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장 예수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한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의 심령에 복음 말씀에 임할 때 우리는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Ⅰ. 씨 뿌리는 비유 4:1-20
3장은 그리스도가 회당에 들어가시는(막 3;1) 내용부터 시작했지만 4장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1절) 내용부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서 그의 영향을 받도록 방법을 변화시켜 전에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편리한 방법을 새로이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옴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11절).
1. 그리스도가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1,2)
그는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이 비유는 그들이 그의 가르침을 잘 듣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듣기를 좋아하며 또 무관심한 청중들은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인용한 평범한 비유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비유 속에 담긴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그 비유는 그들을 즐겁게 해줄뿐이며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12절) 할 것이다. 그들은 빛에 대항하여 고의로 그들의 눈을 감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빛을 앞만 비추는 초롱의 비유로 나타내셨다. 그런데 그 비유는 그 비유를 자신의 생활에 적용한 사람들에겐 밝은면을 주지만 그 비유를 잠시동안만 실행하려는 사람들에겐 이따금씩 스쳐가는 빛에 지나지 않게 되어 그들은 어둠속으로 내쫓기고 말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려고 사용했던 방법 (3-2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고자 하는 기회를 얻었다(10절).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특별한 은혜라고 했다(11절). 다른 사람들은 비유의 말씀을 듣고 즐길 뿐이지만 그들에겐 그 비유가 교훈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다’고 한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과 그 빛을 볼 수 있는 시력을 받아야 한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이 비유는 마태복음 13:3이하에서 본 바 있다. 그리스도는 들으라(3절)는 말부터 시작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비록 우리가 잘 이해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해도 우리는 그 말씀을 주의깊게 경청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심 : 그리스도께서 그 비유를 설명하기 전에 제자에게 하신 질문이 있는데 이 질문은 마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13절). 이 질문은 “너희가 이렇게 평범한 비유도 모른다면 이보다 더 알기 어려운 다른 비유들을 너희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라는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비유의 뜻을 알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게 한다. 우리가 만일 복음의 평범한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어려운 진리들을 습득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비유는 독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말씀으로 감동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만일 너희가 이 비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희는 모든 나머지 비유의 비밀을 푸는 열쇠의 사용법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유를 설명하기 전에 다음 같은 사실들을 나타내셨다.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의 의미를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지적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그렇지 않다’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누리는 그런 특권을 원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상태를 생각할 때 그 특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함'(12절)이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인한다. 오직 회개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죄사함을 받게 된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기에게서 들었던 말씀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고 아주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전에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보았던 대로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주신다. 그럼 여기서 이것을 조목별로 살펴 보자.
첫째, 교회라는 큰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자들에게 차별없이 전해진다. 따라서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14절)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말씀의 씨앗이 어디에서 싹틀지, 또 어떤 열매를 맺을지 모르기 때문에 모험을 하면서 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씨를 뿌린다. 예수께서도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심으로써 얼마 동안은 몸소 씨를 뿌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그들의 손을 통해 씨를 뿌린다.
둘째, 복음에 대한 말씀을 들은 사람은 비교적 많지만 그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그것을 영접한 사람은 거의 없다. 선한 결실을 내는 자들은 단지 사분의 일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귀중한 씨앗이 얼마나 많이 소실되며 헛되이 뿌려지는지를 생각할 때 슬픈 마음이 들지만 소실된 말씀을 책임져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셋째, 현재로서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그들 속에 머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들의 영적 반응은 자기들이 들은 말에 응답할 정도로서 아궁이 밑에서 타고 있는 가시나무들이 ‘탁탁’소리를 내는 것같은 단순한 순간적 반응에 불과하다. 여기서 돌밭으로 묘사된 사람들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나'(16절) 아무런 결실도 내지 못했다.
