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하나님 말씀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베드로가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는 세계로 디아스포라 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다. 세상의 환난 중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한다.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Ⅰ. 수신자들에 대한 언급과 인사말 1:1,2
1. 본 서신의 저자(1)
〔1〕이름으로서의 베드로라고 언급되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의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서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라는 별칭을 주셨다.
〔2〕직책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언급되어 있다. 사도란 기독교 안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1) 베드로는 그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진 체 하는 것은 위선이다. 아울러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은혜를 잊는 태도이다. (2) 그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그의 정당한 이유와 의무로서 그의 사도적 기능을 언급하고 있다.
2. 수신자들에 대한 언급(1,2)
〔1〕그들의 외적 상태로 언급함: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1절). 현재 그들의 형편은 가난했으며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종들을 고초를 겪었던 동안에 자기들의 본토를 떠나 사방에 흩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선한 사람들의 가치는 결코 그들의 현재의 외적 상태에 의해서 평가 되어져서는 안된다.
〔2〕그들의 영적 상태로 언급함.
1) 여기서 베드로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 이라고 부른다. 선택함은 직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특별한 특권들을 누리는 것이나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선택에 대하여 살펴 보자. ① 이 선택은 ‘ 하나님의 미리아심을 따라’ 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리 아심’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첫째, 단순한 예지, 통찰, 혹은 이해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식별력을 뜻한다. 이는 마치 수학자가 일·월식이 있게 될 때를 확실히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예지가 결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한 동기가 되지는 못한다.
둘째, ‘미리 아심’은 때때로 계획, 정하심, 승낙 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예견되었을 뿐 아니라 20절에 나타나는데로 미리 정하여졌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본문에 적용시켜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획, 정하심, 그리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②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는 말에 아버지라는 말이 덧붙혀져 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에 있어서 선택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며, 화목케 하심은 아들이, 그리고, 거룩하게 하심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2)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모든 선택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하심을 받아야 하며 예수의 피에 의해서 의롭게 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성화는 순종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의무를 하나님 앞에서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곧 성령이시다. 순종함과. 이 낱말은 패역한 죄인들을 다시 순종 가운데로 가져 다 주기 위한 성화의 목적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22절의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3)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여기에 율법 아래에서의 전형적인 피 뿌림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나타나 있다. 숭고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충족케 한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는 흘려졌을 뿐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또한 뿌려져야만 하며 전달되어져야만 한다. 영생의 목적으로 택하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또한 순종이라는 방법으로 택하심을 받았다. 만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피 뿌림을 엊지 못 한다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참된 순종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인사말(2)
베드로가 그들에게 바란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었다. 은혜란 곧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그것의 모든 특유한 효력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강이란 온갖 종류의 평강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한 평강, 즉 우리 자신의 양심으로 느끼는 평강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축복들과 관련한 베드로의 기도 혹은 간구는 그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것들이 그들에게 계속되고 증가되고 온전케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곧 은혜와 평강이며 그것들의 증가이다. 참된 은혜가 없는 것에는 결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먼저는 은혜이고 그 다음이 평강이다. 은혜 없는 평강은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잠시 동안 실제적인 평강이 없는 곳일지라도 은혜는 진실로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때 고뇌 가운데 계셨었다. 은혜와 평강이 처음 주어질 때 뿐 아니라 그것들이 증가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Ⅱ. 거듭남으로써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에 감사함 1:3-5
〔1〕이어서 베드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간다.
1) 수행되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찬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묘사되어지고 있다. 즉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 분에 대해서 그의 세 직무를 나타내는 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즉 우주적인 왕으로서 주라고 했고, 제사장 혹은 구주로서 예수라고 했으며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특별히 그 사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결과인 뛰어난 산 소망의 은총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소망은 산 소망일 뿐 아니라 영속적인 소망으로서 견고한 기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나쁜 상황에 처하여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봉사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받아들여지겠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상의 축복들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 때문으로 여긴다. 세상의 모든 악은 사람의 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지만 모든 선은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듭남은 영생의 산 소망을 낳는다. 새롭게 영적 출생을 한 자들은 새롭게 영적 소망으로 출생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산 소망이 라고 하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생의 소망은 그 사람을 살아있게 해주며, 일깨워 주고, 붙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는 소망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의 거짓된 소망은 헛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헛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함께 소멸되며 없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초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양떼들간의 뗄 수 없는 연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양떼된 자들은 머리되신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된다.
〔2〕베드로는 기업이라는 말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얻게 될 생명을 묘사해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잃었던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좋은 새 기업으로 그들이 거듭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에 예비된 고귀한 기업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1) 의심할 바 없이 하늘나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기업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은사들을 주시지만 기업은 오직 자녀에게만 주신다. 이 기업은 우리가 값 주고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아버지의 선물인 것이다. 즉 우리의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2) 이 기업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 그 기업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 점에 있어서는 그 조성자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 부패란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변화도 없고 끝도 없다. 즉 하늘에 있는 장막은 영원한 것이다. 이 기업은 더럽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는 죄와 비참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쇠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또한 그 기업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 그것은 저 세상에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다. 그 기업이 누구를 위해서 간직되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특성에 의해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은 ‘산 소망을 얻도록 거듭난 자들’인 것이다.
