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6장 히브리어 성경 설교말씀은 구원받은 백성이 받을 복은 누림의 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누리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 누림의 복을 받아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솔로몬 왕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의 복도 주셨고 육적인 복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초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말씀대로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 생각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왕을 세우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라크 로 이르베 로 수심 비로 야쉬브 에트 하암 미츠라이마 리마안 하리보트 수스 바아도나이 아마르 라켐 로 토시푼 라슈브 바데레크 하제 오드
신17: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왕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병마는 애굽에 있는 말이 최고였기 때문에 애굽에 말을 사러 내려갔던 것입니다.
바예히 리쉘로모 아리바아트 알라핌 이르요트 수심 우마리카보트 우쉐넴 아사르 엘레프 파라쉼 바야니헴 비아레 하레케브 비임 하멜렉크 비루샬람
대하9:25 솔로몬의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요 마병은 만 이천 명이라 병거 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솔로몬은 애굽에 있는 말을 사다가 무역을 했습니다.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며 마병은 만 이천 명이고 병거 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 되면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비로 야르베 로 나쉼 비로 야수르 리바보 비케세프 비자하브 로 야르베 로 메오드
신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바예히 로 나쉼 사로트 쉐바 메오트 우필라기쉼 쉘로쉬 메오트 바야투 나샤이브 에트 리보
왕상11: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며 첩이 삼백 명입니다. 이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마음으로 돌렸습니다.
바예히 리에트 지키나트 나샤이브 히투 리바보 아하레 엘로힘 아헤림 비로 하야 리바보 샬렘 임 아도나이 엘로하이브 킬리바브 다비드 아비브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솔로몬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이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신앙이 노년에 타락했습니다.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결국 타락의 길로 가서 아스다롯과 밀곰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도 받고 부귀영화도 누렸다고는 하지만 노년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삶이 아닙니다. 이런 솔로몬이 전도자가 되어 우리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육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면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세상에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더 허신하여 내세의 삶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쉬 라아 아쎄르 라이티 타하트 하샤메쉬 비라바 히 알 하아담
전6: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전도자가 말하기를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불행한 일’ (라 7451) 나쁜, 악한, 악, 악한 것, 좋지 못한, 무익한이라는 뜻입니다. 전도자가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나쁘고 무익한 일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인생이 악한 죄를 짓는 것도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불행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불행한 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인 우리는 무엇이 불행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일입니다. 복음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불행한 일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 놓고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행한 일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죄악입니다. 솔로몬이 그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에는 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재물이 쌓이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절대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제일 먼저 부패합니다. 사람은 함부로 서원해도 안 됩니다.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보았던 해 아래에 한 가지 불행한 일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이쉬 아쎄르 이텐 로 하엘로힘 오세르 우니카심 비카보드 비에네누 하세르 리나피쇼 미콜 아쎄르 이트아베 비로 야쉴리테누 하엘로힘 레에콜 미메누 키 이쉬 나키리 요켈레누 제 헤벨 바할리 라 후
전6: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이 누린다고 말합니다.
‘받았으나’ (나탄 5414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주다, 두다, 놓다, 세우다, 붓다,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와 재물과 부요를 물 붓듯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는 모든 일에 재물을 갖다 놓았습니다. 하는 사업마다 대박이 납니다. 이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재산이 증식되고 돈이 따라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갖다 놓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받는 복입니다. 이것은 일반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일반은총을 받았습니다.
재물과 존귀와 부요를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너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사는 꼴이 무엇이냐! 라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이렇게 부자로 살고 권세를 누리면서 사는데 예수 믿어봤자 아무 소용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습니까? 칼형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재물을 허락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이와 같은 육적인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복을 받으면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만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리도록’ (아칼 398 전치사 동사 칼 부정사 연계형) 먹다, 삼키다, 소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육적인 축복은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미완료로 계속해서 부와 명예는 평생에 걸쳐서 받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것을 먹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려야 하는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돈이 있으면 옷도 사 입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돈을 벌 줄만 알지 어떻게 소비하면서 써야 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정사 연계형을 사용했다는 것은 라메드를 통해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쓸 줄은 모르고 욕심에만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렇게 미완료로 엄청난 재물의 복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싸인입니다. 그러면 그 물질을 나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도 확장하게 됩니다.
