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그 구조물, 기구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의식에 대해서 놀랄 만큼 상세한 사항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상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는 데에 성경의 2장 분량을 소비한 것에 비해 성막에 10장이 소요된 것은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영적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성막의 구조와 모형을 한낱 지난날의 의식, 곧 사라진 지 오래 된, 이제는 무가치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복음의 원초적 의미를 연구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을 순서별로 연구하며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막의 어의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막을 뜻하는 어의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성막을 뜻하는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였는데 구약의 어법과 신약의 어법은 약간 차이점이 있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1) <오헬>
성막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데 이것은 ‘천막’을 뜻하는 말로서 14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 이 말이 출 26:9에서는 성막의 전면에 있는 휘장을 의미하였고 27:21에서는 회중에 모이는 성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관사와 함께 쓰여서 성막을 나타내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덮는 것'(Covering)을 뜻한다.
2) <미쉬칸>
이 말은 ‘거주지’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장로로서 성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거하다'(to dwell)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미쉬칸>은 출 25:9을 비롯하여 약 100회 정도 사용되는데 장막을 표현하는 말로서는 <오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출 26:7에서 볼 수 있는데 원문은 <레오헬 알 하미쉬칸>으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Covering upon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 (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 성막을 덮는 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미쉬칸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 전체를 의미 할 때가 많고 오헬은 성막의 지붕 덮개를 나타내는 말로서 성막 자체를 의미하는데 쓰여졌다.
3) 기타 용어들
<쏙>은 시 76:2에 <쇽>은 암 2:6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덮여 있는 밀실을 뜻한다. 또한 <씰쿠트>와 <셐카>도 암 5: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덮여 있는 은밀한 처소로서의 장막을 의미한다.
4) 신약의 용어들
신약에서 성막은 처소(dwelling place)란 의미의 <스케네>, <스케오스>, <스케노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의 <미쉬칸>과 <오헬>을 번역한 것들이다.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구분 없이 <스케네> 또는 <스케노마>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성막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의미 또는 실체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곧 성막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막의 건립상, 구조상으로 그 적용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성막의 대표적 용어를 택하여 성막의 구조와 단어의 의미에 구애 됨이 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성막의 구조
성막은 그 구조가 사람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서부터 건조 방법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성막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두신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는 실례이며,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셋째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성막을 건조한 사람들
성막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전에 그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구조와 재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만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출 36장에 보면 성막을 건조할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
출 35장에 성막을 건조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는 ‘브살렐’로 그 이름의 뜻은 ‘주의 그늘에서’이다. 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또 다른 사람은 ‘오홀리압'(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장막)으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참조 출 35:34).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일을 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재능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 그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얻게 된 능력들인데 성령께서는 지혜와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귀한 성품과 자격을 구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과 도구로서 그의 뜻을 좇아 거룩한 성막의 건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②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출 36:2을 보면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막 건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외의 많은 기능공들로서 출 35:35, 36:4, 8 등에서 그들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수 놓는 일과 짜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성막 건조에 참여하여 크게 협조하고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이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과 모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나 그들은 자원하여 협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감독하며 지도한 자들이나 그들은 그 감독과 지도를 받아서 일한 자들로서 각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대로 헌신 봉사한 기능공들이었다(참조 출 36:8-39:43).
2) 성막의 모형
오늘날 성막의 영적인 중요성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모형론(Typology)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성막은 이미 신약의 모든 복음의 진수를 간직한 신약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에 대한 설명과 그 영적 의미까지도 다루고자 한다.
① 바깥마당
성막 전체의 모형에 대한 기록은 출 26:1-27:2에 나오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m, 너비 22.5m, 높이가 2.25m의 직사각형인데 이동할 수 있는 조립식 구조로 되어 있다. 성막의 울타리 동쪽 끝에는 성막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들어가기 전 외부의 마당을 바깥 마당이라 한다.
이 넓은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도 부르는데 매우 넓은 공간이다. 즉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전 지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 된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성막에 접근할 수 있으나 성막 안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죄인들을 지칭하는데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여러 가지 불의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나타내며 그들이 있는 이 바깥 마당은 죄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 곧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 무리들은 이 바깥 마당에서 성막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② 문
성막에는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에는 기둥과 그 기둥의 밑받침이 있으며 4색실로 곧 청색, 자색, 홍색, 금색과 가는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이 문의 폭은 약 10m가량 되는데 이는 너무 넓은 문이다. 이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는 친히 자신을 양이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으로만이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인 것이다(참조, 요 10:1) 그러므로 이 문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문의 휘장이 4색으로 된 것은 우리 구조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4복음이 표현하는 왕과 종, 인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 있지는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곧 닫히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혔듯이, 이 문도 닫히게 된다. 이때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된다.