넷째, 왜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 속에 머물러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가. 그 과실은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이지 말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들을 때 부주의하여 그 말씀을 잊어버리기 쉬운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말씀을 통해 전혀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한 쪽 귀로 흘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타락이 믿음을 압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끼친 좋은 인상을 놓쳐버리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 속에 머물지 못하여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다섯째, 공중에 나는 새들이 땅 위에 떨어진 씨를 얻으려고 돌아 다니는 것처럼 귀신도 청중들이 산만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는 일로 몹시 분주하다. ‘새들’처럼 귀신이 순식간에 와서 우리가 알기도 전에 말씀을 가지고 가 버린다. 우리는 귀신들이 우리 머리 위에서 배회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해선 안된다.
여섯째, 자기의 신앙고백을 떨쳐버릴 만큼 공공연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돌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의 효력을 기쁨으로 받지만 자기도 모르게 숨어 질식해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결실도 내지 못한다.
일곱째, 뿌리가 깊지 않은 인상들은 오래 남지 않는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자기의 신앙고백을 잃고만다. 이것은 단지 쾌락만을 위해서 바다로 간 사람들이 바다에 바람이 생기면 되돌아 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들은 말씀의 ;뿌리가 없어’ 멸망하게 된다. 그들이 살아있는 확고한 원리로부터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여덟째, 많은 사람들이 너무 세상 일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 그들은, 소유하기 쉬울 뿐 아니라 그들을 미소로써 유혹하는 세상 일에 더 만족하기 때문에 많은 좋은 교훈들을 따르 기회가 없어서 그것들을 잃고 만다.
아홉째, 세상 일을 염려하고 재리를 얻기 위해 남을 속이고도 번민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타 욕심’이 들어 와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얻는 유익을 잃게 될 것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기타 욕심’은 마가복음에만 첨가된 내용으로서 감각적이며 공상적인 적을 만족시키는 것들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나타낸다. 세상일에 대한 욕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라도 육신의 일에 탐닉하면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
열째, 하나님이 복음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결실이다. 그런데 이 결실은 씨를 뿌려 얻은 결실인데, 이것은 복음에 일치될 수 있는 성품과 생활 방식을 말한다. 이것이 결실이며 이 결실은 우리의 이익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결실은 씨를 잘 뿌려야만 기대할 수 있다. 만일 그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다면 즉 심령이 겸손하고 경건하며 거룩하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며 그 결실은 때로는 백배까지 맺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4:21-34
(1) 선한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21, 22절). 이 말은 곧 결실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준 선물에 대해 우리가 감사히 답례하고 또 우리가 받은 그 선물을 유용하게 쓸 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21절)고 물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은혜를 받았듯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은사와 은혜는 사람을 ‘등불’과 같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것은 ‘의로운 해'(말 4:2)와 비교된 희미한 빛을 지닌 등불이다. 등불은 빛을 낸다 해도 적은 범위에 불과하며 그것도 잠간 동안만 비취게 된다.
그리고 그 등불은 쉽사리 바람에 꺼지며 기름이 떨어짐에 따라 불빛이 계속해서 희미해져 간다. 그런데 등불처럼 불붙여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몸소 드러내지도 않으며 남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지도 못하게 된다. 단지 속에 놓인 작은 촛불처럼 그들은 자기 자신들 만을 위해 등불을 사용한다. 등불처럼 불붙여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이 비유를 든 이유는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기'(22절) 때문이다. 은사와 은혜의 보물은 서로 교제를 나누기 위한 계획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도 사도들만 은밀히 알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온 사방으로 퍼져서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 비유들을 제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대중 앞에서 그 비유들을 더욱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국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2)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듣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잘 사용할 필요가 있다(23-25절). 그래서 그리스도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절)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서 그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24절) 너희가 듣는 것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즉 “너희가 듣는 바를 숙고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에 비로소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특히 남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몸소 준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든 것을 시험하여 선한 것을 파악하도록 우리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듯 하나님도 우리를 다음과 같이 대하신다. 곧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24절). 우리가 우리에게 부여된 달란트를 활용하는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달란트를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사용하면 그 지식은 주식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듯이 두드러지게 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말씀을 듣는 너희는(24절 하반절에 포함된 이 말은 헬라어 성경과 한글 개역판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라틴어 성경과 K.J.V에는 기록되에 있음)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25절). 은사와 은혜는 실행되어야 증가한다.
