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성경공부] 하나님의 교훈 διδασκω(1321, 디다스코)

헬라어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다는 헬라어 단어 디다스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디다스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헬라어 단어인 디다스코의 의미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교훈을 받다 διδασκω(1321, 디다스코)

가르치다 teac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Homer 이래)는 ‘가르치다’와 ‘배우다’를 뜻하는 어근 다(스)(δας)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복해서 손을 뻗히다’를 뜻하는 어근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하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호머 시대 이래로 ‘가르치다, 알다, 교육하다, 증명하다,지시하다’를 의미하며, 중간태로는 ‘스스로 배우다, 생각해 내다, 숙달하다’를의미한다. 이 단어는 교사와 생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전형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생도나 제자는 비단 지식, 사상, 사실만이 아니라 예술적 기교와 전문적인 기술도 배우는데 이 때 학습자는 스승과 제자의 반복적인 학습 활동을 거쳐서 이 모든 것들을 체계있게 철저하게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생도의 가능한 한 최고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지식 전수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르침과 학습을 의미한다.

(b) 파피루스(papyrus)와 오스트라카(ostraka)에서 입증된 일반적인 어법에서 디다스케인은 지적이고 권위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가르치다, ~을 알리다’ 등의 의미 외에 디다스코는 ‘논증하다, 입증(증명)하다, 보여 주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공식적인 계약(아나그노시스 테스 호몰로기아스)의 기록에 관하여, 명확한 어떤 것을 ‘양도했다 yielded’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Mitteis-Wilcken, Ⅱ, 2, 96, Col. Ⅱ, 5[A.D. 4세기]). 다른 경우에 이 단어는 ‘타당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라는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c) 헤로도투스(Herodotus)는 합창단 지휘자의 직무를 묘사하는데 디다스코를 사용하였다. 이 경우에 ‘지휘하다’나 ‘연주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의 경연들이 있었던 시기(B.C. 5세기에서 4세기)에 지휘자들은 대개 공연되는 작품들의 작가였기 때문에, 디다스케인은 비극(Aeschylus에 관한 Aristoph. Ra., 1026; 참조: Hdt., Ⅵ, 21)이나 희극(Plat. Prot., 327d)은 물론 주신찬가(dithyramb)의 작곡(HDT., I, 23)을 포함하는 ‘시적인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d)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가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며, 특히 주전 1세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안드로스(Andros)의 이시스 찬가(Isis-hymn)와 키메(Kyme)의 이시스 찬가(Isis-hymn)에서 등장하는데, 이 두 찬가는 여신을 우주와 그 개개 분야에서의 의미있는 질서를 위하여 전능으로 관여하고, 따라서 인간의 문화와 종교적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로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필로(Philo)는 매우 자주 이 단어를 고전 헬라어 어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 모세를 헬라적 의미에서의 교사로, 즉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작품에 나오는 철학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접촉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따라서, 디다스코는 학생의 능력 계발과 지식 및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그의 관심인 ‘교사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들의 행위를 묘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모든 가르침의 목표는 생도의 능력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며, 생도의 의지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는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57회의 경우에 히브리어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 라마드가 지배적이다.

보통 디다스코는 신명기와 역사서들과 시편들(시 18:34은 제외)에서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 디다스코는 욥기의 14회 중에서 욥 21:22에서만, 그리고 잠언의 7회 중에서 잠 5:13과 잠 30:3에만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70인역본에서 디다스코가 신 4:5; 사 40:14; 사 48:17을 제외하면 라마드만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 이것은 디다스코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더 전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70인역본에서 라마드와 마찬가지로 디다스코를 종교적 영역에 한정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이 용어는 무기들의 사용법에 대한 지시나(삼하 22:35 등) 노래를 연습시키는데 대해(신 31:19, 신 31:22 등) 사용되었다. 그러나 디다스코의 특별한 목적은 그것의 선포와 요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시 93:10에서 디다스코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사람들에게 그노시스를 가르치신다고 언급되어 있으며,욥 22:2에서 하나님은 지식을 가르치는 자로 언급되었다.

