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장 복음 설교문은 유다 백성을 하나님이 심판하는데 금식과 예배를 통해서 회개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 유다 백성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한다.
Ⅰ. 심판의 위협 2:1-1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과 다투시며 또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신 28:42). “네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라.”
(1) 전쟁이 선포된다(1절).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시판이 임박했음을 통지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기도와 눈물로 자기들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제사장들의 직무였다(민 10:8). 그들은 환난을 당하여 하느님께 호소하거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도록 해야 할 경우에 나팔을 불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죄의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야말로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2) 여기에서는 아주 가까이 다가온 전쟁의 날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 묘사되어 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 곧 그의 심판의 날이며 ‘어둡고 캄캄한 날'(2절)이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메뚜기와 황충의 수가 너무 많아서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출 10:15). 그리고 이 날의 어두움은 새벽 빛처럼 갑작스럽고 불가항력적으로 임할 것이다.
(3) 군대가 정렬되어 있다(2절). 그들은 ‘많고 강한 백성’이다. 이 군대는 여기엣 매우 담대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모양은 말과 같다. 그리고 그들은 질풍 노도처럼 내달리는 기병과 같다(4절). 고대의 교부 중에는 메뚜기의 머리가 말의 머리 모양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들은 매우 큰 소리를 낸다. 즉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거친 땅을 맹렬하게 달릴 때 나는 ‘병거 소리’와 같이 요란하게 들린다(5절). 그 소리는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같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는 큰 소리가 동반된다. 그들은 매우 질서정연해서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5절).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며(7,8절).
(4) 이 강한 군대는 가공할 만한 일을 수행한다.
1) 그들이 들판에서 행한 일(3절) : 그들이 훑고 지나간 들판을 보라. 그 들판들은 ‘황무한 들’같이 되었다.
2) 그들이 성에서 자행한 일 : 그들은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7절) ‘성 위에 달리며 도적 같이 창을 들어갈’것이다(9절).
(5) 그들이 백성들에게 준 인상은, 불사신과 같아서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8절). “어떤 사람은 자기의 밭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포도원 때문에 고통을 당하리니 모든 무리의 낯빛이 하얘지리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노하시면 하늘의 빛도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지 못할 것이라.
(6) 이 강한 군대의 사령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11절). 이 점이 바로 여호와의 날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Ⅱ. 회개의 권면 2:12-1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음으로써 우리를 회개시키고 그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신다. 본문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가 언급되고 있다.
(1) 개인적인 회개가 촉구되고 있다. 이 회개는 영적인 회개를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악행을 고치고 그 죄를 슬퍼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 잘못은 완전하게 고쳐지게 되는 것이다.
1) 회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항상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①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진실로 겸손해야 한다. 곧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에 대하여 사죄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해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슬픔과 수치심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현들 곧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슬픔을 나타내는 그 외적인 표현들은 내적인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외적인 표현 뒤에 다음의 말씀이 수반되고 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마음을 찢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다'(시 51:17).
②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로 철저하게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죄와 다투게 될 때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내게로 돌아오라(12절). 너희는…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3절).
2) 이처럼 이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사용된 여러 가지 논지들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선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처벌함에 있어서 정당하고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심에 있어서도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고 죄인의 마음이 변화될 때 그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방법이 변화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판결은 번복되고 율법의 저주는 제거된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죄를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와 화해하시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갖가지 고난까지도 제거해 주실지는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만 가지고는 우리는 충분히 회개할 만하지 않은가.
(2) 그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국가적인 운동으로서 범국민적으로 공식적인 회개를 하도록 촉구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주변국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긍휼을 다시 받기 위하여 어떤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회도 함께 열도록 요구되었다(15,16절). 전에는 전쟁을 경보하기 위하여 나팔을 불었지만(1절) 이제는 평화조약을 맺기 위하여 나팔을 불어야 한다. 1:14에서 언급된 내용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곧 “미리 엄숙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하라. 아무리 큰 자라도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장로들과 재판장들과 관원들은 모두 모으라. 또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간과하지 말고 소아와 젖먹는 자들을 모두 모으라.” 재난과 죄로 인하여 발생하는 공적인 슬픔을 사적인 기쁨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그 성회를 관장하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입이 되며 하나님께는 백성의 입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또한 ‘낭실과 단’ 사이에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조상 야곱과 같이 울며 씨름하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이 경건한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탄원을 해야 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저희를 조롱하거나 비방거리로 삼지 않게 하소서. 결단코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가난하고 거지 같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소서.”