만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5절). 달란트를 묻어두는 행위는 그것을 맡긴 분의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이윤마저 손해본 행위가 된다. 그리고 은사와 은혜는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서 쓸모없게 된다.
(3) 세상과 심령 속에 뿌려진 좋은 복음의 씨는 점차적으로 어떤 소란도 없이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26-29절).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26절).
1) 뿌려진 씨가 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씨가 흙 속에 묻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흙을 뚫고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땅에 뿌려진 씨는 싹을 내게 될 것이다. 들판에 곡식을 뿌린 뒤 얼마가 지나야 들판의 모습이 변할까! 들판이 초록색으로 뒤덮일 때 그 들판은 얼마나 화사하고 쾌활하게 보이는가!
2) 농부는 씨가 어떻게 싹을 내는지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 가운데 하나다. 농부는 ‘씨가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27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 이는 마치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분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 외에는 그 바람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나서 싹을 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밤낮 자고 깨면서도 자기가 뿌린 곡식을 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성장법칙에 따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은혜의 말씀은 그 말씀이 믿음으로 영접되었을 때 우리의 심령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이룬다.
4) 뿌린 씨는 점차 성장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절). 씨에서 싹이 나오면 그 싹은 계속해서 자라게 된다. 그것은 자연 속에 성장법칙이 있어서 싹을 계속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은혜도 이런 법칙에 따라 커간다. 그리스도의 관심은 언제나 성장에 따른 관심이므로 처음의 관심은 적지만 나중의 관심은 매우 커진다. 처음에는 싹이 나도 서리 때문에 얼어붙거나 밭에 밟혀 짓눌릴 정도로 연약한 싹에 불과 하지만 이 싹이 점점 자라서 이삭이 되고 마침내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리없이 은밀하게 자신의 일을 하시지만 놀라운 힘으로 어김없이 하신다.
5) 뿌린 씨가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는'(29절)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혼 속에 자리잡고 역사하는 복음의 열매를 추수 때에 거두신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다 자라면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30)한 것처럼 거두어들일 추수 때가 온다.
(4) 은혜의 역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미약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크고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30-34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어떻게 해야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이해시킬꼬?”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그리스도는 전에 하나님 나라를 씨 뿌리는 것에 비유했지만 여기서는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다.
1) 복음왕국의 시작은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겨자씨처럼 작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도 처음에는 단지 ‘작은 일의 날'(슥 4:10)과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왕상 18:44)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도하여 여러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과 같은 큰 일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적은 사람들에 의해 수행된 적이 결코 없었다.
2) 복음왕국의 성취는 매우 클 것이다.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32절). 세상에 있는 복음왕국은 크게 확장되어 땅 끝까지 퍼질 것이다. 겨자씨 한 알과 큰 나무 사이의 차이는 세상의 개종한 초신자와 하늘의 영화롭게 된 성도 사이의 차이와 비교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33절). 그는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친근한 것들로부터 그의 비유들을 인용했다.
훗날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들을 생각해 냈을 만큼 그의 표현방법은 쉬웠다. 그러나 한동안 그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34절). 제자들 자신들은 후에 그리스도가 하신 비유들을 이해했으나 처음에는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이 비유들을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해석하여’ 주셨다(34절).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것처럼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싶어하지 않을 수 없다.
Ⅲ. 광풍을 잠잠케 하심 4:35-41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광풍을 잠잠케 하신 이 기적은 우리가 전에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서 살펴 본 바 있다. 그러나 이 기적은 마가복음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1) 이 기적은 ‘그날 저물 때에'(35절) 일어났다. 그가 온종일 말씀을 가르치면서 세상에서 수고하고 있었을 때 그는 휴식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다.
