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Luk) 16장 설교문] 부자와 나사로 비유 설교(눅16:19-31)

누가복음 16장 설교문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예수님 말씀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잘 먹고 잘살았는데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다. 부자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는데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기록되었다. 누가복음 비유 설교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부자가 아닌 나사로의 삶을 통해서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Ⅱ. 부자와 나사로 16:19-31

탕자의 비유가 우리 앞에 복음의 은혜로 보여 주려고 하였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장차 올 진노를 나타내어 우리를 일깨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로 가난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고, 세상과 호색에 빠질 유혹에 대항하여 우리를 무장시키고자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지금 이 비유는 이 두 가지 큰 목적은 매우 잘 달성하고 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나 겨자 씨 비유에서 처럼 영적인 일을 세상적인 사물에서 빌어와 그 유사성을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들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영적인 일 그 자체는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선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 죽어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가난한 자에게 냉혹과 부유한 향락주의자들은 죽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언제나 진리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가? 그러면 여기에 있는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는 본문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

마태복음 6장 세례요한의 회개 선포 성경말씀

1. 서로 다른 두 신분(19-21)

이 세상에는 악한 부자와 경건한 빈자라는 서로 다른 두 신분이 있다. 옛날 유대인들은 번영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라는 표시 가운데 하나라고 여길 정도이었으므로, 가난한 자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해 주시고자 노력하신다.

(1) 악한 인간, 즉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히 불행에 있을 사람(19절) : 한 부자가 있어. 라틴어에서는 흔히 어떤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자의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나타나 있지 않다. 이제 이 부자에 대하여 살펴 보자.

1)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그가 다닐 때의 행장이었다. 그는 쾌락을 위하여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매일 세탁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밤에 입는 옷과 낮에 입는 옷이 있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자색 옷이 있었다. 그는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2) 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 그의 식탁에는 자연과 인력이 제공할 수 있는 각종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차려졌으며, 보조 식탁에는 요리 접시로 가득 쌓여 있고, 비싼 정복을 입은 종들은 식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그 자리를 빛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악한 것이 있는가? 비록 어떤 사람이 재산이 넉넉하여 부유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으며, 또한 풍성한 식탁을 먹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죄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 재산을 사기, 압제, 또는 착취로 모았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그가 술 취했다거나 다른 사람을 술 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①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이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영원히 놓여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사는 형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것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추리할 수 없다. ②풍요와 쾌락은 매우 위험스럽다. 차라리 이 사람은 많은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행복하였을 것이다.

③육체의 방종, 그리고 육체의 안락과 쾌락은 많은 사람을 파멸시킨다. 좋은 고기를 먹고 좋은 의복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종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한다. ④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잊어 버린다면 하나님께 매우 진노를 살 것이며, 그 영혼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2) 여기에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경겅한 한 사람이 있다(20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최악의 궁지에 몰려 있었다.

1) 그의 몸은 욥처럼 ‘헌데’ 투성이었다. 몸이 병들고 쇠약한 것도 큰 고통이지만 헌데는 환자에게 훨씬 더 큰 고통을 줍며,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훨씬 더 혐오감을 준다.

2)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헌데 투성이요 절름발이였지만 몇몇 동정어린 손길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부자의 문간에 놓여졌다.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 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 푼을 그들에게 빌려줄 수 없는 자들은 한 손이라도 빌려주어야 한다. 고난 중에 처한 나사로는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①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21절). 그는 마땅히 부자의 식탁에서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대접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아니 부자의 개가 먹고 남긴 것들일지라도 고마워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한다. 첫째, 가난한 나사로의 곤경과 성품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하였다. 그는 안빈낙도하는 자였다. 그는 불평하고 울부짖으면서 부자의 문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온순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다.

본문에서 진노의 자녀이며 지옥의 상속자 된 자는 집 안에 앉아서 호화로이 지내고 있다. 반면에 사랑의 자녀이며 천국의 상속자 된 자는 문가에 누어서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판단되어질 수 있을까?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하였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본문에서 그를 무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그가 참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며, 매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말해 주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나사로에게는 큰 친절이 될 수 있었으나 그는 나사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고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창세기 34장 레위와 시므온 세겜 학살 성경말씀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유린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의 소유에 대하여 불충실한 청지기로 밝혀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운명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불행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다.

