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렀는데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빌립과 나다나엘이었다.
Ⅴ. 예수의 등장 1:29-36
이 단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거로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증거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가서 거기에서 사십일 간 머무셨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계신 동안 계속해서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었는데 이제는 드디어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를 보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거는 두 가지로서 결국은 하나의 내용이다.
1. 요한의 증거의 네 가지 요점(29-34)
(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위대한 희생임을 가리킨다. 이 희생에 의해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지며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희생물 중에서 요한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려지는 ‘날마다의 희생 제물’에 특별히 관련하여 드려지는 어린양에 비유하고 있다. 매일 드리는 제사의 희생 제물은 항상 어린 양이었다. 또한 이 말은 유월절 어린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월절 양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천사의 칼날 아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이시다. 그러므로 죄를 대속하시게 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불리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제하여 버리시는 분이시다. 세례 요한은 죄의 용서를 받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데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죄를 제하여 버리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의 공로에 의해 죄의 죄책을 짊어지시기 위해오셨다. 그의 은혜의 성령에 의해 죄의 권세를 제하여 버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죄를 제거하고 계시다. 이는 지속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항상 제거하고 계시는, 짊어지고 계시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제거하신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언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용서를 빌고 계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셨다(요일 2:2).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신다는 말을 곧 나의 죄, 한 개인의 죄도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자기가 친히 짊어지시므로, 즉 친히 담당하시므로 세상 죄를 제거하신다. 그리스도는 세상 회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그 죄를 들어 올려 가지고 가신다. 즉 이스라엘의 죄를 그 머리에 이고 갔던 희생 염소와 같이(레 16:21),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인들을 살려 두시면서 죄를 없애는 방법을 찾아내셨던 것이다.
3) 우리의 의무는 세상 죄를 제하여 버리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다. 죄를 제거하고 계시는(짊어지고 계시는) 그를 보라. 그리하여 죄를 미워하도록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하자.
(2) 이 사람이 그 사람(30,31절) :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절). 바로 이 점에서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나다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다른 선지자들이 앞으로 오실 자에 대하여 말했던 반면 요한은 이미 오신 그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믿음과 장차의 소망 사이에는 그러한 차이점이 있다. 요한은 자신이 그에 대하여 전에 말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람이 내가 말했던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화려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으셨으나 요한은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개의치 않는다. “이 사람이 내가 말했던 그 사람, 곧, 나보다 앞선 그 분이시다.”
이렇듯 요한이 그 인물을 확실하게 보여 주지 않았던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 지금까지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해 왔던 그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한은 이 예수와의 어떠한 사전 관계나 모의도 거부하고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절). 두 사람은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세례받으러 나오시는 그 분을 보기 전 까지 요한은 예수께 대하여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였다.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요, 믿은 자는 복이 있다. 요한의 사역과 세례의 큰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있다. “내가 와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었다.”
요한은 예수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그 분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본질과 의도를 완벽하게 알고 있지 못한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확신이 있는 까닭에 자기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내가 와서…주는 것은…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기 백성들에게 조금씩 점차적으로 나타내신다. 처음에 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거의 모르고 그가 나타내져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3) 성령이 그 위에 머문 그 사람 : 이 사람이 바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위에 머물렀던’ 그 사람이었다(32절).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증언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요한은 여기에서 세례시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 즉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친히 증거하셨던 일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32-34절).
1) 세례 요한이 그 현상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그는 증언하는 엄숙함으로 그 일을 진술했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성령을 볼 수 없었으나 성령의 표징이요 표상인 비둘기를 보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은혜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은 미래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유와 자유와 부드러움의 상징인 비둘기와 같이 내려 오셨다. 일찍이 비둘기는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물어 왔었다(창 8:11). 그리스도 위에 내려 오신 성령은 그의 위에 머무르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떠나신 적이 결코 없으시며 항상 그 의에 머물러 계셨던 것이다.
2) 세례 요한이 그 일을 기대하고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요한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된 징표였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33절). 요한이 어떤 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는지 살펴 보라. 요한은 하나님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자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 길을 갔다. 즉 그는 보냄이 없이 일하지는 않았다. 요한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그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그 소명이 분명할 때는 성공이 항상 있는게 아닐지라도 든든한 위로를 받는 법이다.
