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장 설교문은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초기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모두 마치고 죽음을 맛보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 엘리야의 승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해서 소망하게 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이적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
Ⅰ.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음 2:1-8
엘리야의 생애와 그에 관한 사건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조금 밖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볼 길이 없고 그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합의 통치 몇 년인지, 그가 사라진 것이 여호람의 통치 몇 년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가 얼마 동안이나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도 추측할 수가 없다. 다만 약 20년쯤 활동하지 않았나 추정해 볼뿐이다.
(1) 하나님께서는 회오리바람으로 그를 하늘로 데려 가시기로 결정하셨다(1절). 하나님께서 왜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엘리야에게만 그런 특별한 영광을 베푸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즉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를 안 사람이었으나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여기서 다음 내용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그의 크고 특별한 헌신을 돌아보셨다.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고 선지 생도들로 하여금 그의 열심과 충실을 본받아 그들이 살고 있는 타락한 현실에 대하여 올바로 증거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해 이것을 작정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현재 교회의 어둡고 부패한 상태를 굽어보시사 이 세상의 삶 뒤에 또 다른 삶이 있음을 매우 분명한 증거로 나타내시고 또 신실한 소수의 무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희구로 향하게 하시고자 이와 같이 작정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복음적인 섭리를 의도하셨다. 따라서 엘리야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천국 문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며 상이었다. 엘리야는 믿음과 기도로 하늘과 많은 교제를 나누다가 이제 그곳으로 올리워지는 것이다. 이는 비록 짧은 삶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늘과 교제를 가진다면 그 영혼(즉 그 사람)은 그곳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엘리사는 엘리야가 이 땅에 있는 한 그와 함께 있으며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엘리야는 그를 떨어지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즉 그는 엘리사를 길갈, 벧엘, 여리고에 머물게 하려 했다(2,4,6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시려는지 알고 있었으나 그는 그와 같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의 겸손으로 생각한다. 엘리야은 엘리사를 어느 곳이든 머무르게 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가기까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4,6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엘리야가 살아있는 동안 그와 거룩한 천국의 대화로 교훈을 얻고자 해서였다.
2) 엘리야가 떠나는 것에 대해 만족하기를 바람에서였고 또한 그가 들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자 해서였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굳게 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3) 엘리야는 승천하기 전에 선지 학교를 방문하여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스라엘의 많은 성읍에 그러한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사마리아에도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생도들’을 볼 수가 있는데 두 개의 금송아지 중 하나가 세워져 있는 벧엘에서조차 그 수효는 상당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무시한 채 최근에 건설된 여리고에서도 많은 생도들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다 나라에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성전 봉사자가 있었으나 이스라엘 나라에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이 학교들을 만드셔서 훈련을 시킴으로서 그곳에서도 종교 의식을 행하게 하셨다.
(4) 선지 생도들은 이제 엘리야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1) 그들은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말했는데 벧엘 뿐 아니라(3절), 여리고에서도 그러했다(5절).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3,5절). 엘리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으며'(같은 경우에 처한 주의 제자들처럼;요16:6)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재삼 들을 필요가 없었고 귀기울이지도 않았다.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3,5절). 그는 엄숙한 침묵으로 사태를 받아들이면서 말하였다. 나도 아노니 잠잠하라(슥2:13).
2) 선지 생도들은 비록 가까이 있지는 않았으나 멀리 떨어져서 그 일의 증인이 되고자 그 뒤를 따라갔다.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며(7절).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멸시받은 선지자를 하늘이 존귀케 하는 것을 직접 보게 함으로써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5) 엘리야가 요단강을 가른 이적은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의 승천의 서곡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땅의 가나안에 들어갈 때 나타났던 이적과 같은 것이었다(8절). 엘리야는 승천하기 위해 요단 저편으로 가야만 했다. 이는 그곳이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 곳에 간 것은 모세가 죽은 장소에 더 가까이 이르기 위함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렇게 함으로 가장 멸시받던 그 지역을 존귀케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단강을 가르심으로 그를 높이셨던 것 같이 이 일을 통해서 올리워지려는 엘리야를 높이셨다(수 3:7).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데려가실 때 죽음은 곧 요단강이 된다. 즉 그것은 승천하기 바로 전에 있는 것으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한 길, 곧 안전하고 편안한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 강을 갈랐는데 이는 주의 속죄함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Ⅱ. 엘리야의 승천 2:9-12
1. 자기 대신 엘리사를 세움(9,10)
엘리야는 처음 엘리사를 만나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을 때보다 훨씬 진지한 마음으로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결심을 했다(참조, 왕상 19:19).