②그가 개로부터 받은 대우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그 부자는 한 떼의 사냥개,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들은 충분히 배부르도록 먹을 수 있었다. 그때 가난한 나사로는 연명할 수 있을 만큼도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의 개는 먹이고 가난한 자는 소홀히 한 사람들은 내세에 답변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개와 말을 배불리 먹이면서 가난한 이웃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륜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불쌍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그의 불행을 악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헌데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로 하여금 그 헌데를 핥도록 유혹했다. 그 개들은 주인처럼 인간의 피덩이를 즐겨 먹으면서 호화롭게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둘째로 얼마는 그의 불행에 대해서 그를 위로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인은 그에게 냉담하였지만 개들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고통을 덜어 주었다. 개들은 그 주인보다 훨씬 그에게 친절하였다.

2. 서로 다른 두 상태(22-23)

죽음에 임해서와 그 후의 생에 있어서 이 경건한 빈자와 악한 부자의 서로 다른 상태를 살펴 보자.

(1) 그들은 모두 죽었다(22절). 그 거지가 죽어…부자도 죽어. 부자와 가난한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에게 죽음은 공통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성도들은 죽어서 그들의 슬픔이 끝나게 되고 기쁨에 들어갈 것이다. 죄인들은 죽어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답변하러 갈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관계된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 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여전히 번창하게 내버려두시면서 경건한 자를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가 종종 있다 그는 다른 아무 피난처나 쉴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덤 속에 숨은 것이다.

(3)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가난한 자의 매장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사람들ㅇ느 아무 곳에나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묻었다. 그러나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을 가졌다. 부자가 지닌 관대한 인생 그리고 그가 베푼 좋은 식탁에 대하여 찬양하는 장례식사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연회에 참석했던 자들이 맡았을 것이다. 장례식은 그 사람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에게 받들려 안식에 들어간 그의 영혼에게 주어진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매우 거창하게 부자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 영예보다 얼마나 월등한 것인가! (1) 그의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된 상태에 존재했다. 죽지는 않았으며 육체와 함께 잠들어 있다. (2)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로 옮기웠다. 즉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3) 천사들이 그 영혼을 돌본다. 그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의 후사들에게 봉사하는 영들인데,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뿐 아니라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영혼은 성화되지 못한 영혼처럼 이 땅에 얽매이거나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에 탄성을 가지고 있어 육체를 멀리하자마자 그것에 의하여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그들을 데리고 올 특별한 사신을 보내시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인도될 것이다. 부자의 장례식에 있었던 상여군들은 아마도 일류급 인사들이었겠지만 어떻게 나사로의 상여군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인가? (4)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신실한 자의 영혼은 그에게로만 모이게 되어 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갖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자이었으나 하늘에서 그의 품에 가난한 나사로를 안기를 꺼리지 않았다. 부한 성도들과 가난한 성도들이 하늘에서는 다 같이 만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대식가인 부자는 그를 개의 무리와 함께 두기도 싫어하였던 것이다.

(5) 부자에 대해 들은 다음의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

1) 그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다. 그는 지옥, 저 음부, 즉 분리된 영혼의 상태에 있다. 거기서 그는 불행의 극한에서 극도의 고통 중에 있었다. 신실한 자의 영혼들이 육체의 짐에서 벗어나자마자 즉시 기쁨과 행복에 들어가는 것처럼 악하고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죽음에 의해 육체의 쾌락에서 끌려나오자마자 끝 없고 무익한 치료 불가능한 고통과 불행에 머무르게 된다. 이 부자는 전적으로 감각 세계의 쾌락에 몰두하였으므로 영혼의 세계의 기쁨에 대하여는 전혀 적합치 않았다. 부자의 마음 같은 속세적인 마음에 영혼 세계의 기쁨 같은 것은 진실로 아무런 기쁨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것들을 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2) 그의 처지가 비참하게 된 것은 나사로가 행복한 것을 그가 알게 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저가…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절). 그는 그때 나사로가 어떻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①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멀리서 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②그는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나사로를 보자 자신이 그에게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행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행복에 젖어있는 그를 보자 자신의 불행이 훨씬 고통스러워졌다.