요한은 주저함이 없이 자기의 사명의 길을 갔다. 왜냐하면 그가 물로 세례를 주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한 사람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역자를 거느리시는 주께서 사역자들의 사역에 생명과 영혼 그리고 힘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는 큰 위로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꾼들이 귀에 대고 얘기한 것을 마음에다 얘기하시며 일군들이 예언한 마른 뼈 위에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표징을 하나 주셨다. “누구 위에든지 성령이 내리는 것을 네가 보거든 그가 곧 그인줄 알라.” 이러한 표식은 어떠한 실수도 방지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그 증거에 담대함을 더해 주었다. 그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보증을 그가 가졌을 때 요한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4)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언의 결론이다. 이 결론 안에서 모든 각각의 내용들이 수렵되고 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34절). 주장된 진리는 이것이니 곧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신조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마 16:16). 그리고 여기에서 그 사실이 처음 등장한다. ‘내가 보고 증거하였다’는 요한의 증언을 보도록 하자. 요한은 그가 본 것을 증거하고자 했으며 그가 증거한 것은 곧 그가 본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목격자들이었다.
2. 다음날 한 요한의 증거(35,36)
다음날 요한은 다니시는 예수를 보고 멈춰 섰다. 특별히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과 친밀한 대화를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1) 요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도자들은 공적인 설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며 그의 일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예수를 옆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그리스도께 대하여 부지런히 그리고 습관적으로 묵상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요한은 전날 그리스도께 대하여 했던 동일한 증언을 되풀이 하고 있다. 훌륭한 일군들이라면 세상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특별히 강조를 두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3)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특히 그와 함께 섰는 자기의 두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들 두 사람을 기꺼이 그리스도에게 보내려고 했다. 요한은 마치 고등학교 선생님이 기쁘게 제자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듯이 그리스도에게 제자들을 보내는 것을 기뻐하였던 것이다. 요한이 제자들을 모았던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였다. 겸손하고 관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합당한 칭찬을 다른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자신들이 초라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그 칭찬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Ⅵ.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 1:37-42
여기에서 우리는 두 제자가 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제 삼자를 데리고 오는데 이들 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이다
1. 요한의 두 제자(37-39)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던 두 사람은 안드레와 그와 함께 있었던 다른 한 사람이었다(37절). 또한 이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1) 여기 두 사람은 즉시 그리스도에게 가고 있다. 그 두 사람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제거해 버리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요한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두 사람은 예수를 좇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그 두 사람을 친절히 맞아 주셨다(38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사람이 뒤좇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곧 뒤돌아서 좇아 오는 두 사람을 바라 보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자기를 좇는 처음 동기를 미리부터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자고 간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말씀하셨다. 한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교제가 오고 갈 때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38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두 사람을 친구로 삼으시겠다는 친절한 초대였던 것이다.
“이리 오라. 너희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 영혼의 문제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이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허물이 없어야 한다. 그 두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던진 질문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좇고자 할 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을 꿈꾸고 바라느냐? 우리는 선생님을 구하고 있는가? 지배자를 구하고 있는가, 화목자를 구하고 있는가? 혹 그리스도를 좇으므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영원한 생명을 구하고 있는가?
(3) 그 두 사람은 공손하게 그리스도의 거처를 묻고 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들은 그리스도를 랍비라고 부름으로써 자기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이유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었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랍비란 선생님 곧 학교 선생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의 학생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왔다. 이와 같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온 모든 자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 어디에 거하시느냐는 그들의 질문 속에는 그리스도를 좀더 친숙히 알고 싶다는 내심이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가리켜 주시면 적당한 시기에 그분을 찾아 가고자 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의 바르며 훌륭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두 사람은 지금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하는 것을 부업 정도로 여긴 것이 아니라 생업으로, 중요한 업무로 삼을 결심을 하였다. 그리스도와 조금이라도 교제를 가져 온 사람은 그와 좀더 교제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 사로 잡혀 교제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치에 다가 앉아 자리를 잡고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따금씩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그와 함께 거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거처로 그 두 사람을 정중하게 초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보라(39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자신의 거처로 오라고 초대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좇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둠으로써 추종자들 속에서 자기들의 이익을 유지하지만, 자신을 뒤좇아 오는 두 사람의 존경과 애정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방법은 그들에게 와 보라는 권유였다. 그리스도는 지체 없이 즉시 그 두 사람을 초대하셨다. 지금보다 더 적절한 시간이 있을 수 없다. 쇠는 달구어 졌을 때 쳐야 하듯이 사람은 그 마음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5) 그리스도의 초대에 이 두 사람은 기꺼이,(의심할 바 없이) 감사히 응했다.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39절). 그 두 사람은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갔다. 은혜로운 영혼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에 기꺼이 응하게 된다. 그 장소가 어디건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라면 좋은 것이다. 그 두 사람은 그 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였다. 그야말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마 17:4)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환영하셨다. 그때가 제 십시 쯤 되었을 때였다.
