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성경 강해 설교] 에덴 동산 창설과 인간 창조

창세기 2장 성경 강해 설교 말씀은 에덴 동산 창설과 인간을 흙으로 창조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4-7절, 아담을 만드심

창세기 2:4 이하는 여섯째 날의 일 중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상세히 기록한다.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에서 하나님의 명칭으로 ‘하나님’(엘로힘)을 줄곧 사용하던 모세는 본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예호와 엘로힘)을 사용한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보다 2.5배나 더 많이 사용된 명칭이다. 그 두 명칭은 다 하나님의 명칭이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는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고, ‘여호와’는 그가 영원히 스스로 계심과 사람과 언약을 맺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두 말은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다. 창조자 하나님은 곧 영원히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의 두 명칭이 나오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문서들이 무리하게 합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창세기는 한 사람 모세가 썼다. 물론 모세 이전에도 창조 사건에 대해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 있었고 또 어떤 기록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그런 것들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가 영감 중에 이 내용을 다 썼고 이 내용이 다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이다(딤후 3:16).

본문에 ‘대략’이라고 번역된 원어(돌레도트)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 (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 말은 2장부터 37장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에 걸쳐 사용됨으로써 창세기 저자가 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그가 바로 모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시대에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5-6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얼른 보면, 천지만물 창조의 순서가 창세기 1장에서의 증거와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세기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기술하였고, 창세기 2장은 사람 창조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보충적이다. 여섯째 날에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 초목이라는 원어(시아크)는 ‘떨기나무(관목)’를 가리킨다. 초목이나 채소는 다 셋째 날에 창조되었지만, 그것들이 아직 들판에 두루 퍼진 것은 아니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 여기에 ‘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그의 형상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生氣)’라는 원어(니쉬마스 카이임)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영’ 혹은 ‘영혼’의 창조를 가리킨다. 매튜 풀의 말과 같이, 여기에 ‘생명’이라는 말(카이임)은 ‘생명들’이라는 말로서 충만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산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이야)는 ‘생물’ 혹은 ‘생명체’라는 뜻이다. 창세기 1:20, 21, 24에서는 ‘생물’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공중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나 땅의 짐승 등을 가리켰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과, 생명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영 혹은 영혼이 결합되어 산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몸을 만드셨다는 것은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할 요소임을 보인다. 몸은 저급하거나 더러운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이다. 우리는 몸이나 물질세계를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천사같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육을 가진 존재이다. 장차 부활 때에도 사람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화롭게 변화되는 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잘 먹이고 잘 보살펴야 한다. 몸을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 섭취와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몸을 학대하거나 몸을 병약하게 하는 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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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약하다. 넘어지면 살이 찢어지고 터져 피가 난다. 심하게 넘어지면 뼈에 금이 간다거나 부러지기도 한다. 사람의 몸은 범죄한 이후 더욱 연약해졌다. 그래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또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노쇠해진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3은 현재의 우리의 몸을 ‘약한 몸’이라고 표현했다. 또 고린도후서 4:7은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말하며, 4:17은 우리의 겉사람이 후패하며 낡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여성들의 몸은 연약하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7에는 여성을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몸보다 더 소중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으로 만드신 영 혹은 영혼이다. 군대로 비유하면, 영은 사령부요 몸은 예하부대이다. 영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심한다. 마음은 곧 영의 활동양식이다. 몸은 영의 지시와 마음의 결심대로 행동한다. 사람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사람도 영을 가졌다. 사람이 영적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유물주의(唯物主義), 즉 하나님이나 영을 부정하고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 있다고 보는 사상은 무지하고 허무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이다.

사람은 영이 강건하고 평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의 건강을 위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사람의 영의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다. 죄는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의의 길을 걷는 자의 심령은 항상 평안하다.

사람의 영은 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평안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로운 삶 가운데서 심령으로 평안하고 강건할 때 몸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3:7-8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했고,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다.

