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1장 성경 말씀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절규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예루살렘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다.
Ⅰ. 예루살렘의 슬픔 1:1-11
(1) 예루살렘이 당한 참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 그들의 사회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본래는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1절). 이 성읍은 그 백성으로 가득차 있었고 또 다른 나라 백성들도 자주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유익한 교역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홀로 ‘적막히 앉아’ 있게 되었다. ‘지혜가 소리쳐 부르던’ 성의 주요한 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이제는 과부같고. 신랑되는 왕은 이제 가 버렸다. 그 성의 하나님은 얼굴을 돌이키셨다. 이제 그 성은 아이들을 잃어버린 과부처럼 고독과 슬픔 가운데 버려졌다.
② 주권을 가지고 있던 성읍이 이제는 속국이 되어 버렸다.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여서 어떤 나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고 어떤 나라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나라들은 선물을 보내왔고 어떤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었다. 그 성은 실로 ‘열방 중에 공주’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우방들을 다 잃고 ‘적막히 앉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도 잃고 ‘조공드리는 자’가 되어 버렸다. 그 성은 처음에는 애굽에, 그리고 이제는 바벨론에 조공을 드리게 되었다. 죄를 짓는 백성은 적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어 버린다.
③ 즐거움에 가득차 있던 성읍이 이제는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읍으로서 모든 지파들은 여호와 앞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 그곳으로 갔었다. 그 성은 온 세상의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침묵과 고독 속에 ‘밤새도록 애곡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쉬고 있는 한밤중에도 그 성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성의 ‘머리는 물이 되고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고 있다(렘9:1).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④ 열방 중에서 구별되었던 그 백성들이 이제 ‘열방에 거하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히 선택된 백성들이었으나 이제는 뒤섞이고 말았다(3절).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그들은 약속되었던 땅으로부터 적국, 즉 하나님과 그 언약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들 중으로 옮겨져 ‘평강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5절). “다음 세대의 시가 될 자녀들이 끌려감으로 그 땅은 상속자가 없어 황폐하게 남아 있도다.” 자기들의 땅에서 동족들과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강제로 이국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 받고 있는 은혜에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이다.
⑤ 항상 남을 정복하기만 하던 백성들이 이제는 정복당했다.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치쳤도다(3절). 그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대적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빠져 나갈 길이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다(7절). 어느 곳에서나 그들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원수가 형통하게’ 되었다(5절).
⑥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시사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웃 나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백성들이 이제는 멸시를 받게 되었다(8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업신여김이여. 이제 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업신 여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9절). 죄는 사람에게 치욕을 안겨 준다.
⑦ 풍요로운 땅에 거하던 백성들이 이제 양식이 없어서 죽게 되었다(11절). ‘그 모든 백성이’ 낙담과 절망의 ‘탄식’을 한다. 이제 그 땅에는 ‘식물이 진하게’ 되었다(렘 52:6). 따라서 포로생활 중에 그들은 음식물을 얻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참조. 애 5:6).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11절). 어떤 역본에는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2) 그들의 종교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① 종교적인 절기는 더 이상 준수되지 않았다(4절).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그 길은 잡초로 뒤덮혔다. 엄숙한 절기들이 무시되고 모독당했다(사 1:11,12). 그러므로 그들에게 종말이 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 같이 ‘모든 성문도 황적’하여졌다. 그 문은 제사를 드리러온 신실한 자들이 서로 만나곤 했던 곳이다.
②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그들은 성전이 황폐하게 된 것을 탄식하였다. 찬양이 탄식으로 바뀐 것이다. 시온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소고치는 동녀 중에 가객과 악사’가 있었으나(시 68:25) 이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처녀들이 근심하며…곤고를 받았도다. 즉 시온의 모든 거민이 다 이전의 장엄한 집회를 회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에게는 ‘이 치욕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습 3:18).
③ 그들이 경건하게 제사드리던 장소가 모독당했다(10절).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그 성소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사장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은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탈하기 위하여 함부로 떼지어 들어간 것이다.
④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혹은 예배에 사용되던 값비싼 물건들이 이제 대적들의 노략물이 되었다(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이 보물들이 무엇인지는 이사야 64: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이사야는 정선이 불에 타는 것을 탄식하면서 ‘즐거워하던 곳이 황무하여 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보물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기쁨을 주던 것으로, 법궤와 제단, 기타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기념하는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은 이제 깨어지거나 옮겨졌다. 즉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간’ 것이다(6절).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은 거룩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도 없어진 것이다.
⑤ 거룩한 날이 조롱을 받았다(7절).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대적들은 이 백성이 7일 중의 하루를 안식으로 삼은 것을 비웃었다. 당시 이방 시인 쥬베날은 유다인들이 시간의 7분의 1을 손해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웃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돈을 주고 사야 할지니 이는 7일 중 하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식일이 만일 마땅히 지켜진다면 일주일 중 다른 어떤 날보다도 훨씬 유익한 날로 바뀔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안식일을 지켰다고 말하자 대적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가 너희를 이 고통 속에 버려두지 않았느냐?”