3.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24-31)

(1)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불행을 경감해달라는 요청(24절). 멀리 있는 아브라함을 보자 부자는 그에게 울부짖었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애걸한다. 술 마시고 떠들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탄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여기서 다음 내용을 살펴 보자.

1) 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옥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인 환락에 젖어 있을 때 이 부자는 오늘날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 하듯이 아브라함과 그 이야기를 비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브라함에게 존경의 칭호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업신여기지만 의인들에게 억지로 가까워지려 하고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양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레위기 11장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설교말씀

2) 그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한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절). 그가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의 고통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불꽃인데, 죄를 범한 양심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즉 스스로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마음의 무서운 불꽃이다.

3) 이러한 불행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함 : 나를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자비를 업신여기던 자들이 그것을 간절히 구할 날이 이를 것이다. 나사로에게 아무런 동정도 베풀지 않았던 그는 이제 나사로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일찍이 자기보다는 훨씬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청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①여기서 그는 특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며, 그 고통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말했던 모든 악한 말, 즉 모든 완악하고 불결한 말들을 기억한다. 그가 말들에 의해 정죄받았으므로 혀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혀는 또한 맛보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고통은 그가 감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②그는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할 한 방울의 물을 원한다. 그는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것으로서 한 순간 그의 혀를 시원하게 할 한 방울의 물을 요청한다.

③그는 나사로가 그 물을 가져오기를 바란다.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를 알고 있고, 나사로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자를 위하여 이 선한 일을 자기에게 해 주는 데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경멸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기꺼이 친절을 얻고자 할 날이 이를 것이다.

(2) 이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 그는 그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부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보응을 받고 있는가를 보라. 빵 한조각을 거절하였던 그는 한 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늦게 구한다면 받지 못할 것이다.

1) 아브라함은 부자로 하여금 생전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얘…기억하라. 이것은 날카로운 말이다. 그때 죄인들은 기억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 구세주를 기억하라. 너의 최후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 수 있는 말도 잊어버리려 한다. “아들아, 너에게 주어진 많은 경고를 기억하라,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으나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고 말하지 않고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는가를 기억하라. 따라서 너는 하나님께서 빚진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너는 그가 너에게 주신 것을 받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묻어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는 밭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서, 네가 선택한 것들이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세에서 더 좋은 날은 다 지나가 버렸으며, 그것은 지난 과거이다.

②나사로가 받은 고난 : 그가 생전에 받은 불행과 비참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너는 네 악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것을 많이 가졌고, 나사로는 그의 선에 비해 지나치게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어진 약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 약은 결과가 나타났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사에서만 좋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만 나쁜 것을 가진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는가를 상기시킨다. 그 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나사로가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겠는가?

2)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함을 상기시킨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고, 지옥은 통곡이요, 아픔이다.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잠들면 그들은 위로를 받고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워질 것이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위로가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의 열락과 쾌락을 즐기다가 가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지옥이 될 것이다.

3)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26절). 천국에서는 가장 친절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 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죽어 저주 받은 무리를 방문할 수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지옥에서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지옥을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에 고정된 아무런 구렁이 없다. 우리는 전자에서 후자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시간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돌이 구렁의 문에 굴려졌는데, 그것은 다시는 굴려낼 수 없는 돌인 것이다.

(3)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행한 더 큰 요청 : 아브라함에게 말할 기회를 얻자 그는 뒤에 남겨 둔 자기 친척들을 위해 간청하려 한다.

1) 그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그는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요청한다. “당신이 이것만은 다시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동정심이 많으신 줄 확신합니다. 그를 나의 아버지 집에 돌려 보내소서. 그는 거기에 여러 번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알아 볼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민수기 6장 나실인 규례와 제사장 축도문 설교말씀

나사로가 그들에게 증가하게 하소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소서. 그들이 내 전철을 밟지 않고,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게 하소서”(28절).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 수만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설명은 약간 무서울 것이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2) 아브라함은 이 간청도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수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그들을 믿으면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 않게 막는 데 충분할 것이다.

3) 그는 가시 한 번 간절히 강청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즉 이 말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그럴 수 있겠으나 죽은 자가 살아 그들에게 간다면 훨씬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새로운 일이요, 놀라운 일이기에 분명히 그들을 회개시킬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것보다 다른 방법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4) 아브라함은 그것을 계속하여 부정한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들은 증거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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