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성경공부는 여호수아 역사적 배경과 기록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흐름은 오래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여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다. 여호수아서의 이러한 두 흐름은 ‘언약의 성취’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서 하나로 연합되어 만난다. ‘언약의 성취’라는 개념, 즉 ‘하나님께서 창세기로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와 율법을 통해 수차례 반복하여 축복하셨던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라는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본서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이며 연구 과제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풍부한 영적 진리의 체득을 위해서는 먼저 여호수아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 위에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정복과 분할 사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형성되어야 한다. 본문의 서론은 이러한 순서에 따라 먼저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본 후, 여호수아서의 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히브리 마소라 성경에서는 본서 히브리서의 명칭을 본서의 주인공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본떠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본서의 주제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할’인데 그러한 사역이 모세의 후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70인역’과 ‘불가타역’. 그리고 영어 성경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70인역'(LXX)은 <이에수스>로, ‘불가타역'(Vulgata)은 <Iosue ; 요수에>로, 그리고 영어 성경에서는 <Joshua ; 요수아>로 명명하였는데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인정 영어 성경을 그대로 본떠 ‘여호수아’라 칭하였다. 한편 구약에서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여호수아’의 히브리 표기를 <예호수아; 신 3:21>, <호쉐아; 신 32:44>, <예호수아; 수 1:1>, <예수아; 느 8:17>의 네 가지로 표현하였다.
Ⅱ. 저자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견해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본서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저술 편집되었다는 ‘편집설’과, 둘째는 여러 사람에 의해 편집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가 아닌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제3의 인물’로 보는 견해, 그리고 셋째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를 여호수아 자신으로 보는 견해이다.
1. 편집설 또는 문서설
이러한 학설은 고등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견해로서 그 요점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호수아 한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을 후대의 사람들이 편집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여러 내용들이 서로 상충되며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전쟁 기록의 차이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첫 번째 근거는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여러 번의 전쟁 기록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즉 1-12장에 나오는 전쟁 기록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모든 지파가 연합하여 치른 전쟁인 반면에 13-24장에 나오는 전쟁 기록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각기 단독으로 전쟁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이 둘의 전쟁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수아서 전체를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을 기준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로 분류한 뒤 전반부의 전쟁 기록은(1-12장) ‘여호와 문서 기자의 기록’으로 후반부의 전쟁 기록은(수 13:13; 15:13-19, 63; 16:10; 17:12, 13, 16-18; 19:47) ‘엘로힘 문서 기자의 기록’이라 규정하고 여호수아서는 ‘이러한 문서들이 편집된 것’이라 결론지었던 것이다.
2)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의 차이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는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즉 아이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을 수 8:3절에서는 30,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8:12절에서는 5,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볼 때 여호수아서를 한 사람의 기록으로 볼 수 없으며 여호수아서는 여러 저자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한 기록의 차이
편집설 또는 문서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은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 그 주위를 돌았던 자들의 신분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 그 주위를 돌았던 자들을 수 6:3, 7, 10절에서는 ‘이스라엘 군대’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6:4, 5절에서는 제사장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를 여러 사람의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수아서가 ‘여호와 문서 기자’와 ‘엘로힘 문서 기자’, ‘신명기 편집자’와 ‘제사 문서’ 등이 편집 된 것이라 결론짓는다.
2. 편집설에 대한 반박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편집설의 주장은 성경이 의도하는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한 채 성경의 외형적 모습과 단편적 사실만을 바라보고 오해한 데서 기인한 잘못된 해석이다. 그들의 눈에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위의 여러 구절들은 오히려 본서의 단일 저작설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전쟁 기록의 차이에 대한 재해석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전반부의 전쟁 기록(1-12장)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일어난 전체적인 전투였던 점에 비해 후반부의 전투 기록(13-24장)은 개별적인 전투였다는 차이점을 주장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여호수아서 전체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여호수아서는 그들의 주장대로 1-12장의 전반부와 13-24장의 후반부로 분리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그들의 주장대로 전쟁의 형태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의한 분류인데 이러한 사실은 가나안 땅의 ‘정복시에 있었던 국가적인 전투’와(1-12장) ‘분할 후의 개별적인 전투'(13-24장)의 양자 모두를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1-12장의 전투는 당연히 민족적인 전투여야 하며, 또 민족적인 전투일 수밖에 없으나 가나안을 분할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의 전쟁 기록은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처럼 이해될 것이 아니라 ‘정복시의 국가적인 전투’와 ‘분할 후의 개별적인 전투’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전쟁 기록의 차이를 주장하는 그들의 편집설은 인정될 수 없다.