(2) 그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저물 때에 바다로 건너가고자 제안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 그리스도께서 이런 제안을 하신 이유는 그곳에서 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는 데 열심이셨기 때문에 그의 길에 어떤 어려움이 놓여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3) 저희가 무리를 다 보내기까지는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즉 그들은 모든 무리들의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섬겼던 것이 헛되다고 불평하며 돌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4) 그가 저물어서 바다로 나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몸에 걸칠 외투도 없이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의 몸에 신중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배울 수 있다.
(5) 광풍이 너무 불어서 배는 물로 가득찼다. 배가 아주 작았기 때문에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였다'(37절).
(6)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그 배들도 걱정과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다로 가셨을 때 무리가 떠나갔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바다로 나갔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도 비록 광풍이 몰아칠 것을 예견한다 해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꺼이 담대하게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7) 그리스도는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잠들어 계셨다. 본문 말씀 가운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셨다’고 했는데 이 고물은 선장의 자리로써 배의 후미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 즉 그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또 그들이 기도하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주무시고 계셨다. 그 시험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은 약했으나 그들의 기도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간혹 교회 안에서 광풍이 몰아칠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자기 백성들의 문제에 무관심하며 그들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주무신다고 하여 그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무시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기'(시 121:3,4) 때문이다. 그는 주무시더라도 그의 마음은 깨어 있는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 때문에 위로를 얻었으며 다른 노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노를 이용하여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을 열심히 젓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안심했다. 이같이 제 아무리 심하게 흔들린다 해도 그리스도를 태운 배는 가라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깨웠다. 그리스도께서는 광풍 속에서도 주무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듣고 깨어 계시다. 우리가 구세주를 모시고 있는 동안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처한다 해도 우리는 신앙적인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한 말의 표현은 매우 단호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사실 이 말은 좀 거치른 것 같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잠에서 깨기를 간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무시고 있는 것을 꾸짖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하는 말도 모를 만큼 그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했던 걱정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 외에는 그들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가 걱정 속에 빠져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9) 그리스도께서 광풍을 꾸짖던 명령의 말씀이 마태복음에선 없었지만 이 마가복음에는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39절). 즉 잠잠하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바람이 더 이상 큰 소리 내지 않고 바다가 더 이상 격분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 소리는 사람을 위협하며 놀라게 한다. 소리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광풍을 꾸짖던 명령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1) 우리에 대한 명령의 말씀이다. 우리의 악한 마음이 능히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 바다와 같을 때(사 57:20)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신 자신의 계명을 듣도록 하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경솔하게 말하지도 말라. 오직 ‘잠잠하라.’ (2) 그리스도께서 광풍을 꾸짖던 명령의 말씀은 우리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다. 고난의 광풍이 아무리 요란하고 아무리 강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고난의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실 수 있다. 바다를 만드신 분은 바다를 조용하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10)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일로 제자들을 책망했는데 이 책망이 마태복음보다 마가복음에서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선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마 8:26)라고만 표현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로 표현되었다. 또한 마태복음에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했지만 마가복음에선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절)고 하였다. 물론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에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므로 그들은 믿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때 믿지 않았다. 그것도 마치 자신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이 멸망해도 돌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앙까지 의심할 수 있다.
(11) 이 기적이 제자들에게 준 인상은 이 마가복음에는 달리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선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41절)로 표현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선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로 표현되었다. 이제 신앙에 의하여 그들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들이 바람과 바다를 두려워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품었어야 했을 존경심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에게 베푼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바람과 바다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폭풍 가운데 나타난 창조주의 능력과 진노를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은 고뇌와 놀라움이 내포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평온한 구속자의 권능과 은혜를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은 기쁨과 만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놀라움을 표현하면서 그리스도는 분명 사람보다 능력이 많으심 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