2. 안드레가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40-42)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안드레는 가장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게 되는,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베드로를 이끄는 도구가 되는 영예를 누리었다.
(1)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알린 내용.
1) 우선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찾는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제를 찾았다는 말 속에는 그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말이 아니라 일부러 먼저 시몬을 찾았다. 시몬은 단지 세례 요한의 집회에 참석하려고 왔을 뿐이었으나 기대 밖으로 예수를 만난다.
2) 안드레는 시몬에게 자기들이 만났던 사람에 대하여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안드레는 “내가 만났다”고 말하지 않고 겸손하게 “우리가 만났다”고 말한다. 안드레는 다른 사람과 함께 명예를 나누기를 즐거워하였다. 안드레는 몹시 기뻐서 “우리가 만났다”고 얘기하고 있다. 안드레는 그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드레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지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여지껏 들어왔던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안드레는 자기의 선생이 말했던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께로, 즉 그 근본되시는 이에게로 데리고 갔다. 이것은 바로 자기 형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한 본보기였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행복을 찾아주는 일에 특별한 관심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친척 관계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는 의무이며 동시에 기회이기 때문이다. 안드레가 시몬을 찾아 메시야를 증거하고 자기의 형제를 그리스도에게까지 인도해 온 일은 그리스도와 하루 동안 대화하고 난 결과였다.
이로써 안드레가 예수와 함께 지내고 나서 완전히 그리스도께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드레는 그리스도야말로 만인을 위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맛보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형제들이 역시 그 사실을 맛볼 때까지는 지체할 수 없었다. 참된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라도 혼자 취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대접을 보자(42절).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42절). 혹자는 이 이름의 의미에 주목한다. 시몬은 순종이란 뜻이며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이다. 순종하는 비둘기 같은 정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2)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총애를 나타낸다. 이렇게 하시므로써 그리스도는 시몬을 자기의 일원으로 택하셨다. 메시야께서 시몬에게 주신 그 이름은 그리스도께 대한 시몬의 충성을 가리킨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이는 돌이라는 히브리 말이다).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성질이 급했고 난폭했으며 단호했다.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기본적인 이유로 시몬을 게바 즉 돌이라고 부르셨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후일 베드로의 신앙이 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확고하도록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이 게바 즉 돌(반석)이라고 부르셨던 대로 그를 만드셨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하여 확고하며 변치 않고자 하는 반석과 같은 확고한 결심으로 나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이다.
Ⅶ. 빌립과 나다나엘 1:43-51
1. 빌립을 부르심(43,44)
빌립은 요한에 의해 메시야를 알게 된 안드레나 자기 형제에 의해 인도받은 베드로와는 달리 메시야 자신에 의해서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의 택하신 가족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빌립을 만나 이르시되(4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 헤매이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으셨으며 또한 만나셨다. 빌립이란 이름은 그리이스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방인 사이에 널리 쓰이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름을 바꾸어 주지 않으셨다. 빌립은 그 이튿날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하루라도 낭비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을 찾아 내실 것이다. 빌립은 ‘나를 쫓으라’는 말씀에 따라 메시야의 권세에 의하여 한 사람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빌립은 벳세다 사람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와 베드로 역시 그러하였다(44절). 벳세다는 사악한 지역이었지만(마 11:21) 그런 지역에조차도 택하시는 은혜를 따라 남은 자가 있었던 것이다.
2. 빌립에 의해 초청된 나다나엘(45-51)
(1) 빌립과 나다나엘 사이에 있은 대화의 내용은 이러하다(45,46절).
1) 기쁜 소식 :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것은 기쁜 소식이었다(45절). 빌립은 비록 자신이 그리스도와는 초면이었지만 나다나엘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빌립이 말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빌립은 메시야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전하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소망해 오고 기대해 왔던 그분,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다. 마침내 그분이 오셨다.
그분이 오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은 만났다!”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그에게 유익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지식으로 빌립은 복음의 빛을 맞아 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은 그의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메시야를 발견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찾으셨기 때문이다. 빌립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2) 반론 : 나다나엘은 이 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나다나엘의 조심스런 태도는 칭찬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모든 것은 검토해 봐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의 반론은 무지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그가 말한 의미가, 메시야 즉 선한 것이 나사렛에서 나올 수는 없다는 뜻이라면 그런 한도에서 나다나엘은 옳았다. 그러나 그는 사실, 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즉 빌립이 메시야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이러한 반박이 발생한 것이었다.
