : 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표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 : 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 : 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 : 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28 불신앙은 더욱더 가증하다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29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중보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즉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 : 5)고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이 예언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 : 29)라고 한 모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 : 30)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 : 4).30 왜냐하면, 그의 낮춤의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 2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슥 2 : 3,9). 나는 우리의 신앙이 안전하게 채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더 이상 열거하지 않겠다. 물론 이 증거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거의 감동를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 : 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 : 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더우기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전부 다 수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개의 증거를 간단하게 선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미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증명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 8 : 14)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롬 9 : 32-33).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 : 10-11, 사 45 : 23)고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편의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 : 8, 시 68 : 18).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나타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그 위로 올라가심이 벌써 예표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 : 41, 사 6 : 1). 물론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성자에게 드린 하나님의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1 : 26). 또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6 : 7)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이러한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실로 시편에서 찬양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하신 것들이다. 일어나서 시온에 긍휼을 베푸신 분이 그 분이시며(시 102 : 13), 모든 나라와 모든 섬들의 지배권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시 97 : 1).

요한은 말씀이 항상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1 : 1, 14), 어찌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주저하였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 : 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히기를 두려워하겠는가?(고후 5 : 1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 : 17).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 : 6-7).

그리고 요한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신이라고 트집잡을까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 : 20)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 한 증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하나님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신 6 : 4).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5-6).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 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바울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제2의 신을 상상하겠는가?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이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마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 : 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하심 가운데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 : 17), 주님의 다른 말씀에 대하여는 극도로 둔감했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고 느꼈다. 그 결과 요한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 : 18).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 : 3).

그리고 그는 성부와 함께 세계 통치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다른 개개의 직무도 수행하셨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25)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이 말씀에 따라 이 권세는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이적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셨다(마 9 : 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다(마 9 : 4, 요 2 : 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 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이적에서 얼마나 명백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되어지고 있는가! 선지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 : 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것을 위탁하신 분이 어떻게 이적의 참된 창시자가 되지 못하겠는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을 권능을 주셨다(마 10 : 8, 막 3 : 15, 6 : 7). 더욱이 그들은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할 때에, 그 권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 : 6)고 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5 : 36, 10 : 37, 14 : 11).

더우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31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 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면(마 19 : 17),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의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 : 4)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신뢰하여,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은 그에게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누구든지 피조물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해석하였다.

곧 그 한 구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 : 11, 사 28 : 16)는 말씀이요, 다른 한 구절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 : 12, 사 11 : 10)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 : 47)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성경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기도야 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 요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 : 32). 다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 : 10).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러한 호소의 한 실례를 보게 되는데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 : 5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도행전에서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 9 : 13- 14)라고 증거한 것처럼, 이와 같은 실례는 그 후 모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 : 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 : 2).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고 명하셨는데(렘 9 : 24), 성자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의 근거라면, 누가 감히 그분를 가리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외에도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 : 7, 고전 1 : 3, 고후 1 : 2, 갈 1 : 3)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를 통하여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우게 된다.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 없는 어떤 사변(思辨)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2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성. 14-15)

14.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 : 2)고 한 모세의 증거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 : 16)고 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교묘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일에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33

여기서 성령의 신적 위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한 최상의 확증은 익숙한 경험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께 돌리는 것과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배우는 것들은 모두가 피조물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 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만일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현재의 성장하는 어떤 생명보다도 더 우수하고 탁월하다고 하면, 중생케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은 빌려 온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 11 : 34)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 : 10).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 : 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은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4 : 11).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므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 : 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 : 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 : 4)라는 바울의 말은 특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곧 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 : 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권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으로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전 3 : 6-17, 6 : 19, 고후 6 : 16).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전으로 택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약속 하셨지만 이 약속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나무와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령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34

그리고 사도는 가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 : 16-17, 고후 6 : 16)이라 불렀고 또 어떤 때는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전”(고전 6 : 19)이라고 불렀다. 성령을 속였다고 하여 아나니아를 책망하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 : 3-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를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구절 중에서 바울은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 : 9, 행 28 : 25-26). 실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만군의 주의 말씀이라고 변함없이 말하였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참조, 벧후 1 : 21). 그러므로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 : 10)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강요 1권 13장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 : 32, 막 3 : 29, 눅 12 : 10)면, 이 말씀은 분명히 성령의 신적 위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범하고 훼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날 교부들이 사용한 많은 증거를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저들은 우주의 창조가 성자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사야서에서는 “입술의 기운”(사 11 : 4)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거가 빈약하다. 그리하여 나는 경건한 영혼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만 진술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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