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성경 말씀은 에덴 동산과 돕는 배필인 여자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게 된다. 에덴 동산은 기쁨의 동산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곳에서 만나주셨다. 에덴 동산은 천국과 같은 장소를 의미한다.
Ⅰ. 안식일의 제정 2;1-3
1. 자연의 왕국의 정착과 하나님의 안식(1,2)
여기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늘과 땅에 지어진 모든 피조물은 훈련을 받고 명령을 받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지켜야 한다. 둘째, 하늘과 땅이 완성되었고 또 거기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완성되었다. 셋째, 최초의 엿새를 지낸 후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의 역사를 그만두셨다. 그러므로 그는 기적을 행하실 때도 자연을 통제하셨지 결코 정해진 그 진로를 바꾸시지는 않으셨다. 넷째, 영원하신 하나님이 쉬신 것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아주 만족하셨기 때문이다.
2. 은혜의 왕국의 시작과 안식일의 성화(3)
여기서 다음의 다섯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레 중의 한 날을 거룩한 안식과 거룩한 일을 하는 날로 엄숙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안식일을 계시받은 자들의 필수 불가결한 의무이다. 둘째, 안식일은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된 아주 오래된 제도이다. 죄가 없었던 시대인 이 때에 설정된 안식일이 족장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경건하게 지켜졌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주의 안식일은 참으로 귀한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를 순종하는 태도로 그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넷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섯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날이다.
Ⅱ. 사람의 창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 2:4-7
(1) 여기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창조주께 붙여진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곧 ‘여호와'(Jehovah)이시다. 1장에서는 그가 내내 ‘엘로힘'(Elohim)곧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여호와’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으로서 그의 자존하심과 그가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표시하는 명칭이다.
(2) 다시 한 번 초목과 채소의 생산이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사람을 위하여 지어졌고 사람을 위한 식물이 되도록 정해졌기 때문이다(5,6). 여기서 다음 네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땅은 스스로 그 열매를 내지 못하였고 순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내었다. 영혼 속의 은혜는 본성의 토양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자신의 수고의 결과이다. 둘째, 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기’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흔히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 일을 하시지마는 결코 그것에 얽매이시지는 않는다. 넷째, 하나님은 어떤 방도로든지 그가 만드신 식물들에게 물을 주실 수 있으셨다. 그때는 아직 비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안개를 만드셔서 그것으로 ‘온 지면을 적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안개나 조용히 내리는 이슬과 같이 소리 없이 교회를 적셔 준다(신 32:2).
(3) 사람의 창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다(7절). 사람은 하늘과 땅, 곧 영혼과 육신으로 된 소우주이다. 이제 여기에 이 두 가지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있다.
1) 사람의 몸의 기원은 비천하지만 그 구조는 기묘하다. 첫째, 그 재료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재로는 이같이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지으신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금 가루나 진주 가루 혹은 다이아몬드 가루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흔해 빠진 땅의 티끌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바탕이 흙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의 형성은 질그릇을 빚어 냄과 같다(욥10:9).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둘째, 그렇지만 그것을 만드신 분은 위대하고 그 제작은 훌륭하였다.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창조되고'(created)’만들어졌다(made)고 하였으나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형성되었다'(formed)고 말하여진다. 이 말은 사람이 고도의 정확성과 정밀도를 지닌 계획에 따라 점진적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기술이 재료를 능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자(롬 12:1).
2) 인간의 영혼의 고귀한 기원과 놀랄 만한 유용성 : 첫째, 영혼은 하늘의 생기로부터 기원되었다. 영혼은 몸처럼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나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영혼이 하나님을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의 영혼을 받았으니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 맡기자. 둘째, 영혼이 곧 사람이다. 영혼이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몸은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역겨운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영혼의 기원이 그처럼 고귀하고 그 특성과 능력이 그처럼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영혼보다 귀하게 여김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멸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잠 15:32). 또한 영혼을 지으신 분만이 그 영혼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Ⅲ. 에덴 동산의 창설과 사람을 거기에 두심 2:8-15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는데 몸은 땅에서 나왔고 이성이 있는 불멸의 영혼은 하늘의 생기에서 나왔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위하여 마련된 준비를 보게 된다. 만일 사람이 그가 축복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상태를 간직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지으신 분이 그들을 계속 행복하게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1. 에덴 동산의 묘사(8-14)
에덴 동산은 위대한 군주의 저택과 영토로 쓰려고 마련된 곳으로 곧 이 군주의 궁전이었다. 영감 받은 창세기 기자는 이 역사를 기록할 때 먼저는 유대인을 위하여 그 다음으로는 유아기 상태의 교회를 위하여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실들의 외적인 면만을 기록하였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은 후에 더 많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깨닫도록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담의 내적인 행복보다는 외적인 상태의 행복에 대해 주로 기록했던 것이다.
