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장 기도 말씀] 하나님 백성을 향한 회개기도(렘3:1-25)

예레미야 3장 기도 말씀은 하나님 백성을 향한 회개기도를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악을 저지르는 백성에게 심판하겠다고 예언했다. 남 유다 백성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답습하면서 죄를 짓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심판을 유보한다. 우리도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Ⅰ. 범죄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3:1-5

이 구절들은 소망의 문을 열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치유하시기 위해서 상하게도 하신다.

(1) 참으로 사악하게 이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히 행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낯선 신을 받아들이는 것만도 충분히 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릇된 예배에 대한 저희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였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1절). 그들은 우상을 숭배할 기회를 모색하며 새로운 샌들을 찾고자 하였다.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2절). 즉 그들은 고객을 유인하는 아라비아 상인들같이, 혹은 저희의 제물을 찾는 아라비아의 도적들같이 새로운 신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단지 저희 자신들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저희의 땅 또한 음란과 행악으로 더럽혔다(2절). 그것은 민족적인 죄가 되었다.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3절). 즉 “네가 철면피하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덕스러운 모습이며 적어도 미덕의 일면이다. 그러나 수치를 버린 자들은 소망을 버린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 참으로 부드럽게 견책하셨다. 그는 다만 그들에게서 단 비를 거두시고 늦은 비를 거두셨을 뿐이다. 다시 말하여 일년 중의 한 시기에 대해서만 견책하셨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셔도 그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잘 알려져 있던 이혼법에 따라서 그러하다(1절). 만일 어떤 여자가 한번 쫓겨난 후 다른 남자와 결합하면, 그 여자의 전 남편은 절대로 다시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할 수 없다고 법은 명하고 있다(신24:4). 만일 결혼의 유대 관계가 그와 같이 엄격했다가 느슨해졌다가 하면 그 규정은 심히 더럽혀질 것이며 그 땅도 크게 악해질 것이다.

(4)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스럽게도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초청하신다. “너희가 비록 악할지라도,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1절).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 앞에 세우신 인간들처럼 성급한 분개도 하지 않으신다. 그는 일찍이 어떤 남편이 간음한 그의 아내에게 취했던 태도보다 훨씬 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절하셨다. 그는 참으로 자비롭게도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려 주신다(4절).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너희는 너희의 죄를 보게 되었고(2절) 그 죄들로 인하여 벌받게 되었느니라(3절).

그러므로 그 죄를 버리고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2:7)라고 말하면서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그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세워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이다’라고 주장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불충한 행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면서 아버지되시는 그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다 보편적인 방법이 취해질 수도 있다. “아버지되시는 당신은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는 우리는 그가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 소시 때에 보호자이셨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이후로도 우리가 의무를 이행할 때에 보호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Ⅱ. 유다의 회개치 않음 3:6-11

이 설교가 행해진 것은 요시야왕 때이었다. 그때에 그는 충심으로, 복된 종교 개혁의 발판을 세웠으나 백성들은 그렇게 신실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이 여기에 비교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왕위와 예루살렘 성전에 반기를 든 열 족속이었으며, 유다는 다윗의 왕위와 예루살렘 성전이 귀속되어 있는 두 족속이었다.

(1) 이스라엘, 즉 열 족속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국가 양면에 있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제도를 배반함으로써 세워진 왕국이기 때문에 ‘배역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워진다.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6절). 즉, 그들은 산당과 숲에서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들을 청하고 격려하셨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7절). 그들은 버림받아 마땅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에게로 돌이키기 위하여, 오직 그만을 경배케 하기 위하여 저희 가운데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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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셨다기보다는 아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강조하신 것이다. 위대한 개혁가 엘리야도 그들에게 다윗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 숭배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다(7,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의 손에 내어 주셨다(8절). “내가 거기서 그들이 행음하는 모든 행위를 보고 그들을 내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노라.” 그는 그들의 모든 회당들과 선지자 학교들을 흩으시고,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에 대해 그들이 더 이상 어떤 주장을 내세울 수 없도록 언약을 폐기하심으로써 그들과 이혼하신 것이다.

(2) 두 족속의 왕국, 유다의 경우가 언급되고 있다. 유다는 ‘패역한 자매’로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야곱이라는 같은 줄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배역자의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유다도 패역자로 불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배역하였을 때 유다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겠다고 고백했다 해도(유다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들과 제사장들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유다 역시 패역하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은 유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의도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유다는 자신들에게는 제사장들이 될 레위인들과 왕들이 될 다윗의 아들들이 있으므로 안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유다는 그 당을 더럽혔고 하나님 앞에서 가증되이 여김받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과 나무로 더불어’, 즉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더러운 우상들로 더불어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므낫세와 아몬의 치세 아래서, 전 나라가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통치 아래서 선하게 되어질지 여부를 시험하셨다. 그러나 악한 성향은 여전하였다. 그 패역한 잠배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10절).