디다스코는 특별히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신 4:1)와 말(레마타, 신 4:10) 또는 넓게 노모스(1Esr. 9:48)에 대해 사용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끌 때(시 142:10; 참조: 시 50:13)에 명확한 하나님의 뜻의 선언에 대하여 사용된다. 가르침을 베푼 자가 하나님 자신이시든지(신 4:10), 가정의 가장이든지(신 11:19), 혹은 의인이든지(시 51:13) 간에 차이가 없다. 이 용어는 항상 지적인 것은 물론 의지적인 면도 지닌다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70인역본의 디다스코는 항상 단지 사람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아닌 전 인간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이 말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뜻과 길에 대해 사용되는 곳에서 가장 분명하다. 렘 12:16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쳐 바알로 맹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 나라들의 범죄이다. 디다스코의 사용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그들의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시도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과 이 시도가 성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디다스코와 관련된 절대적인 요구 때문에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그 뜻에 복종하고 맞추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그 뜻을 보이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기에 특히 알맞은 것이다. 이 점에서 세속적인 사용과 70인역본의 사용 간의 차이가 생겨난다. 절대적인 요구의 사상은 세속 헬라어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세속 헬라어에서 디다스코의 목적은 재능과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본(구약)에서 그 관심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전 인간과 그의 교육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속의 디다스코의 의미와 구약에서의 의미 사이에 어떤 궁극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르침의 목적이 어디에서나 어떻게든 목표로서 관찰된다는 공통적인 연결점이 존재한다. 구약에서 구원이 올 것이라는 예언적 선포가 결코 디다스코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목적은 언제나 비록 수용되거나 발전되어야 하지만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b) 구약의 후반부와 랍비 유대주의의 토양에서 우리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 단어의 역사에 나타나는 경향을 따르는 고정된 용법을 발견하게 된다. 독립적으로 사용될 때, 디다스코 또는 그에 상응하는 림메드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총체인 율법을 설명함으로 가르치는 방식을 의미하며,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정돈하기 위해 주어진다.

히브리어 단어 성경공부 거룩한 안식일 삽바트

이 용법은 이미 대하 17:7 이하에서 발견된다. 그 구절에서 이 단어는 몇 명의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가르치게 한 여호사밧에 대해 사용된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순회하였다는 것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 기자는 그것이 종교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것은 림메드(가르치는 것)가 그에게 있어서 명백한 용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들에게서 림메드는 때때로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업(trade)을 가르쳐야 하며,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bQid., 30b)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림메드는 이제 토라를 개인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지도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문화된 용어이다. 이제 때때로 토라 등이 목적어로덧붙여질 수 있으나 목적어 없이 사용되는 것도 일반적이며 매우 명확하다. 민 3:1 이하의 랍비들의 해석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역시 모세의 아들들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아론이 그들을 낳았고 모세는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며, 랍비들에게는 한 사람에게 토라를 성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 모두에게 그의 탄생에 못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bSanh., 19b). 율법에 대한 실제의 교육은 해석적인 견해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다 더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림메드는 종종 “학문적인 해결에 도달하다”, “확립된 학문적인 견해를 표명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Sanh., 11, 2 등); 서기관의 권위자가 율법적인 질문에 사려깊은 판단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친다(Ber., 2, 5 이하 등).

그러므로 림메드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의 귀에 명확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율법 교육(디다케)을 의미하는 파생어 탈무드에 의해 예증되고, 마찬가지로 “성경이 가르침을 준다”라는 등의 문구(S. Nu., 70 on 9:13, p.67, 1, Horovitz)와 “그것이 말하는 것 안에 (성경의) 가르침이 있다”라는 문구(Ab., 5, 1; Sota, 5, 4 등)에 의해서도 예증된다. 이것은 형식적인 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제재는 개별적인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디다스코는 신약성경에서 약 95회 나오며, 그 3분의 2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 서신에는 10회만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용어가 소아시아와 헬라의 이방인들의 모임에서보다는 첫 번째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와 원시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의미에 있어서 “가르치다, 교육하다 to teach, to instruct”라는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뉘앙스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뉘앙스는 여러 문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 28:15에서 그 문맥은 종교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며, 70인역본에서의 이 단어의 역사와 일치하여 단순히 지시(derection)가 있었고 그 지시를 준수한다는 것을 언급할 뿐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코의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a)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

① 복음서의 일치된 증거에 의하면 디다스케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면 마 4:23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행하신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그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을 읽게 되며, 그 다음에는 바실레이아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쳤다는 기사만이 나온다. 마 9:35; 마 11:1을 참조하라.

회당(마 9:35; 마 12:9 이하; 마 13:54과 병행구절; 막 1:21; 눅 4:15; 요 18:20 등)이나 T Sukka,4, 5에 언급된 교육 회관이 딸려 있는 특별한 회당이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막 12:35; 눅 21:37; 마 26:55과 병행구절, 그리고 요 7:14 이하; 요 8:20도 참조하라)이 줄곧 가르치시는 장소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회당이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시설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jMeg., 73d, 23). 어쨌든 질서있는 교육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전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이 가르치는 요소라는 것에 확실히 일치한다.