③ 담과 안마당
성막은 네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과 북편의 담이 45m이면, 각각 20개의 조각목을 세우고 그 밑에 놋받침을 받치고 그 기둥에 머리를 씌운 후 은으로 만든 갈고리와 가름대로 이어서 세마포로 드리워서 만들었다. 그 바깥 휘장의 높이는 2.5m인데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짠 휘장으로 높이가 2.5m가량 되었다. 서편 담은 길이가 25m이며 기둥이 10개 있었는데 서편과 동편의 길이는 같으나 동편 담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 담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였다.
또한 이 담은 성도의 육신을 가리키는데(참조, 고후 5:1; 벧전 1:13-14) 성도의 육신인 이 장막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다. 이 담 안의 마당은 ‘안마당’으로 불리는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즉 이 안마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 교제를 하게 되었다(참조, 엡 2:20-22).
④ 성소와 지성소의 덮는 막
이 덮는 막은 안마당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같이 덮어 주는 막으로서 4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 덮막은 가는 베실로 짠 고운 막으로 성막 내부에서 보이게 되는데 금색, 자색, 청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 있다. 또한 이 천에는 성막으로 들어와 예배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습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두 번째 막은 염소 털로 만든 것으로 그 크기는 44X30 규빗의 크기로 첫 번째 덮막보다 조금 더 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 위의 천막’으로 불리는데 아래 있는 앙장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 붉게 염색된 수양의 가죽이 덮여 있는데 이 가죽은 제사의 제물로 쓰인 양의 가죽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붉게 염색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를 뜻한다. 맨 윗덮개는 수달의 가죽으로 외부 표면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죽은 햇빛의 자극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는 초라하시고 볼품이 없으셨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완전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시고 이 세상 풍조나 죄악에 물들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⑤ 성소
이상에서 말한 4중 덮개 밑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게 되는데 성소에는 3개의 성막 기구가 있다. 곧 떡상과 향단과 등대이다. 제사장들은 이 성소에서 매일 등대의 불을 점검하고, 향단에 향불을 피우며, 떡상의 떡을 1주일에 한 번씩, 특별히 안식일에 12덩어리의 새로운 떡으로 갈아놓고 6가지 제사를 드렸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⑥ 지성소
성소를 지나서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에는 법궤가 속죄소 또는 시은소가 있고 그 위에는 두 그룹이 있다. 이 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참조, 출 30:10; 레 16:18; 23:27). 이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 있는데 이는 함부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천국을 뜻하며 이 곳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의 죄를 위해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참조, 히 9:25).
⑦ 안 휘장
이 안 휘장은 앞에서 말한 성막의 첫 덮개와 같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그룹의 모습을 수놓아 만들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두 곳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 휘장은 막힌 담으로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이후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고, 노아의 홍수 때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하나님이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식구 사이를 구분하셨다. 이제 이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막으셔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것이다.
휘장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위에서 말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는 둘 사이의 교제의 단절을 뜻한다. 휘장 자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휘장이 수놓아진 천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참조, 마 27:5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업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악의 담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잃었던 화목, 즉 교제의 상실을 회복하셨다. 제2의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3)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는 8개의 기구들이 있게 되는데 이것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곧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인데 외향적인 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내향적인 면은 그 기구들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통한 인간의 구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면에 근거하여 성막의 기구들과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다.
① 놋제단(번제단)
놋단을 히브리어로 <미즈베하>라 하는데 ‘제물’ 또는 ‘희생’의 뜻이 있으며 ‘죽인다, 희생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져 그 위에 놋으로 싼 것으로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5규빗(2.5m)이다. 단 위 네 모퉁이에는 각각 뿔이 나와 있으며 단 네 면 가운데는 제물을 받치는 그물망이 있다. 그리고 단 높이 중앙에 고리 넷을 이편과 저편에 둘씩 달아서 금을 입힌 막대기로 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단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은 번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번제’라는 말은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열납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같은 희생 제단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생겼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서 시작되어 아벨의 제사에서 짐승이 드려졌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 제사의 단을 쌓았었다. 또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수풀 사이에 걸려 있는 수양을 드렸고 그 외에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 희생 제사를 짐승으로 드려왔다. 이 번제단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형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물이 죄를 대신 쓰고서 그 형벌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놋제단에 제물을 가져 첫째는 먼저 죄를 자각하고 둘째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서, 셋째는 그 위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넷째는 죽여서 단위에 얹고 다섯째는 피를 제사장이 단 사면에 바르고 여섯째는 그 제물을 태우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단의 네 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머리, 양손, 다리에서 흘리신 피로 십자가의 네 귀퉁이에 뿌리셨으며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로 나아가심을 뜻한다.
