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장 설교] 이사야가 받은 소명과 사명(사 6:1-13)

이사야 6장 설교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기를 보내달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가 받은 소명과 사명(사 6:1-13)

Ⅰ.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6:1-4

이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었을’ 때 본 그 환상은 사무엘상 3:20에서 사무엘에 대해 한 말과 같이, 그의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에는 아브라함과(행 7:2) 모세에게(출 3:2)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에스겔의 예언과 사도 요한의 예언은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과 함께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환상은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있었다. 그는 유다의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50년동안 통치를 한 왕이다. 그가 죽던 당시에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이스라엘 왕은 죽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다. 웃시야 왕은 별궁에서 문둥병자로 죽었지만, 왕 중의 왕은 여전히 그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

(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높이 들린’ 그 보좌를 보라. 그 보좌는 다른 보좌들보다 높아 그것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보좌들 위에 있어 그것들을 다스리기도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실체인 ‘여호와'(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고 또 그를 볼 수도 없다)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통치권인 ‘아도나이’를 보았다. 그는 주 예수를 본 것이다. 이 환상은 요한복음 12:41에서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공을 보았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그 앞에서 경배해야 하는 영광의 보좌에, 우리가 그 아래 복종해야 하는 통치의 보좌에, 우리가 그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

(2)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나타난 그의 성전, 곧 세상의 교회를 보라. 그의 ‘옷자락’, 곧 그의 예복 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즉 온 세상에(왜냐하면 세상은 전체가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의 표시들로 가득차고 아름답게 꾸며진 교회에 ‘가득하였다.’

(3) 그의 보좌를 시중드는 빛나고 복된 수행자들을 보라(2절). ‘스랍들이 모셔 섰는데’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스랍’ 곧 “숯 피우는 자”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기'(시 104:4)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히 그리고 죄를 대적하는 열심히 불타오른다. 그 천사들은 스랍들로서 그들의 빛에 비례하는 열심을 지니고 있고, 거룩한 지식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랑도 풍성히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영광이 된다.

그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날개들은, 에스겔이 본 것처럼 들어 펴지지는 않았다(겔 1:11). 날개 넷은 가리우는데 쓰였다. 그들은 위에 있는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아래 있는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웠다. 그들은 발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가리운다. 두 날개는 나는데 쓰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때 빨리 날아간다(단 9:21).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일을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4) 천사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래하는 찬송을 들어 보라(3절). 그들은 열정적으로 열심히 크게 ‘창화하였다.’ 또 그들은 조화를 깨뜨리는, 거슬리는 목소리를 조금도 내지 않고서 ‘서로 창화하였다.’ 그 노래는 네 생물이 부른 것과 똑같았다(계 4:8). 하늘에 있는 교회는 찬송이 다 같다. 박자나 음표가 다 똑같다. 3절에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런 호칭 중의 한가 나온다. 그는 ‘만군’ 곧 모든 군대의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그의 가장 영광스런 속성 중의 하나인 그의 거룩함이 나온다.

청렴함이 없이 사용되어지는 능력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두 번 언급되었으나(시 62:11), 그의 거룩함은 세 번 언급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 말은 삼위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왜냐하면 8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혹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래에도 계실 그분’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그 영광이’ 곧 그의 능력과 거룩함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사에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시 145:13).

(5)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환상 때문에 성전에 가득한 두려움의 징표들을 보라(4절). 성전이 흔들렸다.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다시 말해서 백성들을 판단하시려고 반포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로 인하여(시 50:4), 굳게 세워진 ‘문지방의 터’조차 흔들렸다. 성전이 어두워졌다. 성전에는 ‘자기 보좌 앞을 가리우기’ 위해 그 위에 ‘펴신 구름'(욥 26:9)같은 ‘연기가 충만하였다.’ 하늘에 있는 성전에는 모든 것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거하시지만, 여기서는 ‘캄캄한데 계시다'(대하 6:1).

Ⅱ. 환상을 본 결과와 사죄 6:5-8

(1) 선지자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서 당황하였다(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행복하도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외친다.

1) 선지자는 자신을 놀랍게 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특별히 과거에 한 경솔한 말이나, 뻔뻔스럽게 죄를 책망하지 않고 잠자코 지낸 죄악적인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죄인이요 특별히 말로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몹시 슬퍼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는 사실을 슬퍼해야 한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입술에 암기에 부적합한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입술의 부정함을 고통스럽게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인해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도 있고 정죄함을 받을 수도 잇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입술이 부정하 자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해야 한다. 병이란 유전되기도 하며, 전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로 우리의 죄책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입술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기 위해 행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의 슬픔을 증가시킬 뿐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나라 대신들의 맹세를 배웠듯이(창 42:16), 심지어 우리는 입술이 부정한 자들의 관습과 언어를 익혀 왔다.