3) 간략한 답변 : 빌립은 이러한 반박에 대하여 간단히 대답하고 있다. 와보라. 우리는 스스로 만족할만큼 충분히는 알고 있지만 그 아는 바를 만만찮은 상대를 설득시키기에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 빌립이, 스스로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을 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보자고 한 것은 그의 지혜로움과 열심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는 “와 보라”고 말했다. “가서 보라”가 아니고 “오라,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이질적인 상황들 때문에 종교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품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다.
(2) 나다나엘과 우리 주 예수 사이에 오고 간 내용(47-51절). 그는 와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1) 예수께서는 그가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다나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예수께서는 그를 칭찬하셨다. 이는 나다나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가 겸손한 사람임을 알고 계셨던 듯하다.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박했지만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다나엘의 심정이 고결함을 아시기 때문이 그 일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고결함에 대하여 그를 칭찬하셨던 것이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서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다.”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순전한 아들이었다. 나다나엘은, 그가 그렇게 보였듯이 진실로 이스라엘의 믿음의 신실한 고백자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의 신앙 고백의 한 일부였다. 그는 참 유대인 즉 내적인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 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즉 사람들에게 간사하지 않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도 결코 간사함이 없이 자신의 죄를 신실하게 고백했던 그러한 인물이었다. 진정한 이스라엘인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었다.
2) 나다나엘은 이 말에 대하여 무척 놀라고 있다.
①여기에 나다나엘의 공손함이 나타난다. 나다나엘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절). “당신께서 관심을 가지실 가치도 없는 저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한 칭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그의 신실함의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도 알고 계실까? 이제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도록 해 보자.
②그리스도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자신에 대하여 보다 확실히 드러내고 계시다. 빌립이 너를 부리기 전에…보았노라.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벌써 그를 알고 계셨음을 깨닫도록 하시며, 그렇게 하여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고 계시다. 둘째,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나다나엘을 보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하여 미쳐 어떠한 지식도 가지고 있기 전에 우리에 대하여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의 눈은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그 위에 있었다. 이 사실은 나다나엘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개인적인 일 이었다. “네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무화과 나무 아래 물러나 있을 때, 나는 나의 시선을 나무에 두었으며 그 곳에 있었던 네가 매우 받아들일만한 자임을 보았노라.” 아마도 무화과 나무 아래서 나다니엘은 명상에 잠겼거나, 기도를 올렸거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는다는 말은 침착하고 고요한 정신을 표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의미한다.
3) 여기에서 나다나엘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깊은 신앙적 확신을 얻고 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즉 요약해서 말하자면 당신은 진정한 메시야입니다라는 말이다. 얼마나 나다나엘이 마음을 다하여 확고하게 믿고 있는가! 이제는 더 이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고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는가! 나다나엘은 그리스도를 ‘랍비여’라고 칭하여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직분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과 사명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또한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이 모든 사실보다 더욱 크고 놀라운 사실을 나다나엘로 하여금 소망하고 기대하게 하신다(50-51절).
①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나다나엘의 준비된 신앙을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계심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50절). 이는 일이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던 게 아니고 나다나엘의 마음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증이었다.
②그리스도께서는 더욱 큰 일을 약속하셔서 나다나엘의 신앙을 굳게 해 주며 증대시키고 계시다.
첫째,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기적과 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실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장시키는 복음의 증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에 대하여 어떤 것이든 알리시기를 기뻐하셨으며, 알게 하신 이 모든 것 이상의 위대한 일들을 여전히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둘째, 특별히 “나다나엘 너 혼자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제자 너희들, 너희들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다(51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은 말한 사실이 매우 중요하니 주의를 집중하라는 명령이며 동시에 그 말이 의심할 바없이 진실임을 완전히 동의하라는 이 말을 사용했었지만 문장의 서두에 사용한 예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은 엄숙한 선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확인하고 있는 말, 즉 ‘장차 또는 미구에 너희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 보자.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명칭은 복음서에서 그에게 흔히 붙여진 명칭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사용하신 이름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불렀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스스로를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예언하고 계신 말씀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를 위한 천사들의 많은 활동 가운데서 성취되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승천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이 그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맞아 들이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 사역의 위대한 증거이며 제자들의 믿음의 확신의 기반이었다. 우리는 그 사건을 그리스도의 기적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제 이 기적의 시대를 시작하고 계시다. 이 일 후에 즉시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다(요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