②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방식은 그 시대의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외형에 관하여 말한 것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의 교회의 일부는 이미 그들이 관찰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그 형식에는 관심이 없고 가장 중요한 내용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사렛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눅 4:16 이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성경의 일부분(사 61:1 이하)을 선택하여 읽으신 후 그 시대의 다른 해설자들처럼 앉아서 풀이하셨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유대교와 랍비들의 관습이었다(참조: 눅 5:3; 막 9:35; 마 5:2; SB Ⅱ 150 등).

따라서 단어 없이도 그 내용이 충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눅 4:16 이하에서는 생략되기도 하였지만, 마 13:53 이하와 병행구절에서는 나사렛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간결한 언급에서 순전히 디다스코만이 사용되었다(마 13:54; 막 6:2). 가르치기 위해 앉는 이와 같은 습관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 5:1과 누가 최고인가 하고 다투는 열 두 제자들을 훈계하시는 막 9:35에,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에서의 설교가 시작되는 눅 5:3에 언급된다. 이것이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관계된 유대 전통 역시 림메드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bAZ, 17a).

③ 만약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외적인 방식이 후기 유대교의 골격 내에 존재한다면,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사렛에서(눅 4:16 이하) 그는 이사야의 말씀을 근거 또는 출발점으로 사용하셨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토라의 해석(마 5:21 이하; 마 15:3 이하; 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22:23 이하)을 사용하셨다. 다른 한편 그는 그의 가르침을 율법을 해석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으셨다. 첫째, 그는 율법에 대해 단지 율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신다. 다음으로, 그는 구원을 확보하려고 추구한 생명 없는 율법주의적 결의론과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및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삶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19:16 이하와 병행구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친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그의 왕국, 그리고 그의 뜻 등 당대 유대교가 문제 삼았던 모든 주제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를 모두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사는 인간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였고, 논의되고 있는 주제 속에 온 몸으로 참여하셨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의지에 호소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든지 아니면 그의 뜻을 거부하든지 실제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그의 섭리, 그의 은총 또는 그의 진노에 관하여 단지 이론적으로만 가르침을 베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진노를 보여 준다(예: 눅 15:1 이하). 그는 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선포하고(막 1:15) 회개와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셨다(막 7:15; 마 5:21 이하). 이것이 예수님께서 랍비나 선지자들의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그들과 다른 급진적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성경과 특히 율법(노모스)에서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본다는 사실에서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집단과 공통적인 근거를 발견하며, 그래서 그가 단 한 글자라도 버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마 5:17 이하). 이 구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구성의 본질적 부분이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선지자들은 그 구원의 미래 성취를 지적하는 것이다”(Tholuck). ‘이룬다’는 것은 실행과 말씀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성취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가르침과 실행은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그것은 율법이 ‘예언적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사역이며, 또한 율법이 존속하는 길은 율법이 이 가르침에 순응하여 따르고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길 뿐이다”(R. Banks).

따라서 가르침의 주제에 관한 예수님과 랍비들 사이의 격차는 내용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인격에서, 즉 그의 아들로서의 자기 인식이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 설명의 형식으로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지 간에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이다(마 7:28; 마 13:53과 병행구절 등).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막 1:22).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절대화를 거부했을지라도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디다스코의 독립적 사용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요점이기도 하다. 이 거부는 단순히 이탈이나 탈선에 대한 거부로 본다. 예수님은 그 탈선에 반대하여 그에게서 기인하는 디다스케인에서 림메드의 참된 노선을 되찾으신다. 그는 모순도 이론의 반영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다시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중간적인 권위에도 구속 받지 않고 요구받는 사람의 인식과도 완전히 관계없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 목적지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인간의 교육과 개혁인 이 요구(참조: 마 5:48)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실체가 된다.

랍비들이 율법을 기록된 가르침의 토대와 주제로서 그리고 인간이 애써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로 생각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이것이, 그 전통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의 그의 백성 가운데서 가르치시는 활동을 언급할 때, 초기 기독교가 독립적으로 가르침에 대해 말한 역사 언어학적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계시될 때, 모든 말씀으로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뜻에 직접 직면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독립적으로 가르치시는 가르침인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는데, 림메드와 같은 식으로 독립적으로 사용된 디다스케인이 헬라인들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적 사고 세계 밖에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기록한 누가복음 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디다스케인을 독립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단어와 예수님의 인격과의 관계 때문에 이 단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가정하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지 특별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다.