(1) 아담이 거주하도록 정해진 곳은 동산이었다. 그 곳은 상아로 만든 집이나 금으로 입혀진 궁전이 아니라 동산이었는데 그것도 기술자로써가 아니라 자연으로 꾸며지고 장식된 동산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사는 집의 지붕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어느 지붕이 그처럼 기묘하게 꾸며지고 단장될 수 있겠는가! 또한 땅은 그의 마루였으며 그 어떤 마루도 그처럼 훌륭하게 단장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무 그늘이 그의 휴식처였고 그 아래가 그의 식당이며 침실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들도 이곳들보다 멋있게 꾸며질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솔로몬의 영광도 이 모든 영광과 견주어 볼 때 이것들만 못하였다. 자연은 적은 것과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만족하며 은혜는 보다 적은 것에도 만족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2)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와 능력으로 이 동산을 고안하고 설비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창설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시고 정하신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영혼을 만족시키거나 기쁘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곳이 아니고서는 아무데도 참된 낙원이 될 수 없다.
(3) 이 동산의 환경은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이 동산은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에덴이라는 곳에 있었다. 그 장소에 대해서는 특별히 여러 가지 특징과 경계로써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거처가 될 하늘의 낙원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지상의 낙원을 찾는 일로 고심하지 않도록 하자.
(4) 이 동산에 심겨진 나무들
1) 이 동산에는 모든 가장 좋은 나무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아담의 유익뿐만 아니라 그의 즐거움도 고려하셨다. 죄가 없는 곳에는 변치 않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결백 그 자체에 참되고 지극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2) 이 동산에는 특별한 두 나무가 있었다. 땅에는 그 와 같은 나무들이 없었다. 그 한 나무는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였다. 이 나무는 아담에게 그가 무죄한 상태로 계속 순종만 하면 창조주가 베푸는 은혜로 말미암아 장수와 행복을, 더 나아가서는 불멸과 영원한 축복까지 받게 될 것을 보증하는 징표와 인종이 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아담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고 또 영원히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되신다(계2:7;22:2). 또 하나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나무의 이름이 이같이 불린 이유는 나무 속에 유용한 지식을 낳거나 증가시키는 어떤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담이 이 나무에 의해 도덕적인 선과 악을 알 수 있도록 이 나무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고 실제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선인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 선이다. 무엇이 악인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악이다. 사실 다른 모든 도덕적인 선과 악의 구별은 원래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실정법에서 유래한 이러한 구별은 이 나무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둘째, 결과적으로 그 나무가 아담에게 선을 상실함으로써 선을 알고 악을 깨달음으로써 악을 아는 경험적인 지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은혜 시대의 계약 속에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듯이 무죄 시대의 계약에도 생명나무에 의해 확증되고 보증된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먹으면 죽으리라”는 경고가 다른 또 하나의 나무를 통해서 아담에게 동시에 주어졌다. “이 나무를 손대면 멸망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 두 나무를 통해서 아담 앞에 ‘선과, 악, 축복과 저주’를 설정해 놓으셨다(신 30:19). 곧 이 두 나무는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서약과 같았다.
(5) 이 동산을 적시는 강이 있었다(10-14절). 이 네 강(혹은 한 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 지류)이 동산의 쾌적함과 비옥함을 더해 주었다. 하늘의 낙원에는 이것들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훨씬 좋은 강이 있다. 그 강은 이것처럼 에덴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 나오는 (계22:1) 생명수강이며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시 46:4)강이다. 하윌라 땅에는 금과 향료와 보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에는 그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생명나무와 하나님과의 교제였다. 우리는 아프리카나 인도 지방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금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다. 그 땅의 금이 좋기는 하나 우리의 재산은 그보다 무한히 더 좋다.”
2. 이 기쁨의 낙원에 사람을 두심(15)
(1)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낙원을 차지하게 하셨다.
1) 사람은 낙원 ‘밖에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 후 그를 이 동산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는 낙원의 흙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보통 진흙으로 지어졌다. 그는 이 동산의 경작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받은 것 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바로 그의 축복의 장본인이셨다. 우리를 지으신 분만이 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다.
3)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억지로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들을 따라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낙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시 47:4).
(2)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임명하셨다. 낙원이라고 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다음 네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빈둥거리며 지내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영혼과 몸을 주신 이가 또한 그것을 가지고서 일할 거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이가 또한 우리에게 그와 우리의 세대를 섬기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할 일을 주셨다.
둘째, 이 세상에서 직업을 지닌다고 해서 순결의 상태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활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농부로서의 소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명예로운 소명이다. 그것은 낙원에서조차 필요한 소명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창조주를 찬미하는 기회를 주는 소명이었다. 그의 손이 나무를 매만지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시는 일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3. 하나님께서 무죄 상태의 사람에게 내리신 명령과 그와 맺으신 언약(15)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의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또한 근의 후한 수혜자로서의 하나님을 보아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람의 통치자와 입법자로서 나타나신다.