2)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의 이중적 기록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인 ‘아이 성 전투에 참가한 인원의 차이, 즉 30,000명(참조, 수 8:3)과 5,000명(참조, 수 8:12)의 차이 역시 편집설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수 8:3절의 30,000명과 12절의 5,000명 전부를 복병, 또는 공격 인원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3절의 30,000명은 ‘아이 성 공격에 동원된 병력의 총수’로 12절의 5,000명은 그중 ‘매복시킨 복병의 수’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 외에도 3절과 12절의 사건을 독립된 두 개의 사건, 즉 30,000명을 매복시킨 사건과 5,000명을 매복시킨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설명도 있는데 이 둘 중 어느 해석을 취해도 3절과 12절이 편집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3)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한 성격적 근거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발견해 낸 ‘여리고 성 함락의 공로자들’ 즉 여리고 성의 주위를 돌았던 자들의 차이 역시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의 부족에서 온 오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6:3, 7, 10절의 ‘이스라엘 군대’와 6:4, 6절의 ‘제사장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돌았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 앞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행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 역시 여호수아서의 편집설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못 된다.
3. 제3의 인물 저작설
이 주장은 주로 주석가 ‘카일'(Keil)에 의해 제기된 주장인데 그 핵심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나 그를 여호수아 자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여호수아의 생이 끝난 후의 기록’ 즉 수 24:29-33 절의 기록 때문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호수아의 생이 끝난 뒤의 기록으로 보아 본서를 여호수아의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카일'(Keil)은 여호수아가 아닌 제3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를 여호수아서의 저자로 세우는데 그가 세운 제3의 인물은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사실에 동참하였던 자’, 자세히 말해서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 중의 일원'(참조, 수 5:1)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3의 인물’을 지칭하는 ‘우리’라는 복수의 수 5:1절은 ‘카일'(Keil)의 말대로 ‘가나안에 들어간 후대의 사람’을 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넜다’는 여호수아의 신앙 고백, 또는 찬양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죽은 후의 일들을 기록한 수 24:29-33절이 비록 여호수아의 직접적인 기록으로 불 수 없다 할지라도 위대한 신앙인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첨가되었다고 해서 그 책 전체의 저자를 문제 삼을 수 없으므로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가 아닌 제3의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4. 여호수아서의 저작설에 관한 성경적 견해
유대인의 전통적인 견해와 보수주의 학자들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호수아라는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이 이렇듯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라 주장하는 이유는 본서에 기록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기록이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자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서의 여러 가지 정황과 역사적 배경 등이 여호수아 이외의 저자를 인정할 수 없게 하고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참조, 수 24:26)라는 여호수아서의 자증 때문이다. 물론 여호수아 자신이 직접 저작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수 24:29-33절의 기록까지도 여호수아의 기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수 24:29-33절까지의 기록은 여호수아의 기록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함께 그 사건을 목격한 어느 사람의 기록으로 인정하여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수 24:29-31)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수 24:33)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첨가 때문에 ‘여호수아 저작설’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정통적 견해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첨가된 모세의 죽음과 사후에 관한 기록(참조, 신 34:1-12) 때문에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할 수 없듯이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한 짧은 기록 때문에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 저작설’ 전체가 의심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 자신이며 편집설이나 문서설, 또는 제3의 인물 저작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성경의 배경과 사상에 무리하지 않고 일치하는 해석이며, 또한 성경 자체의 증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러 사람이나 제3의 인물이 아닌 ‘여호수아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것이다.