② 물두멍
물두멍은 번제단 다음에 위치한 것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두 번째로 놓여 있다. 이것은 전체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물을 가득 담아서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제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허물과 범죄, 실수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두멍의 물은 거울로도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서 더러운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이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양심으로 어긋난 허물과 범죄를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이 찌른 창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후에 그 물로서 정결케 씻어 주심을 뜻하는 것으로 곧 성막의 물두멍의 본래 의미이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번제단의 의미를 가진다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곧 물두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순서적으로 먼저는 대속의 피, 그리고 정결케 하는 물의 순서가 된다. 성경에서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에베소서 1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다.
③ 떡상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④ 등대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⑤ 향단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⑥ 법궤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⑦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⑧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그 의상
이제까지는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즉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그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과 그의 의상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대제사장
광야에서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는데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론이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단번에 완전하게 제사장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참조, 히 7:11).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제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옷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짜여졌다(참조, 출 28:5, 6, 15, 33).
이때의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나타내며 자색은 존귀함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진홍색은 피의 색깔로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심을 상징한다.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제사장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의 옷은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데 그 옷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의 의상에서 다루고자 한다.
2) 대제사장의 의상
① 속옷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 만든 옷이다. 이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한 번 입으면 벗겨지거나 자리가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띠는 속옷을 입게 되면 꼭 매어야 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속옷을 입은 후에야 겉옷을 입어야 했다. 이 겉옷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입게 되어 있었다. 이 속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칭의를 얻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참조, 렘 23:6, 16). 여기에 매는 띠는 진리의 띠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나타낸다.
② 겉옷
에봇 받침은 겉옷이다. 이 겉옷은 푸른색의 옷인데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옷 가장자리를 따라서 석류 무늬 다음에 금방울을 계속 돌아가며 달게 되어 있다. 이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표현하며 존귀와 영화를 나타낸다. 옷단의 방울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석류는 그 말씀대로 충실한 결실을 보여 준다. 이 겉옷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의와 영광의 옷으로(참조, 사 61:10),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세상을 심판하며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5:10; 20:4, 6).
③ 에봇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것으로 모양이 긴 앞치마처럼 생겼는데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어있다. 또한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어서 대제사장의 허리에 단단히 맬 수가 있었다. 그 띠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잘 조화 있게 짠 아름다운 띠이다. 이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지상의 교회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어깨는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곧 우리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친히 그 어깨에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메고 오시는 것이다(눅 15:5).
④ 흉패
에봇 위에는 12보석으로 장식된 흉패가 있는데 대제사장의 가슴 부분에 위치함으로 흉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에봇이 교회를 의미한다면 흉패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는 지체이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다. 이 흉패는 각 줄에 3개씩 도합 12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석들은 그림에서와 같다. 이 흉패는 금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는 호마노로 만든 두 견대에 고정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대제사장의 허리띠에 매게 된다. 어깨의 두 호마노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7).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예고된 약속을 따라 나시고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12사도를 택하여 믿음으로 접 붙게 하심을 나타낸다. 즉 12보석은 예수님의 12사도를 나타내며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 견대의 고리에 12보석이 매달려 있듯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12사도가 계승함을 나타낸다.
⑤ 우림과 둠밈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있는 흉패는 주머니처럼 위에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마치 지갑처럼 생긴 것이다. 이 속에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는데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며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선악과 길흉의 원인과 결과를 알기 원할 때 이 두 패를 내어 봄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그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심을 나타낸다. 또 이것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우림과 둠밈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⑥ 성관
성관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 직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며(참조, 슥 3:1),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서 그 관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9절에 의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수치와 고난의 가시관을 쓰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⑦ 금패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에 붙이는 패로서 여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이 쓰여 있으며 청색 끈에 매어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며 둘째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자임을 명심하여야 함을 주지시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참조, 대상 16:22).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하나님이 쓰는 자이며 하나님이 친히 처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께 성결 된 대제사장이시며 만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분이셨다.
