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단어 성경공부 중에서 거룩한 안식일인 히브리어 단어인 샵바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중요합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안식일의 개념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주일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히브리어 단어 안식일을 통해서 주일을 깨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שַׁבַּת (7676, 샵바트) 안식일 sabbath
샵바트(명남, 여)는 그 기원이 불명확하다. 어원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샤바트(그치다, 끝내다, 쉬다)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창 2장에 암시되어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함으로 일곱째날에 안식하시니라(와이스닐트).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샤바트).
안식일의 기원 및 고대 근동 문화권의 유사한 제도와 안식일의 관련 가능성에 관하여, 적잖은 학자들이 성경의 안식일은 메소포타미아의 유사한 날을 개용한 것이라는 견해를 수용하였다. 유사성을 상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메 렘누티, ‘불길한 날들’ evil days의 존재이다. 다수의 바벨론 문헌에서(주로 B.C. 7세기) 매월 중 특정한 날들을 ‘불길한 날들’ evil days로 배척하며, 이러한 날들에는 모종의 일이 금지되었다. 문제의 특정 날들이란 곧 7, 14, 19, 21, 28일이었다. 그러나 드보(De Vaux)가 언급한대로(AI, p. 480) 7일 단위의 일주일을 29일 반이 되는 태음력의 한달에 맞추기는 어렵다.
둘째 증거는, 보름날 즉 만월일의 축제를 뜻하는 아카드어 샤밧투/샤팟투이다. 나아가 이 날은 ‘(신의) 마음을 달래는 날'(움 누흐 립비)로 인지되었으며 까닭에 길조의 날이다. 아카드어 샤팟투와 히브리어 삽바트 간의 어의상의 관련성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전자는 보름날을 지칭하며 경계와 구분을 표시하는 날이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삽바트도 구분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달을 반으로 이분하는 구분점이 아니라 달을 주간들로 나누는 구분점인 셈이다. 그렇다면 두 단어는 일반적 어원론과 기능에 근거해 볼 때 상호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물론 히브리인이 개용했다는 점에 입각하여 유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AI, p. 477). (참조: V. P. Hamilton).
구약의 안식일 준수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삽바톤은 약 110회 이상 나온다.
(a) 안식일에 있어서 그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안식일 신학이라 부를만한 바로 그것이다. 안식일의 종교적 중요성은 무엇이며 무슨 이유(들) 때문에 안식일 준수가 촉구되었는가? 십계명 중에 넷째 계명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광범하게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함으로써 이 제도가 갖는 모종의 중요성을 측정할 수 있다.
아마 최상의 절차는 안식일에 부착된 준수 동기를 관찰해 보는 데 있을 것이다. 안식일 준수 명령은 적극적으로,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출 23:12, 출 31:15)고 진술되며 또는 소극적으로, “제 칠일은 안식일인 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고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기원은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모세 이전,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던 시대, 혹은 그보다 이전 시대일 것이다.
출 16:25-26에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지지 전에 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였음을 보여준다.
(b) 안식일은 인간의 안식과 예배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에 대하여 명령하셨다(출 20:8-11). 그 명령의 적극적인 면은 백성이 그것을 거룩히 지키는 것, 즉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한 것으로, 주님에게 헌신하는 날로 표한 것이며, 그 명령의 소극적인 면은 그들이 그 날에 일하지 않는 것, 즉 안식의 날로서 그 은혜스러운 취지를 나타내었다. 안식일 준수에 관하여 다소 다른 두 형태가 있다.
① 첫째로 출 20:11-18의 십계명에서 안식일 준수는 창조(의 완성)와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베푸신 은혜는 인간의 예배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② 둘째로 신 5:12-15의 십계명에서 안식일 준수는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 연결되었다. 그 날과 예배 행위는 속박에서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하시는 행동에서 하신 은혜는 예배의 동인이었다.
③ 셋째로 안식일은 종속된 노동자들에게 휴식의 날을 제공하는 사회적, 인도주의적 계명이다: 출 20:10, 신 5:14-15, 그리고 출 23:12,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이 계명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일보 전진하고 있다. 안식일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상기시켜 준 바와 같이 이것은 또한 분명히 사회적 종속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자유의 작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은 이레 중 첫째날, 곧 우리가 즐겨 부르는 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시듯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다. 우리는 이 주일에 안식하며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과 구속 사업 등 그의 선한 손길을 기념하는 날로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안식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알아서 예배하고, 축복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④ 또한 안식일은 레 23:1-3에 보면 여호와의 절기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절기들은 기념일, 즉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대한 여러 측면들을 명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정한 날이었다. 특히 그들이 이 절기를 지키는데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회’, 즉 예배를 위한 공식적인 행동이다.