Ⅲ. 회개로 인한 자비의 약속 2:18-27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셨는지를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믿음을 지닌 기도자들에게는 실제적인 응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1) 약속하는 긍휼을 어디에서부터 베푸시는가(18절).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는 그들의 빼앗긴 위로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2) 그의 긍휼하심에 대한 몇 가지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파괴적인 군대가 흩어지고 패주할 것이다(20절). 내가 북편 군대를(곧 북쪽에서부터 너희를 침입한 메뚜기와 황충의 군대들)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이 곤충들의 무리는 그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성서 해석자들은 이 북편 군대를 산헤립의 군대로 이해하고 있다. 산헤립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셨을 때'(사 10:12) 흩어지고 말았다.
‘들의 풀’ 곧 황무할 정도로 메뚜기가 먹어 없앴던 들의 풀이 다시 싹을 내고 나무들 특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시 열매를 맺는다고 약속되어 있다(22절).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양을 때에 맞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3,4월까지도 늦은 비를 주신다(23절). 그들은 손실되었던 것들을 모두 보상받을 것이다(25절). 내가…메뚜기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너희가 고난을 받았던 시간에 따라 위로를 받고 기근의 햇수를 보상받고도 남을 정도의 풍년의 햇수를 누리리라.”
그들이 저장해 놓은 것을 자세히 살펴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그러나 그들이 환난을 당하던 날에는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곳간이 무너졌었다(욜 1:10,17). 어떤 성서 해석자는 이 약속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여 이 약속이 복음적인 은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을 주시고 그 배경이 되는 은혜를 주시며 이 모든 것의 장본인인 성령을 보내신 것은 이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곧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을(이 19절의 약속에 따라) 주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하나님께서 다시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어떻게 이용되는가.
1)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23절). 우상들을 찬양하지 않고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를 ‘연애하는 자들이 준 값'(호 2:12)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 긍휼로 말미암아 위로와 영적인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들의 평판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19절).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열국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재난을 당하자 의기양양하여 이스라엘을 모욕했었다. 이러한 내용은 26,2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다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23절).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선한 일보다는 그들에게 베풀고 있는 선한 손길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될 거시다.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기쁨으로 종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풍족하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은사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의 가장 큰 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선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를 우리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확고해지며 증대될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 약속되어 있다(27절).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또한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네 가운데 거한 거룩한 자'(호 11:9)로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우리는, 자비롭거나 고통스러운 것이거나 간에 모든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켜 나가는 데에 온갖 노력을 다 쏟아야 한다.
Ⅳ.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 2:28-32
곡식고 새 포도주와 기름에 대한 약속은 황폐한 나라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 속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본문에는 더 좋은 것들 곧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은혜의 왕국은 성령이 풍부하게 부어지는 상태로 도래할 것이다(28,29절).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행 2:1이하)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했을 때 그것이 바로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행 2:16,17)이라고 함으로써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우리는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기 위하여 세우신 사사들과 선지자들에게만 주의 신이 강림하는 내용을 자주 대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 성령은 약속된 바와 같이(사 44:3) 차고 넘칠 정도로 풍부하게 베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하여 정해진 때는 ‘그 후’이다.
즉 먼저 주어진 약속들이 이행되고 나서 이 약속이 이행될 것이다. 성령은 또한 모든 육체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곧 성령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기 때문이다(롬 10:11,12).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육체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시도 이방인이었던(행 10:44,45)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에게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것이 이방인들의 육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성령은 오순절날 임했던 성령의 용사와 같은 것이었다.
“원기를 잃고 정신력이 감퇴되기 시작하는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아직 거룩한 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꿈과 이상을 통하여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들은 또한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일들을 새로 알게 되어 그들 자신 뿐 아니라 교회에도 유익을 줄 것이다. 그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먼 곳의 일이나 미래의 일에 대해 예언할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지고 성서가 기록되며 말씀 사역이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성령의 특별 은사 때문이다.
(2) 영광의 왕국은 자연계의 변화로 시작될 것이다(30,31절). 의인은 성령을 부음받아 큰 위로를 누리지만 불의한 자는 이것을 듣고 떨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세상이 끝날 때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그리스도가 죽을 때 땅이 흔들리고 해가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불리고 있다)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은 일반적인 심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죄로 가득찬 세상에 대한 하남의 심판과, 악한 왕국들이 종종 불과 칼로 멸망을 당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세사의 심판에 대한 전조가 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때에 모든 참신도들은 안전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32절). 참 신도는 특별히 개개의 신도들을 언급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보다 개개의 신도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왕국과 열방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여호와의 날이 크고 두려울지라도 시온산과 예루살렘은 그날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구원”그 자체이시다. 그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와 같은 신분으로 존재할 것이다.
은혜의 언약 중에 우리를 위하여 마련된 이 구원은, 믿음의 선조들과 맺어진 약속에 대한 실행인 것이다(참조. 눅 1:72). 이 구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으며 또 그들을 위하여 구원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진다. 그 구원은 곧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골 1:27).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를 알고 그를 믿으며 그를 바라고 그에게 의지하며 양심적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한 전제가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어도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