(1) 엘리야는 엘리사의 한결 같은 애정과 시중에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즉 마지막 떠나기 전에 어떤 축복을 내려주기를 원하는지 구하라고 말하였다.
(2) 가장 좋은 것으로 부하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엘리사는 여기서 갑절의 영감을 구한다. 그는 부도 영광도, 그리고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위해서도 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과 그 세대를 섬기기 위한 자격을 갖추게 해달라고 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하였다.
1) 영감 : 그가 구한 것은 엘리야의 능력 안에 있는 영의 은사나 은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영감을 주소서”라고 하지 않고(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영감이 내게 있기를, 즉 나에게 이것이 있어지도록 하나님께 구해 주소서”라고 구했던 것이다.
2) 엘리야의 영감 :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였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사역을 수행하고 선지 생도들의 아버지가 되고 적들과 상대해야 하고 그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어려움들을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3)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 : 그는 엘리야가 가진 것의 두 배를 말한 것이 아니며 다른 일반 선지자들이 가진 것의 두 배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는 엘리야 밑에서 배웠던 엘리사에게 주어졌던 그러한 큰 영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엘리사는 엘리야 밑에서 배웠던 것이다.
(3) 엘리야는 두 가지 단서 하에 엘리사가 구한 것을 약속하였다(10절).
1) 엘리사가 그것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엘리야는 그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부름으로써 엘리사에게 할 바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기에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너무 큰 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2) 그가 마지막까지 자기와 함께 하고 자기의 마지막을 봐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를 내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10절).
2. 엘리야가 승천함(11)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승천했다. 카울리(Cowley)의 말처럼 그는 모든 인류가 빠지는 도랑을 뛰어 넘어 하늘로 올라간 두번째 사람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자.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엘리야는 일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사에게 교훈을 주고 용기를 주며 앞으로 수행할 사역에 대해서 지시하고 일깨워 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는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함이었다. 그는 이제 그가 가게 될 저 세상에 푹 빠진 사람처럼 묵상하거나 기도하고 있지 않았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진 자로서 가르침에 열중하고 있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를 호송할 것들을 보내셨다. 불수레와 불말들(11절). 이는 그를 왕처럼, 승리자처럼, 아니 승리자보다 더 존귀한 자처럼 당당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경에서 천사들은 ‘그룹’과 ‘스랍’으로 불리운다. 여기에서의 것들은 비록 그들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이름들에 합치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랍’이 ‘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고 했다(시 104:4). 둘째, ‘그룹’이(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수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병거’로 불리기도 했다(시 68:17). 수레와 말들이 불처럼 나타났는데 이는 불사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밝혀 주기 위한 것으로 엘리야를 불사르거나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으며 그 장면을 멀리 서서 보는 자들에게 분명하고 찬란하게 그의 승천을 보게 해주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열심으로 불탔었다. 그리고 이제 하늘의 불로 정련되고 승천하게 된 것이다.
(3) 이 불수레와 불말이 엘리사와 엘리야를 갈라 놓았다.
(4) 엘리야는 어디로 옮기워졌는가.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11절). 엘리야는 한때 격정에 못이겨 죽기를 바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엄청난 특전을 베풀어주실 만큼 지극히 자비로우셔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와 에녹의 경우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다.
1) 하나님께서는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곧 죽음에 이르지 않고 승천하게 됨을 가르쳐 주신다.
2) 하나님께서는 복음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난 또 다른 생명과 그것의 불멸성에 대해서, 그리고 엘리야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가 열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보여 주셨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의 한 모형이기도 했다.
3. 엘리사가 슬퍼함(12)
엘리사는 위대한 선지자를 잃게 된 것을 비통해 하였다.
(1) 그는 엘리야의 마지막을 보았다. 이로써 그는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이 있기를 구한 자신의 요구가 허락되었음을 확신했다. 그는 끝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는 주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기로부터 은사가 있기를 바래서였다(행 1:10). 그 장면은 잠깐 동안 보였다. 그리고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시 보이지 아니 하였다.