⑥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은 이전에 누리던 것과 정반대였다(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즉 어둡고 음침한 날에 옛날의 영화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심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다.
(2)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은 예루살렘의 죄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5절). 여호와께서는 ‘저의 죄가 많으므로’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심한가? 그들의 죄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참조. 렘 30:14). 그들은 매우 사악하였다(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고의로, 즉 계획적으로 범죄하였다. 이전에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로 인하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놀랍게 낮아졌다'(9절).
이전에 악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압박 받게 되었다(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그들 중의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였고 특히 갈대아 역본에 따르면 히브리 노예들을 핍박하였다. 이것이 이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렘34:11).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예루살렘은 그 거민들의 죄의 구렁텅이에서 뒹굴게 하였다.
(3)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모두 그릇되고 동정심조차 없었다.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2절).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같도다(6절). 첫 번 경고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흡사 꼴을 먹지 못하여 전혀 힘이 없는 사슴같았다. 이웃들은 전혀 이웃답지 못했다. 돕는 자가 없고…위로할 자가 없도다(7,9절). 아무도 동정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지 않았던 것이다.
(4) 비로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동정어린 긍휼하심만 바라고 있다.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절). 우리가 짐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선히 여기시는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Ⅱ.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음 1:12-22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교회가 슬픔을 당하는 중에도 그 재앙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한다. 그 손은 공의의 손이다.
(1)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회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말한다. 그녀는 모든 구경꾼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12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 빠질 떼 흡사 자기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쉽다. 만일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같이 섞어서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오 주여 원래의 내 고통을 돌려 주시옵소서.”
(2) 예루살렘은 고통을 주는 도구들 너머로 그 고통을 만드신 분을 본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절). “여호와께서 진노의 날에 내게 대하여 노를 발하사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구나.” 교회는 지금 열에 들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13절). 또한 그물에 엉키어 있는 것같다. 그 그물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엉켜 들어가는 그물이다. 그녀는 적막한 광야에 있는 자처럼 되었다.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의지할 것이 없나이다.” 그녀는 멍에를 멘 자처럼 되었다. 그 멍에는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통의 멍에였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14절). 그리스도의 계명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으로 묶인 멍에는 무겁고 힘들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하여 우리를 묶는다. 그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이 우리에게 멍에를 씌우사 묶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멍에를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 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는’ 분이시다(15절). 그 성은 또한 술틀에 밟힌 자처럼 되었다. 하나님이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그녀는 원수들의 손에 붙여진 바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붙이셨다'(14절). 여러 번 야곱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야곱을 침공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이는 야곱이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3)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너희들이 그토록 무관심하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너희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인가?”
(4) 예루살렘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내가 ‘밤새도록’ 울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구나.”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17절). 이것은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절망의 표시이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옮겨졌으므로 전혀 예루살렘을 도울 수 없데 되었다. 자신을 돌볼 수도 없는 그들이 어찌 예루살렘을 돌볼 수 있겠는가? 그 성의 기쁨과 희망이었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다(18절).
친구들 역시 그 성을 실망시켰다. 어떤 이들은 도울 뜻이 없었고 어떤 이들은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녀, 곧 그 성은 도움을 바라며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17절). 그녀는 우상들을 사랑했고 애굽과 앗수르를 믿었으나 그들은 그녀를 김나하였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선두에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했어야 했으나, 굶주림으로 ‘기절하였거나'(19절) 또는 ‘소성시킬 식물을’ 찾아 구걸에 나섰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20절). 원수들은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죽였다.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원수들로 온통 에워싸여져 있음으로 양식 조달이 끊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적들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원한을 몹시 품고 있던 에돔과 암몬 족속으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차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21절).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즉 자기의 죄가 이러한 재앙을 받을만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토록 무겁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멍에는 바로 자신의 ‘죄악의 멍에’였다(14절). 이는 곧 자신의 채찍으로 자기 자신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의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8절). 또 한번 반복하여 고백한다.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20절). 죄에 대하여는 아무리 나쁘게 말하여도 충분치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가장 나쁘게 말하여야 하고 심지어 ‘패역’ 곧 가장 큰 패역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어야 하며 그것은 영혼을 움직여야 한다.
(6) 예루살렘은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 이 두 가지 측면으로 호소한다. 여호와여 돌아 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그녀는 원수들이 그녀에게 행한 해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사 예언에 기록되어 있는 그날을 이르게 하시어 내 원수들을 나와 같이 만드시고 지금 내 손에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시옵소서.”
이것은 “정해진 날이 이르게 하소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곧이어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들의 죄를 인하여 저희에게도 행하시는 날이 빨리 오게 하소서.” 이 기도는 대적들과 연합하려는 모든 생각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여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교회에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반드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시라고 기도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