사람은 영과 육의 두 요소가 결합된 존재이며 그 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다. 또 그 두 요소는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신명기 32:39에는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고 했고, 또 출애굽기 15:26에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고 몸도 소중히 여기자.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학대하지 말고 잘 먹이고 보살펴야 한다. 적당한 영양 섭취와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운동은 몸을 위해 선한 일이며 그런 것을 낮추어 볼 것이 아니다. 특히 남자는 여성의 몸이 연약함을 알고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이 몸보다 더 귀함을 알고 영의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죄로 죽었던 영이 중생하였다. 이제 영의 건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계명을 순종하며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살 때 얻는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그 말씀을 통하여 평안과 힘과 용기를 얻는다. 또 우리의 영은 육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했고 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도 영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몸도, 영도 다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갈 5:16), 또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한다(딤전 4:7-8). 우리는 경건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8-17절, 에덴 동산에서 주신 명령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거기에 두셨다. ‘동방의’라는 말은 에덴 동산이 이스라엘 땅 혹은 모세가 글을 쓴 광야에서 볼 때 동쪽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에덴 동산은 실제의 장소이었다. 에덴이라는 원어는 ‘사랑스러움,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그곳은 아름다움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인류 창조 초기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아름답고 복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실 것이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운 세계이었다. 그가 만드신 나무들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고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맺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사과와 포도, 복숭아, 감 등 다양한 과일들을 맺었을 것이다. 과일과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음식들이다.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이것들은 실제의 나무이었을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것을 먹으면 건강하고 영생할 만한 열매이었던 것 같다. 범죄한 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조치하셨다. 그 나무는 영생이 있음을 암시한다. 천국에도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계 22:2).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을 시험하는 나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두고 사람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선이 되고 순종치 않으면 악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10-12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에덴은 높은 지대이었다. 거기에는 강들의 발원지인 샘이 있었다. 강이 에덴에서 시작되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갈라진 네 강들의 묘사는 에덴 동산이 실제적 장소이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진실한 내용이다. 성경에서 비유와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역사적 서술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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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은 비손이다. 본문은 비손강이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비손강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하윌라 땅은 아프리카 동부의 이디오피아 지역이다. 창조 이래로 지구의 지형에 대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윌라’라는 이름은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 중에도 있고(창 10:7), 셈의 6대손 중에도 있다(창 10:29). 베델리엄은 그 정확한 뜻을 모르나 아라비아역이나 다수의 유대교 랍비들은 그것을 ‘진주’라고 보았다.

[13-14절]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우리는 둘째 강인 기혼강의 정확한 위치도 모른다. 그 강이 구스 온 땅에 둘렸다는 표현은 나일강을 생각나게 한다. 구스는 오늘날의 이집트와, 수단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반면, 다음에 언급된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형의 대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 강들의 공통적 근원지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노아 시대의 대홍수 때 지구의 지형에 현격한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강인 힛데겔강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강을 가리키고, 넷째 강인 유브라데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관통하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킨다. 이 두 강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하여 이라크로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소위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강이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다스린다’는 원어(아바드)는 ‘일하다, 노동하다, 가꾸다, 경작하다’는 뜻을 가진다.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동산을 가꾸며 경작하는 일, 곧 농사짓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담에게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노동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다.

‘지키게 하셨다’는 말은 악한 자의 침입을 예상하는 말이다. 얼마 후 아담은 사탄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사탄의 타락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고 단지 얼마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으신 뜻 가운데 사탄의 타락을 허락하셨다. 아담은 에덴 동산을 잘 지켜야 했다.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그 동산의 복락의 상태를 잘 지켜야 했다.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한가지 명령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명령이며 최초의 율법이며 시험하는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허용하는 것, 금지하는 것 또 엄숙한 경고를 포함했다.

허용하는 것은 그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자유로,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었다. 아담에게는 그 동산에서 나는 무슨 과일이든지 따먹을 자유가 있었다. 그는 먹는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있었다. 먹고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금지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쉽게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한가지만 금하셨다. 사실, 그는 무엇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요 사람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할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사람을 시험하는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은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 즉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었다. 사람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원적 순종을 요구하셨다. 순종은 선이 되고 불순종은 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엄숙한 경고도 포함하였다. 그 금지된 과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의미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우주적 철칙이다. 순종은 생명이요 불순종은 죽음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과장된, 헛된 경고가 아니고 참된 경고이었다. 그 경고대로 사람은 범죄했을 때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 죽음은 영적 죽음, 육신적 죽음, 영원한 죽음을 다 포함한다. 영적 죽음은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참 평안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불안과 공포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며, 육신적 죽음은 육신이 늙고 병들고 연약하다가 마침내 죽는 것이며, 영원한 죽음은 영육이 함께 지옥 불못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 속에는 또한 영원한 생명이 암시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정녕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영생은 또한 에덴 동산 가운데 있는 다른 한 나무인 생명나무를 통해서도 암시되었다. 성경 전체가 영생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5:39). 성경은 영생을 증거한다.

아담의 범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죄씻음과 영생을 가져온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디도서 1:2-3,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요한일서 5: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쳐준다. 그 순종의 원리는 신약시대인 오늘날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그의 음성을 항상 거역한 데 있었다(신 9:6-7).