Ⅳ. 하나님의 명령 2:16,17
1. 이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16)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자로서 서 있는 인간에 대해 그가 조금 전에 자연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그 자신과 그의 모든 후손들을 위해, 이번에는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셨다. 이성 없는 피조물들은 각기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은 분별없는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뿐만 아니라 왕과 주로서의 하나님 명령도 받았다.
2. 사람에게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규정하는 이 권위의 특별한 법률(17)
(1)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을 수 있다’는 허락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현재의 행복을 확정해 주셨다. 이것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순종을 조건으로 그에게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아담은 자신의 완전하고 영속적인 순종을 지속하기만 했더라면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낙원을 영원히 확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은 이 명령을 위반하면 그의 모든 행복을 몰수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다. “아담은 이것을 알아라. 너는 지금 너의 선한 행실 때문엔 현재의 상태를 누리고 있다. 너는 조건부로 낙원에 있는 것이다. 지키고 순종하라. 그러면 네가 영원히 여기에 거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네가 행복한 만큼 비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자.
1) 아담은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는 위협적인 경고를 받았다.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순결한 상태에 있던 아담조차도 위협의 두려움을 겪었다. 둘째, 그가 위협받은 형벌은 죽음이었다. 셋째, 이것은 죄의 즉각적인 결과로서 오는 것이라고 경고되었다.
2)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실정법을 통하여 시험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으로 그의 순종을 시험하신 것은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이류를 들 수 있다. 첫째, 이 법이 순전히 입법자의 뜻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담의 본성 가운데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금했다는 사실 때문에 악한 것이 되는 그러한 것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다.
둘째, 이 법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있는 죄의 커다란 두 근원인 육신과 마음의 소욕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 금지는, 그의 몸이 그의 영혼을 의해 다스려지고 그의 영혼은 근의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질 수 있도록 감각적인 기쁨에 대한 그의 욕망과 진기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그의 야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Ⅴ. 남자에게 돕는 배필을 지으심(2:18-20)
1. 이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16)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자로서 서 있는 인간에 대해 그가 조금 전에 자연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그 자신과 그의 모든 후손들을 위해, 이번에는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셨다. 이성 없는 피조물들은 각기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은 분별있는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뿐만 아니라 왕과 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도 받았다.
2. 사람에게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규정하는 이 권위의 특별한 법률(17)
(1)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을 수 있다’는 허락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현재의 행복을 확정해 주셨다. 이것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순종을 조건으로 그에게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아담은 자신의 완전하고 영속적인 순종을 지속하기만 했더라면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낙원을 영원히 확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은 이 명령을 위반하면 그의 모든 행복을 몰수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다. “아담은 이것을 알아라. 너는 지금 너의 선한 행실 때문에 현재의 상태를 누리고 있다. 너는 조건부로 낙원에 있는 것이다. 지키고 순종하라. 그러면 네가 영원히 여기에 거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네가 행복한 만큼 비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자.
1) 아담은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는 위협적인 경고를 받았다.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순결한 상태에 있던 아담조차도 위협의 두려움을 겪었다. 둘째, 근가 위협받은 형벌은 죽음이었다. 셋째, 이것은 죄의 즉각적인 결과로서 오는 것이라고 경고되었다.
2)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실정법을 통하여 시험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으로 그의 순종을 다음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이 법이 순전히 입법자의 뜻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담의 본성 가운데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그것을 금했다는 사실 때문에 악한 것이 되는 그러한 것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다. 둘째, 이 법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있는 죄의 커다란 두 근원인 육신과 마음의 소욕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 금지는, 그의 몸이 그의 영혼에 의해 다스려지고 그의 영혼은 근의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질 수 있도록 감각적인 기쁨에 대한 그의 욕망과 진기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그의 야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3.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배려와 그 자상하신 관심(18)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순종을 격려하기 위하여 자신이 친구로 계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셨다.
(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의 독처하는 것을 동정하셨다.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셨고 또한 그에게 좋은 것, 즉 그가 홀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그래서 그는 “그가 계속해서 이렇게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홀로 있으면 인간은 위안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고독은 낙원을 황무지로, 궁전을 지하 감옥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둘째, 홀로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키거나 유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으로 땅을 가득 채운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대의 계승을 통하여 그와 같은 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그러한 세대의 계승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둘로부터 곧 남자와 여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일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에게 사회를 마련해 주실 뜻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그에 관해 심사 숙고한 끝에 이런 결심을 하셨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다음 네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상태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둘째, 우리의 필요를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또한 그만이 그 모든 필요를 완전히 채우실 수 있다(빌 4:19).
