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헬라어 예수님 말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마26:69-75)

마태복음 26장 헬라어 원어성경 예수님 말씀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고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세 번이 부인했습니다.

닭 울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마26:69-75)

오늘은 우리가 종려주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주일을 기념하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고난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성육신하여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죄악 된 몸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나의 원죄를 대속하실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3장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사 설교말씀

오늘은 우리가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고난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외면한다면 나는 주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은 자도 아닙니다. 주님과 연관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주님은 선택받은 나를 위해서 고난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의 육체의 탐욕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는 중요한 곳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꼭 같이 다녔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유월절 만찬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펄펄 뛰면서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절대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불과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닭이 울 때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초당하면서 괴로워하시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 속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주님을 조롱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베드로가 추운 날씨에 불을 쬐듯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고난받는 주님만 관망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이탈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9 Ὁ δὲ Πέτρος ἐκάθητο ἔξω ἐν τῇ αὐλῇ· καὶ προσῆλθεν αὐτῷ μία παιδίσκη λέγουσα, Καὶ σὺ ἦσθα μετὰ Ἰησοῦ τοῦ Γαλιλαίου.

호 데 페트로스 에카데토 엑소 엔 테 아울레 카이 프로셀덴 아우토 미아 파이디스케 레구사 카이 쉬 에스다 메타 이에수 투 갈릴라이우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궁금하여 따라왔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거짓 증인을 만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이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아 있습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와서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앉았더니’ ἐκάθητο(카데마이 2521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포 단수 3인칭) 주저앉다,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바깥 뜰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직설법은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조롱당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실제로 가야바의 집에 앉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미완료는 예수님이 붙잡혀서 올 때부터 계속해서 이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수디포는 베드로가 가야바의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서 오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계속해서 자신이 앉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어떤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갈릴리 방언을 쓰는 사람들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주님이 고난받는 그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타인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관망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일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나는 축복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싫고 축복을 받는 것은 좋은 이런 신앙은 주님과 관련이 없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내세에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마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0 ὁ δὲ ἠρνήσατο ἔμπροσθεν πάντων λέγων, Οὐκ οἶδα τί λέγεις.

호 데 에르네사토 엠프로스덴 판톤 레곤 우크 오이다 티 레게이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인입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럼 나의 첫 번째 부인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나에게 불이익이 올 때 너 교회 다니지 않아? 라고 했을 때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첫 번째 부인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도 주님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직장에서 불이익이 올 것 같으니 아니라고 한다면 주님을 첫 번째 부인한 것과 같습니다.

로고스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성경

‘부인하여’ ἠρνήσατο(아르네오마이 720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 거절하다, 부인하다, 배반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여종의 말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말에 주님을 모른다고 단번에 거절합니다. 직설법은 베드로가 여종의 말에 첫 번째 주님을 배반한 사건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과거 시제를 사용합니다. 배반하고 있는 것은 현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미 몇 시간 전에 예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간디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여종의 말에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말을 거절한 이유는 자신도 똑같이 고난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똑같습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고 생각하면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주님을 끝까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1 ἐξελθόντα δὲ εἰς τὸν πυλῶνα εἶδεν αὐτὸν ἄλλη καὶ λέγει τοῖς ἐκεῖ, Οὗτος ἦν μετὰ Ἰησοῦ τοῦ Ναζωραίου.

엑셀돈타 데 에이스 톤 퓔로나 에이덴 아우톤 알레 카이 레게이 토이스 에케이 후토스 엔 메타 이에수 투 나조라이우

베드로는 첫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급하게 그 자리를 뜨고 있습니다. 가야바 집의 앞문까지 나왔습니다. 그때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상황이 더 난감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없습니까? 세상에서 살다 보니 하나의 문제를 피하여 도망쳤는데 거기에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급하게 도망을 치듯이 빠져나왔는데 그 자리에 자신을 알아보는 한 여종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어떻게 나올까요?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2 καὶ πάλιν ἠρνήσατο μετὰ ὅρκου ὅτι Οὐκ οἶδα τὸν ἄνθρωπον.