그러므로 모세는 신명기 10:12-13에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선지자 사무엘도 순종에 대해 증거하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하였고(삼상 15:22-23), 전도서는 증거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다(전 12:13).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였고(롬 6:22), 요한계시록은 땅에서 구속받은 14만 4천명의 성도들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계 14:4).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결론적으로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처음 명령을 어겼고 아담 안에서 온 인류는 다 죄인들이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약속된 복음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은 없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도 변함 없는 진리다. 인류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는 데서 왔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바는 죄와 불순종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진리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죄의 낙을 누렸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성경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며 연구하고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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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절, 여자를 만드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던 날, 처음 여자를 만드신 목적과 방법, 그리고 결혼에 관해 증거한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시기를 뜻하셨다. 아담이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거기에는 자녀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다. 아담은 결혼을 통해 자녀들을 땅에 출산하여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기쁘신 뜻이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원어(에제르 케네그도)는 문자적으로는 ‘그 앞에 늘 있는 돕는 자’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그에게 맞는(혹은 적합한) 돕는 자’(a helper suitable for him)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에 ‘배필’(配匹)이라는 말은 ‘짝’이라는 뜻인데 좋은 번역 같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자를 위해 항상 그의 곁에 있어서 그와 교제하고 그를 위로하고 그를 도와주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리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은 다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뜻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에서다. 여성이 좋은 주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범적 여인상을 가르친 성경은 잠언 31:10-31이다. 거기에 보면, 모범적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표현하며 그 값은 진주보다 크다고 말한다. ‘현숙한’이라는 원어(카일)는 ‘힘있는, 훌륭한’이라는 뜻이다. 현숙한 아내는 가정에서 자기 남편을 잘 내조(內助)하는 여인 즉 아내로서의 역할을 유능하게 잘 행하는 여인이다.

그 본문에 보면, 그 여인은 “살아 있는 동안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12절),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5절),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20절),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 자이며(27절) 그 자녀들은 일어나 그에게 감사하고 그 남편은 그를 칭찬한다고(28절) 묘사되어 있다.

[19-20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순서를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 창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새와 들짐승도 흙으로 지으신 후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사람이나 짐승의 몸은 다 흙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죽을 때 다 흙으로 돌아간다(시 104:29; 전 3:20). 아담은 모든 육축과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아담의 지혜가 잘 드러나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된 그의 권위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생물들은 아담과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는 그에게 돕는 배필이 될 자가 없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처음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흙을 사용하여 독립된 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잘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별개의 두 인격체를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다른 한 사람을 만드셨다. 즉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환원될 수 있는 자이었다. 그 둘은 한 몸처럼, 한 인격처럼 살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신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아담의 머리뼈나 발뼈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의 갈빗대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남자의 짓밟힘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의 대상인 것을 잘 나타낸다. 가슴은 사랑의 품이다. 사람이 사랑하면 가슴이 뛰고 사랑에 실패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내를 구박하거나 학대하는 남편은 자신의 갈빗대를 스스로 치는 자와 같다. 부부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이다.

[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알았다. 그는 자기 눈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갈빗대로 그를 위해, 그를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아내임을 알았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이 사람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그 여자가 자기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이며 자기가 가슴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다. 그는 그를 여자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라고 하고 ‘여자’는 잇솨라고 한다. 이-쉬에게서 나온 그는 잇솨라고 불리운 것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본절은 결혼의 의미를 잘 말해준다. ‘떠난다’는 원어(아자브)는 ‘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가지는 효도의 의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준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있으나 커서 결혼한다는 것은 이제 부모 곁을 떠나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결혼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시키는 부모 입장에서도, 결혼하는 자녀 입장에서도 알아야 할 사실이다. 부모가 결혼한 자녀를 자기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때 갈등이 생긴다. 효도는 자녀 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며, 부모가 교훈은 할 수 있어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결혼한 자녀 가정의 독립성을 인정해야 하며 자녀도 결혼 후에는 부모의존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또한 부부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사랑은 연합이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한다(아 2:16; 6:3). 이것이 사랑의 성격이다.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붙잡혀 산다.

결혼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결혼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며 그가 정하신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부모보다도,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부부는 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즉 삶의 목적과 방식이 하나이어야 하며 돈주머니가 하나이어야 한다. 결혼의 이러한 원리를 알고 사는 부부들은 복되다.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자신의 갈빗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하고, 또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엡 5:25, 28).

또 성경에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벧전 3:7).

지금부터 3,500년 전, 모세도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다(신 24:5). 성경이 남편들에게 교훈하는 바는 아내에 대한 바로 이런 사랑과 배려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아내의 의무를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에베소서 5:22-24는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한다.

또한 베드로전서 3:1-6은 교훈하기를,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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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사랑과 순종으로 부부는 한 몸이 되며 거기에 부부관계의 행복이 있다. 사랑과 순종이 없는 부부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연합의 복을 모를 것이다. 자기 아내를 구박하는 남편과 자기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처음 사람들은 순수하였고 그들에게는 아직 죄악된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다. 부끄러움은 선악의 비교 의식에서 생기는 것 같다. 아직 악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패된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으므로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창세기 2장 주석 강해 일곱째 날에 안식일 제정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여자는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알아야 하겠다. 여자는 본래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을 돕는 역할을 유능하게 수행하는 아내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자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이 현숙한 아내, 즉 남편을 돕는 좋은 배필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결혼시키는 부모라면 결혼한 자녀가 독립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결혼한 자녀라면 이제는 부모를 의존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부부가 된 자들은 사랑과 순종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하겠다. 성경에 교훈한 대로, 남편은 아내를 참으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참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부의 생활은 참으로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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