우리의 도움은 오직 그 안에 있으며 또한 그로부터 나온다. 셋째, 잘 어울리는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돕는 배필이다. 넷째, 가정이라는 사회는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고독의 불만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선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선한 마음과 교제할 수 있는 좋은 아내를 두고 있으면서도 대화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자는 낙원에서도 편치 못하고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4. 피조물들이 사람에게 복종하고 사람이 그들을 지배함(19,20)
하나님은 이같이 사람에게 내려 주신 공정한 재산에 대해서는 그 점유권을 허락해 주셨으며 또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지배권도 그에게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셔서 그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한 이름을 짓게 하셨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그는 이성과 언어의 능력을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자기의 지식을 확증할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능력을 확증할 수 있었다.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권위 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낮과 밤에, 궁창과 땅에 그리고 바다에 각각 이름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 모든 것들의 최고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별들의 각기 그 이름대로 부르셨다’. 그러나 짐승과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작은 주인격인 아담으로 하여금 짓게 하시고자 남겨 두셨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므로 또한 그에게 자기 영광의 일부도 주시고자 하기 위함인 것이다.
5. 피조물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에는 불충분함(20)
그러나 그 모든 짐승들 가운데에는 아담을 돕는 배필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 본성의 존엄성과 탁월성, 둘째, 이 세상과 세상 것들의 헛됨: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모아 놓을지라도 거기에서 사람을 돕는 배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고 그 필요를 공급해 주지도 못하며 그 정당한 욕구를 채워 주지도 못하고 영혼이 영원히 지속하듯이 지속하지도 못할 것이다.
Ⅵ. 결혼을 제정하심 2;21-25
1. 아담을 위한 돕는 배필이 되도록 여자를 만드심(21)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어졌다(딤전 2:13).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는 면류관, 곧 그녀의 남편의 면류관이요 보이는 피조계의 면류관이다. 남자는 흙으로 다듬어진 존재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 흙이 두 번 다듬어진 존재로서 흙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존재였다. 둘째, 아담은 그의 아내가 만들어지는 동안에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일을 자기를 지으신 자의 뜻과 지혜에 기쁘게 내어 맡기고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염려를 맡긴 자로서 잠을 잤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때에 그 기뻐하시는 자를 위하여 준비하시게 하라.
셋째,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시되 그가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리하여 옆구리를 가르는 고통을 모르게 하셨다. 이같이 그가 아직 죄를 모르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셨던 것이다. 넷째, 여자는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그녀를 그의 머리에서 취하시지 않으므로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의 발에서 취하시지 않으므로 그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옆구리에서 취하시므로 그와 동등하게 하시고 그의 팔 아래서 취하시므로 그의 보호를 받고 그의 가슴 근처에서 취하시므로 그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
2.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결혼시키심(22,23)
결혼은 명예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수 성사시킨 이 결혼이야말로 이제까지 있었던 어떠한 결혼보다도 명예스러운 것이었다. 결혼은 하늘이 짝지어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며 친히 이들을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들을 둘로 만드셨다가 이제는 그가 정하신 의식으로써 그들을 ‘하나로’만드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자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녀를 남자의 분신으로서 또한 그의 배필로서 남자에게 데리고 오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지으심 받고 특별한 섭리 가운데 남자에게로 이끌려 온 아내는 남자에게 좋은 배필이 될 것이다. 둘째, 아담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그녀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받되 그 선물들을 우리에게 적합하시게 하는 그의 지혜와, 그 선물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은총을 감사히 인정하며 받아야 한다. 아담은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표로써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그것은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성을 표시하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즉 ‘그녀를 여자라 칭하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성에 있어서만 여자가 남자와 다를 뿐이며 그 본질에서는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결혼을 법으로 제정하심(24)
안식일과 결혼은 죄가 없는 상태 가운데서 제정된 두 의식이었다. 전자는 교회의 보존을 위하고 후자는 인류 세계의 보존을 위한 의식이다. 마태복음 19:4,5을 보면, 여기에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음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법의 효력은 참으로 크다. 그 법의 결속력은 자연의 결속력 보다 훨씬 더 강하다.
둘째, 자녀들이 결혼에 있어서 부모의 동의를 얻는 일은 참으로 필요하다. 셋째, 그처럼 가깝고 오래 동안 지속될 관계를 위한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신중함과 기도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 넷째, 결혼의 결속은 여러 아내를 둠으로써(말 2:15) 나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 되며 이혼으로 파괴되어서도 안된다. 이혼은 음행이나 처자 불법 유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서로가 한 몸인 만큼(엡 5:28)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한다.
4. 우리의 조상들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순결과 무죄의 상태에 대한 증거(25)
그들은 둘 다 벌거벗었다. 그들에게는 추위나 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옷이 필요 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체면을 차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람역에 의하면 ‘그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다.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전혀 없었으므로 비록 몸에 옷을 걸치지 않았을 지라도 그들에게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