④ 공관복음서의 새로운 특징은 지적인 면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헬라 저술가들(고전, 고전 이후, 헬레니즘, 그리고 심지어 유대 헬레니즘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어디서든지 보편화 되었으며 랍비 주석에서는 헬레니즘의 분해하는 힘을 검토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어떤 집단들에서는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장은 구약 개념의 보다 참된 성취를 나타낸다.

(b) 요한의 기록에서의 디다스코

① 요한의 기록에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10회(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 요 8:20, 요 8:28; 요 9:34; 요 14:26; 요 18:20), 요한일서에 3회(요일 2:27), 요한계시록에 2회(계 2:14, 계 2:20) 나온다.

이 구절들 중 몇몇은 최소한 간단하게나마 단독으로 다룰 만한 가치가 있다. 즉 보다 더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성령에 의한 가르침에 대해 말한 구절들에 대해서이다. 나머지는 그들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신 특정한 내용에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이미 예수님의 디다스코에 관해 말한 내용의 범주에 들어간다(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0; 요 18:20). 디다스코가 고침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사용된 요 9:34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참으로 그것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예수님의 적대자들에 관하여 사용된다. 구약에서의 림메드/ 디다스케인의 사용을 얼마간 모델과 전제로 취하여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한 요한계시록의 두 구절들(계 2:14, 계2:20)도 예외에 들어간다.

② 요 8:28; 요 14:26; 요일 2:27에서 디다스코의 용법의 특징은 첫 번째로 이 단어가 직접적인 영감이나 계시의 임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요 8:28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그의 진술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14:26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과 약속들에 대한 가망을 제자들에게 제공하신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일 2:27에서 기자는 아무도 그의 독자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받는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름부음(크리스마)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말하며, 그래서 이 구절은 요 14:26과 연결된다.

어쨌든 그것은 다른 세계로부터의 디다케(1322: 가르침)의 부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헛되이 공관복음서 저자들에게서 찾는 디다스코의 용법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법은 복음서의 다른 곳의 용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헬라적 용법인가 아니면 헬라적 개념에서 기원한 용법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상 밖으로부터 빌렸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 병행절은 제시되지 않았다.

헬라어 단어 성경공부 엑클레시아 교회

요 8:28의 문맥에는 매우 두드러진 권위적인 요소가 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한 대로 가르친 사람이 가르침 받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주장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림메드를 지적한다. 그러므로 요 8:28의 디다스코를 림메드나 공관복음에 사용된 디다스코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유대인들의 귀에 디다스케인이 다른 사람의 뜻이 어떤 사람에 의해 성공적이고 완전하게 구현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면, 디다스케인은 다른 곳에서 요한이 진술한 문구, 호 펨프사스 메 파테르(나를 보내신 자 아버지)와 같은 사상,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뜻의 일치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관여에 대해 펨페인보다 오히려 디다스케인이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이 언급이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일 2:27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또는 전체주의적 주장을 제기하는, 근본적으로 격퇴되어야만 하는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단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그러할 것이다. 디다스코가 선택된 이유들 중 하나는 분명한 목표들이 간과될 수 없는 것과 전 인간의 헌신을 요구하는 이 양 측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기한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는 안전 장치가 된다.

이것을 이들 구절들에서 뿐만 아니라 디다스코가 나타나는 요한의 기록의 모든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렇지만 요한의 기록에서(계 2:14; 계 2:20 제외) 그 단어가 계속적으로 ‘계시하다’ reveal라는 의미에 접근해 있다면 이것은 어떤 특별한 용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디다스코의 주제(요 9:34도 포함하여)가 항상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의 용법과 요한의 기록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들에서,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서 아무 두드러진 의미를 지니지 못한 말조차도 예수님께서 중심에 위치하심으로 인해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받는지를 보여준다.

계 2:14; 계 2:20에서 두 번 나오는 디다스코는 각각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에서 벌어진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눅 11:1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소서”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공관복음의 용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여기서 디다스코도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무조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상을 표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 장면은 그 장면이 첫번째로 지닌 것처럼 보였던 삽화적인 성격을 잃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이 익명의 제자들의 요청은 마 16:13 이하와 병행구절; 요 6:60 이하의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에 대한 고백과 나란히 교회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c)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제시된 자료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림메드의 의미를 따라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두 번째는 예수님에 대하여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세 번째는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들이다. 특히 그 단어가 주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세 그룹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을 가능성은 없다.