‘누리나니’ (아칼 398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단수) 먹다, 삼키다, 소비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모아 두었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먹고 소비하고 즐기면서 누리게 됩니다. 나는 평생 열심히 돈만 모을 줄 알았지 그것으로 맛있는 고기도 못 먹고 허름한 옷을 입고 허름한 집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 돈은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됩니다. 칼형은 자신이 모아 두었던 돈을 자식이 누리든지 형제가 누리든지 아니면 옆에 있는 그 어떤 사람이 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내가 모아 두었던 재산을 다른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으로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남성 3인칭 단수는 내가 모아 둔 물질을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성도는 물질관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꾸어야 합니다. 돈은 무조건 모은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재물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용할 줄 모르니 결국 다른 사람이 사용하여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누리는 것이며 어디에 사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임 욜리드 이쉬 메아 비샤님 라보트 이흐예 비라브 셰이히우 이메 샤나이브 비나피쇼 로 티시바 민 하토바 비감 케부라 로 하예타 로 아마리티 토브 미메누 하나펠
전6: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사람이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 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고대 근동에는 큰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장수했다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이러한 것들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육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혼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만족하지’ (사바 7646 동사 칼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만족하다, 충족하다, 포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바라는 단어는 음식을 먹음으로 배불러짐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영혼이 만족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백 명의 자녀가 있든지 장수를 하든지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하면 속 사람은 만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체로만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모든 것을 누려보고 경험해 보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칼형은 육체는 만족할지 모르지만 영혼은 만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육체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장수를 하더라도 영혼은 죽을 때까지 만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혼의 만족감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을 육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코미조메노이 토 텔로스 테스 피스테오스 휘몬 소테리안 프쉬콘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장수하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죽어서는 결국 지옥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구원의 은혜도 없이 제대로 안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업의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매장되지 못한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원수라도 죽으면 해가 넘어가기 전에 땅에 묻어 주었습니다. 사울 왕 같은 경우에는 벧산 성벽에 매달아 버렸습니다. 엄청난 수치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야시무 에트 켈라이브 베이트 아쉬타로트 비에트 기비야토 타키우 베호마트 베이트 샨
삼상31:10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 왕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장사지내주지 않고 벧산 성벽에 못을 박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으로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죽어서까지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살아서는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죽어서는 수치 당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키 바헤벨 바 우바호쎄크 옐레크 우바호쎄크 쉐모 이키세
전6: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우리가 구원론적 관점에서 낙태된 자는 구원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를 가지고 논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서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낙태된 자는 구원받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연민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헛되이’ (헤벨 1892) 증기, 숨, 헛됨이라는 뜻입니다. 낙태된 자는 보통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 태 속에서 수정이 됨과 동시에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에 원죄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믿음으로만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믿음으로 태 속에 있는 태아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낙태된 자는 공허하고 헛되게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왔다가’ (보 935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들어오다, 가다, 오다,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낙태된 자는 공허하게 이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태 속에 왔다가 공허하게 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칼형은 엄마의 태 속에 잠시 왔다가 간 낙태된 자를 말합니다. 완료 시제는 성경적 관점에서 창세 전에 있었던 신령한 몸이 이 땅에 육체의 몸을 입고 태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료로 왔으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낙태된 자도 아담의 혈통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원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 속에 오지 않았다면 원죄가 없겠지만 태 속에 육체의 몸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원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낙태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매’ (얄라크 3212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가다, 오다, 걷다라는 뜻입니다. 낙태된 자는 엄마 태 속에 잠시 왔다가 어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둠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칼형은 잠시 이 세상에 왔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낙태된 자를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어두운 중에 계속해서 머물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됨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죽음이며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엄마의 태 속에 잠시 왔다가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민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덮이니’ (카사 3680 동사 푸알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덮다, 숨기다, 감추다라는 뜻입니다. 낙태된 자의 이름이 어둠에 덮인다고 했습니다. 어둠에 숨겨져서 이름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름이 어둠에 들어갔다는 것은 빛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며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낙태된 자는 어둠에 가려 이름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푸알형을 쓴 것은 어둠이 너무나 짙게 깔려 낙태된 자의 이름이 나오려고 발버둥 쳐도 절대 나올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둠이 낙태된 자의 이름을 완전히 덮어 버렸기 때문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미완료 시제는 낙태된 자의 이름은 어둠에 가려 절대 보이지 않는데 계속해서 보이지 않고 어둠에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둠으로 덮였다는 것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백성의 이름은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감 셰메쉬 로 라아 비로 야다 나하트 라제 미제
전6: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낙태된 자는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세상에서 육적인 축복은 받았지만 영적인 구원의 복을 받지 못한 자들이 낙태된 자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이 세상을 살면서 영적인 복을 받지 못한다면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구원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백 명의 자녀를 두고 장수를 하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낙태된 자가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은 육체로 장수를 해도 죽어서는 낙태된 자와 같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일루 하야 엘레프 샤님 파아마임 비토바 로 라아 할로 엘 마콤 에하드 하콜 홀레크
전6: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도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더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토브 2896) 좋은, 선한, 즐거운, 선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선한 것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한 곳인 지옥의 불 못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호 데 에이펜 아우토 티 메 레게이스 아가돈 우데이스 아가도스 에이 메 헤이스 호 데오스 에이 데 델레이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테레손 타스 엔톨라스
마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선한 하나님인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선한’이라는 단어가 신약 히브리어 성경에서 (토브)입니다. 그럼 전도자가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이 세상에서 장수하고 부귀영화로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욥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리쉐마 오젠 쉬마이티카 비아타 에니 라아티카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욥의 고백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본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귀로만 듣는 신앙은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체험하는 믿음을 가질 때 구원의 확신도 있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행복은 바로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구원받지 못하면 결국 낙태된 자와 같이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나의 속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재물이 있어도 누리는 복이 없으면 이것 또한 허무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누리는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큰 상급으로 쌓아서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상을 쌓아 놓는 기회도 육체를 입고 있을 때뿐입니다. 죽으면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계속해서 재물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