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성경 말씀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뱀을 하나님이 저주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했다. 앞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사탄의 머리를 짓밟을 것을 예표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Ⅴ. 마귀에 대한 선고와 은혜 언약의 수립 3:14,15
하나님은 즉시로 뱀에게 형을 선고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하나님을 반역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1) 뱀이 시험하는 자에게 내려진 판결을 받은 것은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의 도구 노릇을 한 자들은 마땅히 마귀가 받는 형벌을 나누어 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점을 볼 수 있다.
1) 뱀은 여기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네가 모든 육축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14절). 성화도지 못한 교활함은 종종 사람에게 커다란 저주가 된다. 교활한 사람들이 악을 행할수록 더욱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2) 뱀은 여기서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적대감을 받게 된다.
①그는 앞으로 영원히 혐오스럽고 비열한 동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가 저지른 죄는 하와를 유혹하여 그녀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게 한 죄였다. 그가 받은 형벌은 그가 결코 먹고 싶지 않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네가 흙을 먹을지니라.
②그는 독을 지닌 유해한 동물로서 마땅히 미워하고 싫어할 대상으로 영원히 간주되게 되었다. 뱀은 사람에게 해로운 동물로서 종종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더 높은 곳은 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굽을 물어뜯었다는 말씀을 기억하자(49:17). 그러나 사람은 뱀을 이기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데, 이 말은 즉 모든 독사들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뜻한다.
뱀에게 선고된 이 판결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뱀을 집으리라'(막 16:18)고 말씀하신 약속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뱀과 여자는 아주 친밀했었고 금지된 열매에 관해서도 다정스럽게 얘기했으며 그들 사이에는 놀라운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사이가 틀어졌다. 죄악된 우정은 이내 극단적인 불화로 끝나게 마련이다. 악으로 연합한 사람들은 그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2) 이 선고는 마귀에게 내려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가 뱀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 자신이 장본인이었다.
1) 여기서 영속적인 비난이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큰 원수에게 씌워졌다. 뱀의 탈을 쓰고 숨어 있는 ①여기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고 타락하리라는 선고를 받았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사 14;12). 하나님 위에 올라서려 하고 그를 대항하여 반역의 머리를 들려고 했던 자가 여기서 공정하게 모욕을 받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겸손하게 만드실 것이다. ②그는 모든 인류에게 미움과 혐오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 받는다. 그는 여기서 전쟁 상태와 화해할 수 없는 적대의 상태에 떨어지도록 운명 지워졌다. ③마침내 그는 위대한 구속자에 의해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선고 받는다.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 이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간교한 계략은 좌절될 것이고 그의 빼앗긴 권세는 완전히 분쇄될 것이다.
2) 여기서 사람들 가운데 발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 사이의 영속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이러한 반목의 결과이다.
①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타락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있다.
②또한 이 세상에는 악한 자와 경건한 자 사이의 계속적인 투쟁이 있다.
3) 여기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타락한 인류를 구출해 내는 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이 세워졌다. 이 약속은 우리의 첫 조상이 듣는 가운데 선언되었으므로 틀림없이 그들은 자기들 앞에 열린 소망의 문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 시대의 동이 트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기자마자 곧 치료제가 마련되고 계시 되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이 계시 되었다.
①그가 여인의 후손, 곧 그 여인의 후손이 되리라는 것은 그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족보(눅 3장)는 그가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여자에게 그리스도를 그녀의 씨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주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마귀가 꾀었고 아담이 그 책임을 전가한 바로 그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의 위엄을 더욱 높이시고자 하신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그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을지라도 해산함으로써(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미로 읽는다). 즉 그녀의 자손으로 태어날 약속된 씨를 낳음으로써 구원받게 되리라는 이 사실로써 자신의 은혜를 더욱 돋보이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여자만의 곧 처녀의 씨가 되어야만 했다.
②그의 고통과 죽음은 사단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 즉 그의 인성을 상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단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시험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를 놀라게 하여 절망에 빠지게 하려 한 것도 사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생각을 집어넣고, 베드로에게 그를 부인할 생각을, 대제사장들에게는 그를 박해할 생각을, 거짓 증인들에게는 그를 고소할 생각을 그리고 빌라도에게는 그를 정죄할 생각을 넣어 준 자도 바로 이 마귀였다.
그는 이 모든 일들 가운데에서 구주를 없앰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파멸시키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셨다(히 2:14). 그리스도의 발꿈치는 그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 찢겨졌을 때 상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도들이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 속에서 계속된다. 마귀는 성도들을 시험하고 옥에 가두고 박해하며 죽인다. 그는 이렇게 해서 성도들의 고통 속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발꿈치가 상할지라도 그 머리는 하늘에서 안전하니 감사한 일이다.
③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써 승리하셨다. 사단이 여기서는 여자를 짓밟고 모욕을 주었지만 장차 때가 차면 여자의 후손이 그를 이기기 위해서 일어나실 것이다(골 2:15).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은 즉 그가 사단의 모든 계략과 권세를 파괴하고 그의 나라와 세력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시험들을 물리치셨다. 그는 죽으심으로써 마귀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셨다. 즉 이 짐승의 머리에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신 것이다.