① 이미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제자들은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다(막 6:30).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요구를 선포하는 것을 자신들의 일로 삼았다. 마 28:19; 마 28:20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직무를 계속하는 것을 그의 백성의 필생의 사업으로 만드셨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가르침은 세례(침례)를 주거나 제자를 삼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며, 그 가르침의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서, 예수님에 관한 선포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디다케(가르침)이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보면 사도들은 부활을 선포하면서(행 4:2),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행 4:18). 만약 여기에 구약성경의 해석이 포함된다면, 이것은 회개에의 부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외적인 형식에서는 그들도 유대 관습을 따른다(참조: 행 5:25). 주석과 권면은 가르침의 근간이 되며, 심지어 때로 율법에 있는 교훈의 요점에 국한한다(롬 2:21; 행 15:1).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작은 예수님 안에서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행해져야 한다(히 5:12).

② 따라서 기독교 가르침의 일차적인 목적은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가르침은 “예수에 관한 것을 … 가르침”(행 18:25),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침”(행 28:31)이다. 여기에 가르침의 내용의 한계가 있다. 행 18:25에서 디다스케인은 회당에서 행해지는데 회당은 당연히 그 교수법을 결정한다(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가르침). 행 28:31에서 디다스케인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와 함께 언급되는데, 디다스케인은 바울의 로마에서의 선교에 대해 포괄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즉 그 선교의 두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그 어구와 함께 언급된다.

그들은 사실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성경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식으로 전한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것을 모세 및 율법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라고 보았다(행 21:21; 행 21:28). 바울이 행 18:11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도 일반적인 구원 메시지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구원 메시지라고 하는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참조: K. H. Rengstorf).

③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디다스코를 겨우 5회 사용하였는데(롬 2:21; 롬 12:7; 고전 4:17; 고전 11:14; 갈 1:12), 이 사실은, 바울이 회심 이후에 이 단어에 대해서 갖게 된 연상의 비중을 고려해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심 이전의 그의 삶 전체는, 그가 “가르침을 받은” 파라도세이스 파트리카이(장로들의 유전, 갈 1:14)의 지배를 받았다. 롬 2:21에서 그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유대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디다스코를 전적으로 전통적인 히브리어 림마드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롬 12:7에는 교회 안에서의 디다스칼로스(교사)의 직책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해설해주는 것이다(고전 4:17,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사”-이것은 아마도 그의 신앙 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를 사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그것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 1:12에서 디다스코는 ‘전통을 전수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고전 11:14에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어법은 주목할만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그는 본성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아마도 스토아 철학의 배경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16, 10).

④ 살후 2:15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구전 전승으로 본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르침을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듣다”라는 뜻을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전승된 가르침을 받아서 지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랍비들의 교수 방법을 상기시킨다. 디다스코는 또한 엡 4:21에서 수동태로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엔 아우토 에디다크데테(“너희가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그 앞에 나오는 만다네인 크리스톤(그리스도를 배우다)이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의 회심을 언급한다.

골 1:28과 골 3:16에서 사용된 디다스코의 의미를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는 아마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권면일 것같다. 이 두 성구에서 디다스코를 한정하고 있는 엔 파세 소피아(모든 지혜 안에서)라는 구절은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가르침의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⑤ 목회 서신들에는, 가르치는 것이 디모데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언급되어 있다(딤전 4:11; 딤전 6:2). 딤후 2:2에서 가르치는 것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맡는 과업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편 딤전 2:12은 여자가 가르치는 일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 모든 구절에서 가르침 받은 것은 “선한” 또는 “건전한” 교리(디다스칼리아)로 상정되어 전승되어 보존된다(즉 가르침을 받는다). 가르치는 일이 이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고, 골 1:28에 기록된 바와 같이 더 이상 모든 기독교인에게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딛 1:11의 디다스코는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유대교적 신화와 사람들의 계명을 가르치는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 피스토스 호 로고스(“그 말은 미쁘다”)라는 성구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참조: 딤전 1:15; 딤전 3:1; 딤전 4:9; 딤후 2:11; 딛 3:8), “가르치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전승을 전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단어의 강조점은 그 전승을 전수한다는 데에 있다.

⑥ 히브리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목회 서신의 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히 5:12에서 기자는, 비록 독자들이 이미 전부터 교사들일지라도,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즉, 히 6:1 이하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들)를 새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 독자들을 책망한다. 히 8:11에서 이 단어는 렘 31:31 이하에서 인용한 문장 속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것은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다-이 가르침의 주제인 듯하다.(참조: K. Wegenast; K. H. Rengst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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