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Rom) 8장 설교 말씀]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사랑(롬 8:31-39)

로마서 8장은 선택 받은 성도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은 구원의 취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 항상 주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환란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세상의 환란도 능히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끊을 수 없는 성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그 동안 로마서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근거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환란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하신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에 그 사실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8장 39절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음에 다시 한번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살고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진 삶을 살고 있으며 사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들고 답답하여 가슴이 저미고 숨이 차는 것 같은 압박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파노라마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특히 8장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이 로마서 8장을 보석 가운데 박힌 진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 비유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우리 같은 영적으로 천박한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는 본문에서 구구절절이 토하여 내는 이 외침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말씀이라고 저는 담대히 말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을 지내오면서 때로는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구원에 대한 뜨거운 감사로 찬양과 기도를 올릴 수 있었는가 하면 때로는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마음의 냉랭함 때문에 구원의 감사는커녕 현재의 당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로 인하여 걱정과 염려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시간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침체되고 연약한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구원의 찬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어떠한 환경과 이유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뒷받침되기에 우리들은 영적인 전쟁에서 악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 확신만 가진다면 이번 한 주간도 어떻게 살것인가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확신만 가진다면 다가오는 2,00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확신만 가진다면 우리의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확신이 있는가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말씀을 통하여 고민하고 해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I.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들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질문 형식으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고 있는 질문들은 정말 답변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놀라운 질문들입니다.

첫째 질문이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습니까? 보다 깊이 보다 넓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가 아무리 우는 사자처럼 날뛴다고 하더라도 변함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붙들고 있는 한 우리들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의 말씀들을 보시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118:6)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과 위험에 처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이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고 하셨는데도 믿지를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지나 않습니까? 왜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왜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시편 31편 다윗의 시 복음 설교말씀

두 번째 질문은 32절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한마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피로 사신 성도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면 그 보다도 덜 귀한 것은 내어놓기가 쉽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놓으면 무엇을 내어놓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무엇을 주지 못하여 안절부절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생활고를 인하여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잘 믿어보십시오, 절대로 굶기지 않습니다.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자녀들을 죽도록 버려주겠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네 번째 질문은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다섯 번째 질문은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상 세 가지 질문은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고 연약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죄인으로 고소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귀가 이 시간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정죄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네가 목사야, 그래가지고 뻔뻔스럽게 설교하느냐” “네가 성도야 그래 가지고 무슨 염치가 있어서 교회에는 나왔느냐” 그러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저도 뻔뻔스럽게 “그래 내가 목사다, 어쩔테냐” 하고 담대히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근거로 하면 죽을 때까지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정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요 근자에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느끼고 있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성도”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성숙하지 못하고 답답한 부분이 많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 어떤 것들도 우리들의 구원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이 한가지 변치 않는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승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들을 7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일곱 가지를 다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만 간단히 생각하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가 환란입니다. 우리가 보통 환란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환란도 우리를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란이라는 말은 시련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말씀입니다. 그 뜻은 위에서 누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우리들을 짓누르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자녀들 문제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로 인하여 짓누름을 당하고 있습니다. 짓누름을 당할 때는 정말 머리가 아픕니다. 그러나 이러한 짓누름을 당한다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도리깨질 하여 보셨습니까?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작업이지요,

하나님은 환란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앙을 도리깨질 하셔서 찌꺼기는 다 벗겨버리고 알맹이만 남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환란을 당하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환란을 잘 통과하여 정금과 같은 귀한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당하면 사정없이 우리들의 잘못된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곤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곤고라는 말은 좁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시련을 당하게 되면 마치 좁은 새 장에 갇혀있는 것과 같고 답답한 공간에 꽉 끼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고독합니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자들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2:14절에서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하여 보세요, 바위 틈에 끼여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것도 낭떠러지에 있으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니 화려하게 나타나지도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하게 되면 떨어져 죽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비록 바위 틈에 끼여 있는 생활을 하고 있고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비둘기와 같은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곳이 안전 지대인 줄 알고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사는 성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러한 성도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탈선하고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있습니까? 안전 지대가 답답하다고 하여 방종하기 때문입니다.

♬♬♬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 예수 나를 숨겨 주소서 ♬♬♬

만세 반석 되시는 예수 안에 숨어 있어야 합니다. 숨어 있기에 비록 답답하고 힘이 들어도 그 곳을 떠나서는 위험합니다. 포도나무가 가지를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떠나서는 바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와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이러한 모진 비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고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도 잃어버리고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승리가 어느 정도의 승리입니까?

오늘 설교의 결론이며 절정입니다.

3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넉넉히 이긴다’는 말은 ‘더 이길 수 있는 힘을 남겨두고 이긴다’는 뜻입니다. “정복자보다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과 싸워서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힘이 남아돌아 갈 정도로 넉넉히 이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상상하시면 이해가 빨리 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보혜사 성령 헬라어 원어성경 설교문

우리나라의 민속 경기인 씨름을 생각하여 보십시다. 천하장사 결정전이 벌어졌는데 5판 3선승제에서 2:2의 상황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판에서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한 사람이 겨우 이겨서 이긴 후에도 기진맥진하여 땅에 주저앉는 모습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말은 3:0 스트레이트로 상대방을 모래 판에서 이기고 그래도 힘이 넘쳐 모래 판에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사자 처럼 포효하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이렇게 통쾌하게 이기고도 남는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줄 믿습니다.

우리가 힘이 있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을 번쩍 치켜 올리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왜 때때로 신앙이 흔들리고 시험에 빠집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저 막연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에서 내가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6절의 말씀과 37절의 말씀을 비교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하며 얼마나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입니까? 사실 우리들의 삶이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어쩐 일입니까? 그런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악의 세력들과 싸워서 이기게 하셨는데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다가 탈진한 상태가 아니라 이기고도 힘이 남아서 사자처럼 포효하는 이러한 개선장군이 되게 하셨으니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들에게 너무도 과분한 대우라서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믿음과 결단을 방해할 수 있는 세력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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