요시야 왕은 그의 선왕들 중 가장 훌륭한 자가 일찍이 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철저히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였다(왕하 23:25). 백성들도 겉으로는 그와 같이 행하도록 강요되었다(대하 34:32;35:17). 그러나 그들은 진실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바로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리라”(왕하 23:27)고 말씀하셨다. 진실함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3) 이 자매 관계에 있는 왕국들이 서로 비교되고 있으며, 둘 중에 유다가 더 사악하다고 말해진다(11절). 이 비교적인 의가 이스라엘을 더 유익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선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유다는 두 가지 측면에 있어서 이스라엘보다 더 악하였다.

1) 이스라엘에게서보다도 유다에게서 기대되는 바가 더 컸다. 그러나 유다는 이스라엘이 했던 것보다 더 신성한 고백을 저버려 그것을 비천하게 만들었으며, 더 엄숙한 약속을 어겨 거짓되이 만들었다.

2) 유다는 이스라엘의 파멸에 의해서 충분히 경고받을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Ⅲ.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 3:12-19

이 구절에는 놀라운 복음이 담겨 있다. 선지자는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던 앗수르로 사로잡혀 간 열 지파 곧,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외침이다. 이것은 또한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저희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응하지 않은 유다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다. 배역한 이스라엘이 패역한 유다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 빨리 받아들일 것이며, 그 은혜를 더 빨리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북쪽을 향하여 선포된 이 말씀은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알리는 것으로 보인다(눅 24:47).

(1) 여기에는 배역한 이스라엘과 배역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반역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이 있다(12절).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 오라. 그리고 또 다시 14절에서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너희가 버리고 간 선한 길로 돌아오라.” 그들은 돌아오라는 격려의 말씀을 받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느니라.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의 노를 너희에게 쏟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어떻게 돌아와야 할지 그 방법도 가르침받고 있다(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너의 허물을 인정하고 너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죄와 평화의 조건이 이처럼 낮추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그에게로 나아오려 하지 않는다면, 죄인들에 대한 정죄는 더욱 악화되어질 것이다. “선지자가 너희를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겠는가? 하물며 너희에게 이르기를 다만 너희 죄를 자복하라 함에랴”(왕하 5:13).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인해야만 한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에게 맞서며 범죄하여 왔음이라.” 우리는 우리의 죄가 많음을 자인하여야 한다. 네 길을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하고. “이리저리 우상들을 쫓아다녔도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도다.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너를 더욱 낮추어 겸손하라.”

(2) 만일 배역한 자녀들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주어질 귀중한 약속들이 서술되어 있다. 그 약속은 부분적으로는 유대 백성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 왔을 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복음 교회를 통하여, 그리하여 사방에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어진다. “돌아오라, 너희가 비록 배역하였을지라도 내 자식이며, 너희가 비록 패역한 아내일지라도 여전히 내 아내라. 이는 내가 너희와 혼인하였음이라(14절). 그 관계를 부인치 않을 것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저희 열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다(레 26:42).

1) 그는 흩어진 각처로부터 그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 11:52).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14절). 하나님을 배역한 많은 사람 가운데서 단지 소수만이 그에게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여 ‘성읍 중에서 하나, 그리고 나라 중에서 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거룩한 산, 시온 산, 거룩한 예루살렘, 즉 복음의 교회로 인도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복된 길로 인도할 자를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5절).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① 교회가 모였을 때, 그것은 반드시 통솔되어져야 한다. “내가 그들을 시온으로 데려오리니 거기서 그들은 야생 동물로서가 아니라 목자의 지시를 따르는 양으로서 훈련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목자를, 즉 행정관들과 목회자들 둘 다를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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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목자들을 가진 백성은 복되다. 그 목자들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저희의 규례로 삼고 그를 위하여 다스리며, 있는 힘을 다해 그와 같이 다스릴 것이다.

③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은 양떼를 훔치지 아니하며 지식과 명철로 양떼를 양육한다. 단지 목자들일 뿐만 아니라 교사들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양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언약궤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징표이었던 그것은 이제 치워질 것이었다(16절). 그들이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 즉 메시야의 왕국이 세워질 때에는 사람과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전한 영적인 예배 방식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로써 모든 의식법은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약 성경의 말씀과 성례전에서 우리에서 나타난 모든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이다.

복음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곧 언약궤이다. 그는 자비의 터이시다. 우리가 이제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 임재이다. 언약궤가 없어지는 것에 관해서 많은 표현이 본문 말씀에 사용되었다. 즉, 언약궤를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할 것이기 때문이다(요 4:24).