(2) 그는 자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손실인 이 일을 슬퍼하는 표시로 자신의 옷을 찢었다. 비록 엘리야가 승리자로서 하늘로 갔지만 그를 잃는 것이 세상으로서는 좋은 것이 못되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유용한 자들을 데려가실 때 슬퍼하지도 애통하지도 않을 만큼 눈물이 마른 자들은 필시 마음조차 굳어 있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엘리야가 떠나가는 것이 엘리사가 뛰어나게 되는 길이었으나 그는 엘리야의 떠나감을 슬퍼하였다. 이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언제까지라도 섬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3) 그는 엘리야에게 매우 존경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다. 그 자신으로서는 젊은 날의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이기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하고 백성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수호자를 잃어버린 것이기에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고 했다. 아마도 엘리야는 만일 그들이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모두를 그 수레로써 하늘에 데려가고자 했을 것이다.
Ⅲ. 엘리야를 이은 엘리사 2:13-18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의 승천 이후 곧바로 나오는 내용을 보게 된다.
1. 엘리사의 능력(13-15)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와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은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 언급되어 있다.
(1) 엘리사는 엘리야의 직무를 상징해주는 그의 겉옷을 받았다. 그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 옷을 입었을 것이다(13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는 자기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겨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영감이 임했다는 증거이므로 수천의 은금을 물려받은 것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엘리사는 그 옷을 자신이 입어야 할, 귀중한 의미가 있는 옷으로 여겨 집어들었다. 그 옷으로 인해 기꺼이 부름에 순종하여 엘리야의 종이 되었던 그는 이제 그 옷으로 존귀케 되어 그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2) 그는 요단강을 가르는 엘리야의 능력을 받았다(14절). 그가 그의 아버지(엘리야)와 헤어진 후 선지 학교의 생도들에게 돌아올 때 요단강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 강은 엘리야가 영광으로 나아갈 때 길을 내주기 위해 좌우로 갈라졌었다. 이제 그는 사역을 위해 나아가는 자신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그 강이 또 갈라질지의 여부를 시험할 참이었다. 엘리야의 마지막 이적이 엘리사의 첫번째 이적이 될 것이다. 강을 가르는 데 있어서 그는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엘리야의 겉옷을 사용하였다(8절). 이는 그가 자기 선생의 방법을 그대로 따르고자 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께 구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14절).
그는 “엘리야는 어디 계십니까”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곧 이러한 뜻이었다. “엘리야를 인정하시고 보호하시며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여러 가지로 그를 영화롭게 하시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특별히 그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호와여 나는 엘리야의 영감을 약속받은 자가 아닙니까? 그 약속을 이행하여 주십시요.” 뒤이어 나오는 말은 원문으로 aph-his로서 “그도”라는 뜻인데 우리는 그것을 다음의 절, 즉 ‘저도 물을 치매’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것이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의 응답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계시다. 그것도 가까이에 계시다. 우리는 엘리야를 잃었지만 엘리야의 하나님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 즉 그는 불변하시어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다.” 자기 선임자의 경건하고 충성된 정신과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은 틀림없이 그 선임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은혜를 경험할 것이다. 엘리야의 하나님 역시 엘리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경건한 선지자들의 하나님이셨던 여호와께서는 어저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만일 우리가 앞서간 경건한 자들의 영감, 즉 그들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이 남기고 간 옷이나 거처 또는 저서 등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 그는 선지 생도들에게서 엘리야와 같은 존귀함을 받았다(15절). 일어나는 일을 보려고 요단강 부근까지 따라갔던 여러 선지 생도들은 엘리사가 돌아올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는 확실한 증거로 삼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가 안전하게 물과 불을 지난 것과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축하하고자 왔다.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15절).
그들은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반면에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또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선지 생도들은 마치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하였듯이(수1:17) 기꺼이 자기들의 우두머리이자 아버지로서 엘리사에게 복종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시는 자에 대해서 그가 누구든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2. 선지 생도들의 헛된 수색(16-18)
선지자의 생도들은 불필요하게도 엘리야를 찾고자 했다.
(1) 그들은 엘리야가 떨어져서 어떤 산이나 계곡에 살아 있거나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16절). 아마도 그들 중 몇몇은 엘리사가 선택받은 것에 대한 저항감에서 이것을 주장했을 듯 싶다. “엘리야가 정말로 사라졌는지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2) 그들이 끈질기게 간청하자 결국 엘리사는 허락을 해 주었다(17절). 그들은 엘리사가 더 이상 반대하기가 민망하기까지 주장을 하였다. 엘리사가 허락을 한 것은 그가 자기의 선생을 존경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다시 그 겉옷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3) 그 결과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제의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게끔 만들었다. 수색자들이 헛되이 지쳐서 돌아오자 엘리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18절). 산과 골짜기를 가로질러 찾아 다니는 것이 결코 우리를 엘리야에게 이르게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경건한 신앙과 열심을 본받는 것이 때가 되면 우리를 그에게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Ⅳ. 수질을 좋게 함과 아이들을 저주함 2:19-25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이적들을 행했다. 어떤 이들은 그 이적들이 숫자상으로 정확히 갑절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여리고에 자비를 베푼 이적이고 하나는 벧엘에 재앙을 내린 이적이다.