안식일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어서 공식적인 예배의 날일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그 날을 즐거이 지키는 기회였다.
(c) 안식일에는 특별한 제물을 드렸으며(민 8:9, 레 23장), 여호와 앞에 진설병을 진설하였다(레 24:8). 안식일일지라도, 예배 의식과 할례 의식은 거행되었다(레 12:3, 참조: 요 7:22).
(d) 안식일은 언약의 한 표징이다. 안식일은 구약시대에서 할례의 표징과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이다. 출 31:13, 출 31:17과 겔 20:12 이하 절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이며 이방인과 구별하는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다.
(e) 안식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성을 지닌다. 가장 바쁜 시기인 밭 가는 시기와 추수기에까지 일을 하지말라고 강조하는 것(출 34:21)과 안식일을 범했을 때 사형에 처하는 것은(민 15:32, 출 31:14) 이스라엘 생활에 있어서 이 명령에 포함된 지대한 중요성을 나타내어 준다.
(f) 그러나 안식일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운 날로 여호와의 성일로 여겨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잘 지키면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사 58:13 이하, 사 56:2).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한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충성심을 확증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모독하는 자는 재앙으로 위협하였다(겔 20:13).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혼란된 상태에서 안식일이 느헤미야의 개혁 내용에 강력하게 강조되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느 10:32, 느 13:15-22).
요약해서 말하자면 안식일에 대한 구약성경의 태도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으로 간주했지만 특별히 구속받은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법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소극적으로는 일을 쉼으로써 안식일을 지킨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절기(잔치), 즉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기회로 지킨 것이다. 안식일의 분위기는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일 수 있었으며,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안식일을 진지하게 지켜야만 했다.
신약성경에서 삽바톤은 6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안식일 관습은 유대 문헌에서 밝혀진 관습과 일치한다. 예수님의 시체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비일에 십자가에서 내려 매장되었다(막 15:42-47, 요 19:42). 안식일에는 밀이삭을 따는 것이 금지되었으며(막 2:23-24와 병행구), 죽음의 위험에 처해있지 않은 사람들은 도움이나 치료를 받을 수 없으며(막 3:1, 눅 13:14, 눅 14:3 이하, 요 7:23, 요 9:14), 각종 물건을 운반해도 안된다(요 5:9 이하).
안식일에는 여행이 제한되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은 안식일에 여행하기에 합법적인 거리며, 탈무드에 의하면 2천 규빗, 또는 보이다(행 1:12).
안식일에 제사장의 일(막 12:4-5)과 할례(요 7:22-23)는 허용되었다.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며(눅 23:56), 손님들이 초대되었다(눅 11:1).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으며(행 13:15, 행 13:27), 예배가 드려졌고(눅 4:16 이하), 해설을 하였다(행 13:14-15, 행 13:42 이하; 행 16:13).
(b) 복음서들. 사복음서들에 언급된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은 안식일에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안식일 문제는 한번(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이다.
①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따서 먹은 사건(마 12:1-8, 막 2:23-26, 눅 6:1-5).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이러한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그 이유가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라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답은 그것을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경우에서와 같이(삼상 21:1-6, 참조: 삼하 8:17, 신 23:25)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의식적인 율법,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예외로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참조: 출 23:12, 신 5:4).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을 적용할 때와 초월해야 할 때를 결정하신다(막 2:28). 마 12:1 이하에는 희생 제사가 안식일 법에 우선한다는 점, 그리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예수님 안에 있으며, 그의 자비, 사랑의 법(호 6:6)으로 훨씬 더 절박한 명령이 부과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②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마 12:9-14, 막 3:1-6, 눅 6:6-11). 이 경우에서는 그를 고쳐주기 전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율법적인가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물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구원,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배후에 있는 중대한 목적이므로 병을 고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예수님은 손마른 사람을 치유해줌으로서 자기의 주권을 나타내셨다.
③ 안식일에 예수님이 귀신들려 몸이 굽은 여인을 고친 사건(눅 13:10-17). 예수님은 회당에 있었던 그 여자를 고쳐주셨다. 이것은 회당장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회당장은 일할 6일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님이 했던 행동은 그들이 동물에게는 허용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자비의 행동이었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일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다. 안식의 날에 대한 원칙에 관하여 질문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없지만 단지 그 날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질문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있다.