카이 팔린 에르네사토 메타 호르쿠 호티 우크 오이다 톤 안드로폰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부인입니다. 예수님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두 번째 부인은 무엇입니까? 너 혹시 그리스도인 아니야? 그런데도 술 먹어도 돼. 그러면 안 될 텐데. 아니! 나는 그리스도인 아닌데.라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직장생활에서 마음 편하게 하고 싶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두 번 부인하는 것입니다.

‘알지’ οἶδα(에이도 1492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단수 1인칭) 보다, 알다, 경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자신의 위급함이 오니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본성입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이렇게 두 번째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혀 모른다고 말합니다. 완료 시제는 지금까지 주님과 함께 했던 시간과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전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 나와서는 주님께 충성 맹세하고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예배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교회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렇게 했느냐는 식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세상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말하고 버리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욕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조석변이처럼 바뀌게 됩니다. 내가 교회에서 유리할 때는 그리스도인 되었다가 세상에서 유리할 때는 그리스도인을 버려버리는 이런 신앙이 베드로처럼 두 번째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는 시간에 주님은 더 고통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고 조롱과 수치를 많은 사람 앞에서 당하고 있습니다.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表明)한다 하거늘

73 μετὰ μικρὸν δὲ προσελθόντες οἱ ἑστῶτες εἶπον τῷ Πέτρῳ, Ἀληθῶς καὶ σὺ ἐξ αὐτῶν εἶ, καὶ γὰρ ἡ λαλιά σου δῆλόν σε ποιεῖ.

메타 미크론 데 프로셀돈테스 호이 헤스토테스 에이폰 토 페트로 알레도스 카이 쉬 엑스 아우톤 에이 카이 가르 헤 갈리아 수 델론 세 포이에이

두 번째 부인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나와서 말합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갈릴리 방언이 나왔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곁에 섰던’ ἑστῶτες(히스테미 2476 동사 분사 완료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서다, 서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베드로 옆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복수를 사용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베드로 주변에 서 있었습니다. 분사는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예의주시하면서 베드로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료 시제는 베드로 곁에서 계속해서 함께 서 있던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 주변에서 나를 관찰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너도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교회도 다니지 않고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유익 때문에 재물의 유익 때문에 기독교와 예수님과 교회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고난 주간을 통해서 현재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베드로의 세 번째 반응은 어떻습니까?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4 τότε ἤρξατο καταθεματίζειν καὶ ὀμνύειν ὅτι Οὐκ οἶδα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εὐθέως ἀλέκτωρ ἐφώνησεν.

토테 헤륵사토 카타데마티제인 카이 옴뉘에인 호티 우크 오이다 톤 안드로폰 카이 유데오스 알ㄹ레크토르 에포네센

베드로의 부인은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부인이었고 두 번째는 맹세로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로 맹세하여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절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곧 닭이 울었습니다. 우리의 세 번째 부인은 기독교와 교회와 예수님을 절대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나는 이런 것들을 절대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바로 내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같습니다. 나도 베드로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베드로보다 더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75 καὶ ἐμνήσθη ὁ Πέτρος τοῦ ῥήματος Ἰησοῦ εἰρηκότος ὅτι Πρὶν ἀλέκτορα φωνῆσαι τρὶς ἀπαρνήσῃ με· καὶ ἐξελθὼν ἔξω ἔκλαυσεν πικρῶς.

카이 엠네스데 호 페트로스 투 레마토스 이에수 에이레코토스 호티 프린 알레크토라 포네사이 트리스 아파르네세 메 카이 엑셀돈 엑소 에클라우센 피크로스

요한복음 7장 신약히브리어 원어성경말씀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통해서 영적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니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회개입니다. 닭 울음소리를 통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재물의 욕심을 위해서 육적인 편안함을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살았던 시간들을 회개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핍박 속에서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올 때 예수님은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대답합니다. 네가 버린 로마로 나는 향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고난 주간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육적인 욕심에 싸여 살았다면 탐욕을 버리고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닭 울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쳐다보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 있었습니까? 주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회개의 닭이 울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나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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