1. 여리고의 수질을 좋게 함(19-22)
여기에 여리고의 물이 좋은 물로 바뀐 축복이 기록되어져 있다. 여리고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세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 성이 불법으로 세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경건의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엘리사가 이곳에 온 것은 엘리야의 승천을 멀리서 본 자들보다 더 상세히 설명을 해 줌으로써 생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십 인이 엘리야를 수색하는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1) 여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불평거리를 말했다(19절). 그들은 엘리야에게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이는 아마도 엘리야는 엘리사만큼이나 그들과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주변은 좋은 곳으로 멋진 전망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물은 마시지 못하는 것이었고 토양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여리고의 전 지역이 메마른 땅과 나쁜 물은 아니며 단지 어떤 지역만 그랬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2) 그는 곧 그들의 불평거리를 고쳐주었다. 선지자들은 각처에 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정확히 적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메마른 영혼을 풍성한 결실을 맺는 영혼으로 바꾸는 여러모로 애쓰는 자들이었다. 엘리사는 그들의 물을 고쳐 줄 것이다.
1) 그들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그에게로 가져와야 했다(20절). 만일 소금이 물을 좋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적은 양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새 그릇에 담아야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은 도움이 될 것으로 반드시 행해져야 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믿음과 순종은 시험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2) 그는 소금을 물 근원에 던졌다. 그러자 물줄기와 그 물이 닿는 토양이 고쳐졌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은혜의 소금으로 고쳐져야 한다. 이는 거기부터 생명이 나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결케 하라. 그리하면 손도 깨끗해질 것이다.
3)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것을 행하는 체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21절).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로 자비를 베품으로서 그들은 이후에, 꼭 같은 서두로 시작하는 그의 교훈과 책망과 명령을 더욱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4) 그 고침은 단지 그 당시에만 효력을 나타냈던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었다.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22절).
2. 벧엘에서 아이들을 저주함(23-25)
벧엘에 또 다른 선지 학교가 있었다. 엘리사가 여리고에 이어 그곳에 가자 그곳 생도들은 그를 극진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우상 중 하나가 벧엘에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했으며 따라서 그들을 책망하는 자들을 미워하였다. 선지자들이 길을 다닐 때 그들의 별명을 부르며 조롱한다든지 혹은 가능하면 그들을 자기들의 성읍에서 쫓아내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행위였던 것 같다. 만일 엘리사에게 행해진 욕설이 처음 있었던 일이라면 그처럼 심하게 벌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하 36:16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선지자를 능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 중의 하나였다.
(1) 그러면 그 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벧엘의 ‘젊은 아이들’, 즉 길에서 놀고 있던 남녀 아이들이 그를 보러 나와서는 그를 둘러싸고 마치 그가 바보이기라도 한 양 놀려대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23절). 그들이 모욕을 주고자 했던 것은 선지자라고 하는 그의 특성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영예롭게 높이셨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의 대머리를 가리울 만하였고 그러한 조롱을 받지 않도록 할 만한 것이었다. 이 아이들은 배운 대로 말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선지자들에게 더러운 별명을 부르고, 욕설을 내뱉는, 우상을 숭배하는 부모들에게서 그런 것들을 배웠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이 병아리들은 어미 닭은 따라서 울었던 것이다.
(2) 이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능욕한 이스라엘에 마침내 임하게 될 파멸의 전조로서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엘리사는 한동안 인내심을 갖고 그들이 조롱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드디어는 ‘돌이켜 저희를 보았다.’ 이는 혹 근엄하고 엄한 표정을 지으면 그들이 당황해 할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하나님께 행한 그 불경을 벌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주는 즉각 이루어졌다. 즉 두 마리의 암콤이 수풀에서 나와서 그 자리에서 42명의 아이들을 찢어 죽였던 것이다(24절). 선지자는 분명히 정당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신의 감동에 의해서 그것을 행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 아이들의 부모를 벌하고자 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고자 했다. 자녀들에게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은 그들을 잘 교육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을 태만히 했던 자녀들에게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며 막을 수 있었던 불행에 대해서 비탄해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