④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창병을 고친 사건과 관련된 문제(눅 14:1-6). 이 경우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이 다시 논쟁을 벌인 경우이다. 이번에는 그들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것은 율법(노미쿠스)에 정통했던 그들에게 던진 질문으로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주고난 후 병자를 고치는 것은 사실상 우물에 빠진 짐승 한 마리를 건져주는 것과 꼭 같은 자비의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그 전문가들이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에 저촉되지 않았음을 그들이 인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⑤ 안식일에 예수님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사람을 고치신 사건과 관련된 문제(요 5:1-9, 요 5:16, 요 5:17, 요 7:22). 이 치유 사건으로 인해 논쟁이 이어진다. 치유된 자가 침상을 가지고 가는 것은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한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일에도 일하셨음을 지적하면서, 아버지께 권세를 받은 자신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일하신다고 대답하셨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계속해서 병을 고치는 것은 아버지가 항상 하고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 후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는데 이는 그가 안식일을 어겼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논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초월적 권세를 지닌 분으로 인정을 받느냐에 있다. 이 논쟁은 요 7:19 이하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한 것을 논의에 넣으신다. 또 다시 궁극적 논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준다(요 7:16-17). 인간의 필요에 응하여 이 권세는 안식일에도 발휘 행사한다.
그리고 다시 요 7:17에서 “이제까지”(헤오스 아르티)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안식일 계명이 유효했던 동안 내내 사실상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달리 말하자면 안식일 계명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아르기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⑥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친 사건과 관련된 문제(요 9:1 이하).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만 아니라 흙에 침을 뱉아 반죽함으로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를 죄인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사역을 반대 입장에서 본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요 9:5). 따라서 그와 만나는 사람은 누구가 진짜 눈먼 자이고, 누가 진짜 볼 수 있는 자인지에 대해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볼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자에게, 이와 같이 시력을 주시는데서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⑦ 눅 4:16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은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참석하여 성경을 읽으셨다. 이 표현이 나타내는 자연 그대로의 의미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드리는 통상적인 유대 예배 관습에 따랐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양식이었을 것이다(눅 2:22, 눅 2:41).
⑧ 마 24:20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안식일을 계속 지킬 것이라고 그리스도가 예견했음을 의미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으며, 단순히 안식일에 위급한 경우를 만났을 때는 예루살렘 부근에 필요한 것을 사러 가거나 도움을 청하러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지킬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까지도 생각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짐승도 부리지도 않으며, 여행도 이천 규빗 이내로 제한했었다. 도피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렇게 짧은 거리를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한편 도망하는 일이 이 나라가 안식일에 대한 하나의 가상된 신성 모독 때문에 미친 듯 날뛰는 광신적 유대인들로 가득할 때 ‘안식일에’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c) 사도행전.
행 15:21에서 예루살렘 종교회의 법령에서 안식일에 관해 언급한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클라크(Adam Clarke)는 이 구절의 의미를 회심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해서 율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시사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편지하는 것은 필요치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지시가 필요했다(R. Earle).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것이 그의 관습이었다(행 13:5, 행 13:14, 행 13:44, 행 14:1, 행 16:13, 행 17:2, 행 17:17, 행 18:4, 행 19:8).
한편 행 20:7에 보면, 바울은 드고아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도 주간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과 만난 것을 볼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에서 삽바톤은 ‘주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첫날은 ‘주일’이다. 고전 16:2에서도 삽바톤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d) 서신들.
서신들 중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고전 16:2과 골 2:16에서만 삽바톤이 나타난다.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유대인의 율법(율법의 요구)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되었으므로(골 2:14)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규칙이나 종교력(曆)이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이러한 의식에 있다. 바울이 주장한대로 이러한 준수 사항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e) 교회에서 안식일. 그리스도는 주간의 첫날(막 16:2, 마 28:1), 즉 그리스도교 예배의 날(행 20:7, 고전 16:2, 참조: 계 1:10)에 부활하셨다.
(f) 로르도르프(W. Rordorf)는 주후 321년에 콘스탄틴 법령이 공포되면서 기독교의 일요일을 휴식의 날, 즉 이상적인 안식일로 간주했다고 말하였다. 그 때까지는 그들이 첫 날을 안식의 날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예배 드리는 날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교도 황제가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닌 날, 이전에는 한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안식의 날을 제정했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제안은 별 문제로 하고도 콘스탄틴 이전의 교부 문헌에 이런 견해에 대한 반증이 있다.
(참조: W. Stott; E. Lohse; V. P. Hamil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