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제1권 13장]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1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2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论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4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5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6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 : 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로7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라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 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 : 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7a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8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9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10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11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운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条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12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던가?13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14 그러나 제롬은 “본체” (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는데15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시스” (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히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17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18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20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笔)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21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辩)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22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 : 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23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그러나 말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의 차이점을 살피고자 한다.

확실히,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 편에서부터 나온 단지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어리석은 일이다.24 오히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증거한 대로, 사도들(벧전 1 : 10-11)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위해 일한 후대의 모든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靈)이 말씀의 영이었다고 하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재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것이 있으라, 저 것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모세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남의 허물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 : 2-3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은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统辖)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 : 22).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의지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분별없는 천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자신의 계획과 심지어는 한층 더 은밀한 것까지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 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략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 : 1-3).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특수한 것을 귀속시켰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기독교강요 1권 12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고 동일하시고 또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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