2) 이러한 슬픈 반성을 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안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삼상 6:20). 이사야는 겸손해졌다. 따라서 그는 선지자로서 부름을 바들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2) 천사가 그에게 답변한 위로의 말이 그의 두려움을 가라앉혔다(6,7절). 스랍 중의 하나가 그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즉시 그에게로 날아왔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환산을 보고 엎드러진 자들은 그의 은혜를 받고 곧 다시 일어설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스랍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영광의 보좌를 잠시 동안 떠나 천사였다. 그는 날아서 이사야에게로 왔다. 우리 주 예수께서 번민하실 때도, ‘사자가 하늘로부터 주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눅 22:43). 스랍은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려고 ‘단에서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었다. 거룩한 성령께서는 불처럼 역사하신다(마 3:11).

스랍은 선지자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왜냐하면 부정한 죄로부터 입술을 깨끗이 하는 방법은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태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이것이 네 입데 닿았으니 네 것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네 죄책이 사죄의 긍휼로 제하여졌느니라. 즉 네 혀로 짓는 죄의 책임이 제하여졌느니라. 죄를 지으려는 너의 타락한 성향이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제하여졌느니라. 그러므로 아무것도, 네가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은 방해할 수 없느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자로 네가 쓰임받는 것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느니라.”

(3) 선지자의 사명이 새로워졌다(8절).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와 대화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숙고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보내는 일이 깊은 생각없이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이름으로 말하게 하려고 하실 때, 하늘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성직을 명예롭게 한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제 중에서 나온 한 선지자를'(히 2:1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려고 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 곧 자기가 가지고 오는 메시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며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하나님을 위한 용기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관심을 어느 정도 갖는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며 더욱이 천국의 비밀을 꿰뚫는 통찰력을 갖추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위하여 갈 수 없다(롬 10:15).

사람들에게 직분을 맡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다(딤전 1:12).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겠느냐’ 하실 때 아무도 그 직분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때에 이사야는 자신을 드려 그 일을 하려고 하였다. “내가 가겠나이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겠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의 말은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억지로 일을 하는 자가 아닌 자원자니이다.” ‘나를 보내소서’ 란 단어의 뜻은 이렇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들도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제가 단단히 결심하였나이다.”

Ⅲ. 이사야의 임무 6:9-13

하나님은 이사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에게 묘한 사명을 주어 보내신다. 그 사명이란 그의 백성들의 파멸을 예언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들을 파멸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교회의 상태를 예표하려는 것이다. 유대 교회는 복음을 완고하게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다. 본문 말씀은 신약에서, 엿서 번 정도 부분적으로 인용되거나 언급되었다. 이사야는 여기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그가 보냄을 받아 찾아가야 할 백성들의 대부분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을 것이며, 그가 그들에게 알려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일부러 눈을 감을 것이다(9절).

(2) 그들은 그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더 나아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나빠지게 될 것이다. 일부러 장님 노릇을 하는 자들은 천벌을 받아 정말로 눈이 멀게 될 것이다(10절). “그들이 네 말을 알다 듣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따라서 너는 ‘그들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다시 말해서 무감각하고 세속적이게 하며, ‘그들의 귀가 더 막히게’ 하고 ‘그들의 눈이 더 감기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회복과 회개는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때로는 죄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3) 이렇게 한 결과 그들은 완전히 파멸할 것이다(11,12절). 이사야는 불쑥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묻는다. “그 상태가 언제까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니이까? 나와 다른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그들 가운데서 헛되이 수고해야 하나이까. 사태가 더 나아질 수 없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의 답변으로, 마침내는 유대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성읍들은 거민이 없으며 토지는 경작되지 않고 전폐하게 될 것이라.” 영적인 심판은 종종 사람과 장소에 실질적인 심판으로 내려진다. 이 예언은 갈대아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예언에 앞서 나왔던 예언들이 신약에서 우리 구주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자주 명백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이 예언은 로마인들에 의한 유대 백성들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4) 그럴지라도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서 긍휼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즉 일정한 수이긴 하지만 불신앙 가운데서 멸망할 대다수와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수인 무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이 십분의 일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1) 그들이 돌아올 것인데 죄에서 하나님에게고 돌아올 것이며, 또한 의무를 지키게 될 것이며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자기 땅으로 돌라올 것이다(6:13;10:21).

2) 그들이 삼키운 바 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집의 양식인 십일조가 그러듯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다(말 3:10).

3) 그들은 비록 나뭇잎은 없어도 생명은 있는 겨울 나무처럼 될 것이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이 남은 자들도 비록 외적인 번영은 빼앗긴다해도 봄철의 나무처럼 다시 소생하여 번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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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고귀한 남은 자들이 공공의 이익을 지탱하게 될 것이다. 영혼 속에 있는 ‘거룩한 씨’는 사람의 그루터기이다. 심령 속에 있는 은혜로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자이다(요일 3:9). 인도(왕궁에서 성전으로 이어지는 높이 돋은 길, 혹은 계단식 길, 왕상 10:5)의 한쪽 가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그 나무들이 없으면 무너질 흙을 받쳐줌으로써 그 길을 지탱하고 있듯이 경건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소수의 백성들은 그 나라를 지탱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며 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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