Ⅵ. 여자에게 내려진 선고 3:16
우리는 여기서 하와의 죄로 인하여 여자에게 내려진 선고를 보게 된다.
(1) 여기서 그녀는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는 한 가지 고통만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그것은 곧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그 일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따른다. 우리는 죄가 세상에 슬픔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알지 못했더라면 슬픔도 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크게 더하리니. 따라서 우리에게 죄가 없을 때 슬픔이 더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음이나 슬픔이나 모두가 헤아릴 수 없는 악들이다. 이제는 아이를 낳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다. 게다가 낳은 아이들이 악하고 어리석다면 그들은 더욱더 그들을 낳은 어미에게 슬픔을 가져다 줄 것이다.
(2)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라.’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의무가 형벌이 되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하와가 스스로 금지된 열매를 먹지 않고 그것을 먹도록 자기 남편을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결코 자신의 복종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의무가 힘들지라도 결코 그것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의무를 그렇게 만든 죄에 대해서는 한탄해야 한다. 자기 남편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장하는 아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고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1) 이 선고 가운데는 진노와 더불어 하나님의 큰 자비가 뒤섞여 있다. 여자는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며 그 고통은 아이를 낳는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니라'(요 16:21). 그러므로 선고는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저주가 아니라 회개에 이르게 하는 징벌이었다.
Ⅶ. 아담에게 내려진 선고 3:17-19
먼저 그의 죄가 언급된 다음에 이 선고가 진술되었다.
(1)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이 선고로 인해 그의 거처가 저주를 받았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17절). 이 저주의 결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즉 땅에서 나는 모든 좋은 열매는 사람이 땅에다 자기의 노력과 지혜를 들여야 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선고 가운데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살펴보자.
①아담 자신은 뱀이 받은 것처럼 저주를 받지는 않았다(14절). 하나님은 그를 위해 많은 복을 쌓아 두셨다.
②그래서 그는 여전히 땅 위에서 살 수 있었다. 비록 땅이 본래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많이 상실하였을지라도 입을 벌려 그를 삼키지는 않았다.
2) 그의 노동의 즐거움이 그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①이후부터는 일이 그에게 수고로운 것이 되어 그는 계속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일하게 될 것이다(19절). 죄를 짓기 전에는 일이 그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때에는 힘들여 일하지 않고서도 동산을 가꿀 수 있었다. 아담이 죄를 짓지만 않았다면 땀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동은 우리가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우리의 의무이다.
②이후부터는 식물이 그에게 달가운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본래의 상태와 비교해 볼 대 그렇다). 그는 ‘수고하고'(17절), ‘얼굴에 땀을 흘려야'(19절)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설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기쁨 가운데에는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질병과 재난, 죽음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죄와 더불어 세상에 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선고에도 긍휼이 내포되어 있는 그는 땀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의 수고는 그에게 안식을 줄 것이다. 그는 슬퍼하기는 할 것이지만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수고하기는 할 것이지만 수고하는 가운데 마음에 힘을 돋궈 줄 빵을 먹을 것이다.
3)그의 일생이 아주 짧아졌다. 그의 일생이 얼마나 많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의 날수가 짧다는 것이 그에게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럴지라도 그 선고를 끝맺는 죽음이(물론 일생이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닐지라도)사람의 본성에 두려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너희는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리라. 전체 가운데서 흙에서 나온 부분인 네 육신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왜냐하면 너는 흙이기 때문이다. 네 몸은 네 영혼 곁을 떠나 한 줌의 흙이 되어 그것에 적절한 장소인 무덤에 머물러 있다가 땅의 티끌과 함께 뒤섞일 것이다.” 즉 ‘본 흙'(시 104:29)으로 돌아갈 것이다.
흙은 흙으로 티끌은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살펴보자. ①사람이란 체질이 약한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다. 먼지, 곧 천칭 접시에 묻어 있는 작은 티끌처럼 하찮은 존재이다. 모두 합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존재이다. 먼지처럼 무력하며 견고함이란 전혀 없는 존재이다. ②사람이란 죽을 수밖에 없고 또한 죽어 가고 있는 존재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커다란 먼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③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롬 5:12).
(2) 우리의 첫 조상에게 내려진 선고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아담과 그의 죄악된 자손인 인류의 영혼에 떨어진 죄의 비참한 결과가 이 선고 가운데에서 아주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비록 여기에는 신체에 영향을 주는 불행만이 언급되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영적인 불행들을, 즉 영혼에까지 미치는 저주를 보여 주는 하나의 본보기였다.
①해산의 진통에 의한 여인의 고통은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 즉 죄를 깨달은 양심의 공포와 고통을 나타낸다.
②여자가 남자에게 종속하도록 격하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영적인 자유와 의지의 자유의 손실을 뜻하는 것이다.
③땅이 열매를 잘 맺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는 저주는, 타락하고 죄 지은 영혼이 선한 일을 잘 내지 않고 악한 것은 풍성히 내리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잘 나타난다.