Ⅲ.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목적’과 ‘교리적인 목적’, 그리고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역사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역사적인 목적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주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큰 민족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을 자신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인도해 들이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 경로와 전쟁 기록, 그리고 점령지의 분할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실천하시는가를 보여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2) 교리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교리적인 목적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목적에서도 밝힌 대로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증거’이고, 둘째는 승리하는 삶, 즉 원수와의 대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 안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는 ‘믿음으로의 승리’이며, 셋째는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허락하시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의 투쟁’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3) 기독론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기독론적 목적이 지니는 핵심은 ‘여호수아를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형론은 여호수아의 이름과 그의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먼저 ‘구원’을 뜻하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헬라어 명칭이 ‘예수’이며, 그 의미 역시 ‘구원’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사역이 구원받은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사역을 거의 완벽하게 예표해 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여호수아서를 연구할 때 이러한 모형론 연구에 더욱 중점을 두고 연구한다면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의미보다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를 통해 얻는 구원과 승리라는 놀라운 영적 진리를 깨닫는 새로운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기록 연대
여호수아서의 저작자를 여호수아로 보지 않고 여러 문서들의 편집으로 생각하는 고등 비평가들은 본서의 저술 연대를 B.C. 950년경에서 B.C. 200년경 사이의 긴 세월로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활동하던 시대와는 동떨어진 훨씬 후대의 시기로 설정한다. 그들은 이렇듯 여호수아서의 저작 연대를 후대의 시기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편집설 때문인데 편집설을 주장하는 그들로서는 많은 문서의 수집과 편집이라는 자신들의 학설 때문에라도 여호수아서의 기록 연대를 그렇게 후대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수아가 살아 있던 당시의 시대로 증거하고 있는데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생 ‘라합’의 생존. 성경의 저자는 자신이 여호수아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즉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라합이 생존하고 있음을 증거하였다(참조, 수 6:25). 만약에 편집설을 주장하는 고등 비평가들의 말대로 ‘오늘날까지’라는 말을 B.C. 200년경으로 생각한다면 라합은 B.C. 200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커다란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기생 라합이 살아 있다’는 말씀은 기생 라합이 생존해 있던 시대, 즉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후의 얼마 되지 않아 여호수아서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둘째, 예루살렘의 본토인들인 ‘여부스 족속’이 잔존. B.C. 200년 설에 대한 두 번째 반박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던 ‘여부스 족속’이 여호수아서의 기자가 여호수아서를 기록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말씀이다(참조, 수 15:63).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여부스 족속은 다윗 왕 때에 가서야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었다(참조, 삼하 5:5-9).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이 남아 있었다’는 말씀은 본서의 기록이 다윗 왕 시대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호수아서가 B.C. 20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은 여지없이 반박되고 만다.
셋째, 여러 지명들의 옛 이름 사용. B.C. 200년 설에 대한 세 번째 반박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여러 지명들이 거의 모두 옛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바알라’를 ‘기럇 여아림'(참조, 수 15:9)으로, ‘기럇 신나’를 ‘드빌'(참조, 수 15:49)로, 그리고 ‘기럇 아르바’를 ‘헤브론'(참조, 수 15:13)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옛 명칭의 사용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B.C. 200년경에 살았던 자가 아닌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B.C. 200년 설은 인정될 수가 없다.
넷째, 기브온 사람들의 성전 봉사. 여호수아서는 본서가 기록될 때만 해도 기브온 사람들이 성전 곁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봉사를 하였다고 증거한다(참조, 수 9:27). 그런데 삼하 21:1-9절을 보면 사울 왕의 치세 때에 기브온 사람들이 학살되어 더 이상 여호와의 성막 곁에서 봉사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를 패고 물을 길으며, 여호와의 성막 곁에서 봉사하였다’는 말씀은 본서의 저술이 사울 왕의 치세 훨씬 이전에 기록된 것임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살펴볼 때 여호수아서의 저술 연대를 B.C. 200년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그보다는 훨씬 이전의 여호수아 당시로 보아야 하는데 출애굽의 시기를 B.C. 1446년으로 생각하고(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의 제Ⅱ권 출애굽기 서론의 ‘출애굽 연대’ 부분을 참조할 것)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40년 후에 시작된 정복과 정복지의 분할을 모두 마친 후의시기로 추정할 때 여호수아서의 기록 연대는 B.C. 14세기 초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Ⅳ. 특징과 구조
1. 특징
여호수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스라엘 역사상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전쟁의 역사’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 신학자 ‘얀센'(I. L. Jensen) 박사는 여호수아서를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의 긴 승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더 큰 특징은 그렇듯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아이성 싸움에서 패한 단 한번의 패전 외에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무력이나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승패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었다.
즉 ‘믿음의 순종’, 이것만이 그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었고 성공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투의 외적 지도자는 여호수아였지만 실제로 전투를 치르고 그들을 인도하는 내적 지도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예수만을 전적으로 의뢰케 하며 승리의 삶을 위한 ‘믿음의 순종’을 깨닫게 하고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소망을 주는데, 이렇듯 이스라엘의 길고 긴 전쟁의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을 영적 전투의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 새로이 무장시킨다는 점이 바로 여호수아서의 특징이다.
2. 구조
여호수아서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신 가나안의 정복과(1-12장), 둘째는 정복한 가나안 땅의 분할(13-24장)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내용은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정복’의 전반부(1-12장)는 ‘정복을 위한 준비'(1-5장)와 ‘가나안의 정복'(6-12장)으로, ‘분할’의 후반부(13-24장)는 ‘각 지파에게 분할된 기업들'(13-21장)과 ‘여호수아 생애의 말년에 대한 기록'(22-24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와 함께 본서 전체의 맥락을 흐르고 있는 주제는 ‘정복과 분할을 통한 언약의 성취’이며, 그 주제 성구는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라는 수 11:23의 말씀이다. 이제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여호수아 도표1>.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구조 이해는 여호수아서에 흐르고 있는 ‘언약의 성취’라는 주제를 파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여호수아서의 좀더 심오하고도 깊은 부분까지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