〔3〕베드로는 그들이 도중에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의혹과 불안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온갖 해로운 시험들로부터 그들이 보호하심을 받게 되었다고 대답하고 있다.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자들은 틀림없이 안전하게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약속받은 축복은 곧 보호하심이다. 너희가…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리고 그 보호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보호하심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는 수단은 곧 우리 자신의 믿음과 주의이다.
또한 우리가 보호하심을 받는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의 끝과 결말을 확실히 보게 될 때는 말세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현 상태는 위험과 구원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정복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생한 자들이 영생에까지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하심을 입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람의 노력과 주의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은혜의 상태를 거쳐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특효약이다.
이 구원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것’이다. 즉 구원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으며 간직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은 비록 예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현재에는 여전히 구원을 기업으로 받게 될 사람들에게조차 상당히 감추어져 있으며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말세에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 생명과 불멸이 복음에 의해서 이제 빛 가운데 드러났다. 그러나 이 생명은 임종시에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이며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Ⅲ. 구원으로 인한 기쁨 1:6-9
그러므로. 사도는 ‘그러므로’라고 말함으로써 성도들의 현재 상태의 탁월함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숭고한 기대에 관하여 자신이 앞서 말한 내용을 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6절).
〔1〕근심 가운데 있던 성도들을 안심케 하는 것들이 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크게 기뻐 할만한 어떤 일을 항상 가지고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의 주된 기쁨은 크게 가치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보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많은 시험들로 인해서 큰 시험이며 시련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처럼 하나로 오지 않고 여러 가지가 제각기 다른 측면에서 오게 되며 그 결과 큰 낙심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의 환난과 근심은 잠시일 뿐이다. 환난이 잠간이라는 사실은 그것으로 인한 낙담을 훨씬 줄게 한다. 큰 낙심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유익에 필요하기도 하다. ‘너희가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히시지 않으시며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사려를 가지시고 행하신다. 낙심케 하는 이 고난들은 필요할 때 외에는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결코 오래 머물지도 아니한다.
〔2〕베드로는 성도들의 환난의 목적과 그 환난 아래서 그들이 기뻐하게 되는 근거를 말해 간다(7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환난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파멸케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해서이다. 이 시련은 주로 믿음에 대해서 있어지는데 이는 이 믿음의 시련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모든 것의 시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만일 믿음이 서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도 굳게 서게 될 것이다.
연단받은 믿음은 금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여기에 믿음과 금이 동시에 비교되고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목 중에서 믿음이 그러하다. 즉 그것은 영혼이 하늘나라에 이르게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연단은 금의 연단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 받으므로 증가되거나 더해지지 않으며 오히려 줄어든다. 그러나 믿음은 많은 환난에 부딪침으로 굳게 서게 되며 더욱 증가된다. 금은 결국엔 없어지게 된다. 없어질 금이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믿음의 시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 만일 연단받은 믿음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하는 것이라면 비록 환난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시련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금보다 귀한 것이니만큼 이 믿음을 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 시련은 곧 끝나게 될 것이며 영광과 존귀와 칭찬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3〕베드로는 특별히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의 탁월하심: 그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이다(8절).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는 것과(이는 마귀들도 믿는 바이다) 그를 인격적으로 믿는 것과는 별개이다.
2) 사랑과 기쁨이라고 하는 그들의 믿음의 두 귀중한 산물 혹은 결과: 특히 이 기쁨은 위에 표현되어 있는대로 매우 큰 것이다.
① 감각은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현재적인 것과 친숙하며 이성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한층 높이 올라간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② 참된 믿음은 결코 믿음 자체로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는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으므로 그에 대해 신실한 사랑을 가진다.
③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있다. 그것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최상의 발견은 그것을 경험함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영광의 충만, 곧 하늘나라의 영광의 충만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기쁨 가운데는 하늘 나라와 장래의 영광이 풍성히 들어있다. 그들의 믿음의 근심된 것들을 몰아내며 기뻐할만한 최상의 이유들을 가져다 준다. 이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매우 기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들이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9절). 그들이 받은 축복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여기서 믿음의 구원에서 끝이 나게 된다. 영혼의 구원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구한 상급이자 그들이 목표했던 것으로 그것은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더 가까와졌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매일 그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신자들은 거룩함과 하늘에 속한 마음을 소유함으로 하늘나라의 시작을 가졌다. 그들은 세상에서 잃어 버리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들이 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비록 그들이 보다 못한 유익은 잃고 있지만 그들은 시종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복락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만일 전자를 올바르게 구한다면 우리는 후자에도 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