④수고와 땀은 사람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애써야 하는 어려움을 보여 준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죽으심과 고난으로써 이루신 속죄는 여기 우리 첫 조상에게 내려진 선고를 충분히 보상하였다.
①해산의 고통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영혼의 수고’를 읽는다(사 53:11).
②복종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서 나셨다(갈 4:4).
③저주가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그 죽음 역시 저주 받은 죽음이었다(갈 3:13).
④가시덤불이 죄와 더불어 생겨났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⑤죄 때문에 우리가 땀을 흘리게 되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커다란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셨다.
⑥슬픔이 죄와 더불어 들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그의 영혼은 고통 가운데서 극도의 슬픔을 겪었다.
⑦죽음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와 같이 치료 연고가 상처만큼이나 넓게 발라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자!
Ⅷ.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지음 3:20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 그를 “붉은 흙”이라는 뜻을 지닌 아담이라고 부르셨다. 이제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 곧 “생명”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담은 죽어 가는 몸을 표시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하와는 살아 있는 영혼을 표시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 그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렇다.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였기(즉 어미가 될 것이었기)때문이었다. 아담이 전에는 그녀를 아내로서 이샤(ishah), 곧 여자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그녀를 어미로서 하와, 곧 생명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만일 이름짓는 이 일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한 가지 실례이며, 그가 처음에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 주셨던 축복을 취소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방금 하신 언약, 곧 여자의 후손 바로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언약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둘째, 만일 아담이 직접 이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믿음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에게 그들이 모든 산 자의 부모가 되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집행 유예의 축복에 대한 믿음이었다. 또한 그의 믿음은 여기에서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부르는 가운데 염두에 두었던 약속된 씨의 축복에 대한 믿음이었다.
Ⅸ.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3:21
우리는 여기서 우리 첫 조상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사후의 배려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순종하는 자식들을 바로잡으시는 중에도 여전히 그들과 부자간의 관계를 유지하신다. 뿐만 아니라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그들의 의복을 위하여 가죽 옷을 마련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의복도 주신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28:20). 곡식과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양털과 삼도 하나님의 것이다(호 2:9).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들의 몸을 감싸기에 그것은 너무 좁았다(사 28:20). 우리 자신이 만든 의의 누더기는 다 그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넓고 튼튼하고 질기며 잘 어울리는 가죽 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의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한다.
Ⅹ. 에덴에서의 추방 3:22-24
우리는 여기서 범죄자들에게 내려진 선고가 부분적으로 그들에게 즉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된다.
(1) 그들은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신랄한 질책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공정하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그가 거의 신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이 말씀은 그들을 깨우치고 겸손하게 만들며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알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하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도록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신다'(시 83:16).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 같은 혼란 속에 그들을 놓아 두셨다.
(2) 그들은 마땅히 버림을 받아 낙원에서 쫓겨났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이유 : 그것은 그들이 손을 뻗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단신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우쭐해져서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여 자기들이 영원히 살리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즐거움의 동산에서 추방시키신 방법 :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시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①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일반 세상 땅으로 내쫓으셨다. 이 사실은 그들과 그들로 인해 죄책을 진 모든 인류를 낙원의 축복과 영광이었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쫓아내셨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줄어들고 상실되었으며 따라서 그들과 그들의 창조주 사이에 있어 왔던 왕래도 중단되고 깨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 뒤에 어디로 보내셨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밖으로 쫓아내실 수도 있었으나(욥 18:18)단지 그들을 에덴동산에만 쫓아내셨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들의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고통의 땅이 아니라 수고의 땅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무덤이 아니라 토지로, 그리고 토굴 감옥이나 교도소가 아니라 노역소로 보내졌고 쇠고랑을 끌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쟁기를 잡도록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 토지를 가는 그들의 수고는 땅의 소산물을 먹는 것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근본된 토지와 씨름하는 것은 좋은 목적들을 위해, 즉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훗날 그들의 종말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비록 우리의 첫 조상은 순결한 상태 가운데서 누리던 특권들에서는 쫓겨났을지라도 그들은 절망에 빠지도록 버려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는 그들에게 새로운 조건 위에서의 두 번째 시험 단계를 마련하였다.
②하나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쫓고 다시 들어올 생각은 일체 포기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시기 위해 그룹들의 분견대, 곧 저항할 수 없는 무서운 능력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군대를 에덴 동산 동편에 두어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훔치거나 동산에 억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아담에게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쾌하게 여기셨다. 둘째, 천사들은 그를 대적하였다. 그가 천사들과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한, 하늘의 군대들과의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셋째,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막혔다.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들여보내셨던 흠 없는 순결의 길이 막힌 것이다. 그 이후로 그가 첫 번째 언약에 의해서 의와 생명과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 언약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 멸망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담에게 계시하셨는데 그것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염검을 제거할 약속된 후손 안에서 생명과 행복을 기대하도록 은혜를 베풀고 격려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우리와 화해하였고 가장 거룩하신 자에게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