4. 성막의 역사적 변천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막의 역사 곧 성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이 있었고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와 그 의미 못지않게 성막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이는 최초의 성막으로 출 40:2, 17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제2년 1월 1일에 시내 산 밑에서 성막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오랜 시일을 성막 건조에 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초기 장막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과 함께 수 차례 이동되었다. 성막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성막을 분해해서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진행케 했다. 레위인들은 각각 그들이 맡을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가 그들이 책임지는 성막의 부품들을 메고 출발했다(참조, 민 3:31-32; 4:15). 이때까지의 성막의 구조나 모형은 앞서 다른 성막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가나안 정착 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2)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막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그들도 그곳에서 먼저 성막을 안치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고, 묘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근처 길갈이라는 곳을 임시 장소로서 선정하였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이곳에 성막을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막의 기구와 구조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 성막이 분해되고 여러 곳에 제단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참조, 삿 17:12). 벧엘에는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고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참조, 삿 20:27).
3) 실로의 멸망
언제 어떻게 실로에 성막이 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에 성막과 언약궤와 제사장직과 제사와 분향이 있었다. 사무엘상은 실로의 성막과 당시의 제사장 엘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긴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해서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 들어갔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참조, 렘 7:12). 그런데 성막 자체까지 다 약탈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에 ‘놉’에서 다시 언약궤와 성막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패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신본주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 대제사장직의 성격 상실을 들 수 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대제사장과 사사로서의 역할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져서 벧세메스에 잠깐 머물렀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년간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벧엘, 미스바, 라마, 길갈 등을 순회하며 예배의식과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는 성막이 비지역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다윗 왕 때에는 완연한 현상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역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5) 놉과 기브온의 성막
놉은 여부스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으로서 시온보다 90m나 높은 산시였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거할 수 있었고, 에봇과 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울 왕이 모든 제사장을 죽일 때 아비아달 하나만이 다윗에게 피하여 있었다. 그 후에 사울 왕은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것 같다. 이 기브온은 여부스에서 10km, 벧엘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6) 기브온과 예루살렘의 성막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군사 삼만여 명과 함께 바알레 유다 즉 기럇여아림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다윗 성에 친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법궤와 제단이 성전의 수축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의 성막이 주로 제사에 이용되었으나 성전 건축과 함께 흩어져 있던 성막의 기구들이 모아져 한곳에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200년 뒤부터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성전이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세의 성막 기구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역대하 4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이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원 성막의 기구들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재난과 환난으로 많은 부분이 분실되었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 성전에 법궤를 안치할 때는 두 돌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참조, 왕상 8:9; 대하 5:2-10).
7) 성전의 수난과 변천
성막이 성전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고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도 수차례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성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① 솔로몬 성전
다윗의 뜻을 이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제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B.C. 967). 이 성전의 전장은 60규빗(30m), 너비는 20규빗(10m), 높이가 30규빗(15m)으로 성전의 기구들은 성막에서 옮겨온 법궤와 함께 새로이 만들어 두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로부터 시드기야 때까지 존속하다가 B.C. 586년에 갈대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함께 소화되고 그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380년 동안 성전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참조, 렘 25:3).
②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그는 일찍이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회유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세스바살의 지휘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참조, 스 5:16). 이것이 스룹바벨과 그의 건축자들에 의하여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제6년 B.C. 515년에 끝내게 되었다. 이 성전에서 일한 제사장의 반열이 정해지고 유월절이 지켜지게 됨으로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이 성전은 구약 중간사의 기간을 걸치면서 수 차례의 파괴와 복구의 수난을 걸치다가 B.C. 20년에 헤롯의 재건 공사로 이 성전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③ 헤롯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헤롯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크기가 포로시대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이나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서(참조, 대하 3:4)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실제적 이유는 그 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성전은 4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나(참조, 요 2:20)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주님의 말씀(참조, 눅 21:20-21)을 기억한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서 시내산에서 시작한 성막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결국 성막의 완전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성막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도, 대제사장도 사라졌다. 다만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복귀시키려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 속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그렇다면 성막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이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멸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이 주는 의미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으로 그 모든 성막에서의 의식들이 마지막 심판날까지 지속되게 하심으로 더 이상의 동일한 의식이 필요 없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 성막이 각자의 몸에 해당되어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참조, 고전 3:16).
돌에 새겨 있던 돌비가 이제는 우리 맘에 새겨진 언약으로 바뀌었고(참조, 렘 31:31-33)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서 뿌리던 속죄의 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뿌려졌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제 제물은 우리 자신의 몸으로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참조, 롬 12:1). 그러므로 성막이 가졌던 모든 영적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나 그 실제적인 것들은 완전한 수행으로 재차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제는 사라진 구약의 성전과 현대의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주님이 명하신 성례전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구약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 된 지체가 서로 교제하는 표식으로서 공동체의 개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