4) 하나님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복음의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17절).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그것을 유명하게 만들 것이다.

① 복음의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주재와 통치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좌, 곧 그의 영광과 통치와 은혜의 보좌로 불리워질 것이다.

② 이방인들이 거기에 받아들여진다. 열방이 그곳에 세워진 여호와 보좌에로 모이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다시는 그들의 약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법도에 따라,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이다. 무엇이 죄를 이끌고 있는지 보라. 그것은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상상이다. 죄는 그 마음의 생각과 기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은혜로 인하여 개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태도를 버리고 신앙과 바른 이성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6) 유다와 이스라엘이 아름답게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18절). 그들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다시 가나안에 정착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 복된 연합은 모든 원수들이 멸하여진 뒤, 복음의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때 그들은 한 목자의 인도 아래 같은 우리에 있게 될 것이다.

(3) 모든 자비의 길로 행함에 있어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고 하나님은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못해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러한 것을 기대할 만한 자격도 없다. 그처럼 비천하고 연약한, 그처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그리고 그처럼 진노를 야기시키는 우리가 어떻게 자녀 중에 들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신 자들은 또한 그로부터 낙토 가나안 땅을 받게 될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기쁨이 있는 천국의 상징이었다. 낙토를 멸시하며(시 106:24) 합당치 못하게 여기는 자가 그 땅의 한 부분을 차지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하신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하나님은 모든 반대 요소들에 대해 친히 답하신다. 하나님은 자녀 중에 돌이키는 자들을 두실 것이며, 그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갈 4:6) 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라.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와서 너희 자신을 아버지인 나에게 맡길 것이며 나의 은총을 바라게 되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는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주실 것이다.

Ⅳ. 회개에 대한 촉구 3:20-25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배역하고 떠난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20절). 그들은 혼인 계약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 결합되었으나 그 계약을 파기하고 하나님께 패역되이 행하였다.

(2) 이 죄가 사실임을 저희가 자백한다(21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역을 질책하셨을 때, 저희 자신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낮추고, ‘자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저희의 길을 굽게 하였으며 저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었기’ 때문이다. 죄는 굽어진 길로 탈선하여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에게로 돌아오라고 그들을 청하신다(22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그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자식들’이라고 부르신다. 고집세고 심술궂은 자녀일지라도 그의 자식들이다. 하나님은 저희를 바로 잡으실 것이며 결코 내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녀들에 대해 참으신다. 그러므로 부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죄를 자인하였을 때(21절), 그때 그들은 돌아오도록 청함 받고 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그에게로 부르신 것과 같다. 돌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용서하시는 자비와 안정시키는 화평과 새롭게 하는 은혜로써 우리의 배역함을 고치실 것이다.

(4) 그들은 이 부름을 기꺼이 수락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향이다. 마치 부서진 성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소리와 같이 이것은 상한 심령들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은”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대답이다.

1) 그들은 그들의 것이 되신 하나님께 그들 자신을 헌신하면서 나아온다.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우리가 당신을 버리고 떠났던 것은 우리의 죄요, 어리석음이었나이다.”

2)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을 요청하면서 나아온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23절). 그들은 산 위에서 우상을 섬겼다(6절).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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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저희의 하나님으로 의지하면서 나아온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죄로부터의 큰 구원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여호와의 구원, 그의 큰 구원이다.

4) 그들은 저희의 곤고에 대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면서, 그리고 저희의 죄에 대해 스스로 심판하면서 나아온다(24,25절). 그들은 모든 재난들을 저희가 섬겨온 우상들 탓으로 돌린다. 부끄러운 그것이…우리 열조의 산업…을 삼켰사온즉. 진실로 회개한 자들은 죄를 수치, 부끄러움으로 부르며 죽음과 파멸로 부른다. “그것이 우리 열조가 수고하여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좋은 산업들을 다 삼켰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우상 숭배가 우리의 번영을 망쳐왔음을 알았나이다.” 그들의 우상들이 삼켜온 열조의 산업 가운데서, 그들은 특별히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죄와 어리석음이라는 수치를 자초하였다(25절). 우리는 수치 주에 눕겠고. “그로 인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니이다.”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우리의 형벌의 수욕과 참회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덮을 것이나이다. 우리는 대대로 죄인들이나이다. 우리와 우리 열조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로부터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 비록 때때로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자 하긴 했을지라도, 오늘까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로부터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 비록 때때로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자 하긴 했을지라도, 오늘까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나이다. 우리가 죄지었을 때,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나이다.” 이 모든 말들은 포로되었던 자이든, 저희 땅에 남아 있던 자이든 관계없이, 열 지파의 이스라엘 족속(20절)의 말로 보여진다. 선지자는 거룩한 경쟁을 하도록 유다 사람들을 자극시키고자 저희의 회개를 예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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