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장 설교 말씀] 범사에 기한과 때가 있다(전3:1-22)

전도서 3장 설교 말씀은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범사에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음을 하나님이 말씀한다.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범사에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Ⅰ. 모든 인간사의 가변성 3:1-10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인간 생활의 여러 조건은 매우 판이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일들을 지나치고 또 지나치면서 살아간다. ‘생의 바퀴'(약 3:6) 가운데, 가장 꼭대기에 있던 바퀴 살이 잠시 후에는 정반대의 위치에 가 있는 경우가 때때로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만조와 간조, 부단히 차고 기우는 달과 같이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또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해 간다.

우리는 형통할 때 편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안심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사는 곳이 변화 무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안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즉 솔로몬이 2:24에서 권면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 겸손히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수고한 낙을 누리되,’ 갖가지 소망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지도 말고 두려움으로 낙담하지도 말며 오로지 한결같이 침착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1) 한 가지 일반적인 명제가 제시되고 있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1절). 서로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형세가 순환하는 가운데 각각 제 차례를 찾아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낮은 밤과 교대하며 밤은 낮과 다시금 교대한다. 여름인가 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인가 하면 얼마 안 있어 여름이 올 것이다.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있나니.

요한일서 5장 하나님의 계명 설교문

(2) 이 여러 가지 변화들 중 일부는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이고 일부는 사람의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천하에는’ 모든 것이 이처럼 변화 무쌍하지만 천상에는 모든 것이 불변하는 상태에 있다.

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2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살아 날 때가 있을 것이다.

2) 사람들에게는 일 년 중 한 때, 일생 중 한 때 ‘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심은 것’이 열매가 없고 무익할 때, 그때는 그것을 ‘뽑을 때’인 것이다.

3) 죽일 때가 있고(3절). 그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널리 퍼져 모든 것을 황폐시키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로 돌아오실 때는 ‘그가 찢으신 것을 치료하는 때로서'(호 6:1,2) 백성으로 화를 당케 하신 후 위로하시는 때인 것이다(시 90:15).

4)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가정, 재산, 나라를 ‘헐 때’는 그것이 곧 멸망에 이를 정도로 무르익은 때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아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헐어 버리는 것을 다시 세우실 ‘때’를 찾으실 것이다.

5) 하나님의 섭리가 ‘울고 슬퍼하도록 요구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웃고 춤추도록’ 요구하시는 때, 곧 명랑함을 명하시는 때가 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신을 섬길 것을 기대하신다.

6)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를 주셔서 요새를 철거해 버림으로써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다.’ 그러나 성채를 쌓기 위해 ‘돌을 거둘 때’도 있다는 것이다(5절).

7) 친구가 신실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우리가 그 친구를 ‘안을 때’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거나 신실치 못할 때는 그를 ‘안는 일을 멀리할 때’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7:3-5과 요엘서 2:16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부부간의 포옹에 흔히 적용된다.

8)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6절). 기회가 미소 짓는 때는 돈을 벌고, 승진하며, 이득을 보는 거래를 하는 때로서 곧 지혜로운 자가 찾는 때이다. 그가 세상에 나가 일하고 가족이 불어날 때, 그가 전성기를 맞을 때, 바로 그때가 그에게 분주한 때이며 햇볕이 비취는 동안 건초를 만들 때인 것이다. 또한 쉽게 얻은 것들이 쉽게 흩어져 버릴 때, 즉 ‘잃을 때’가 올 것이다.

9) 우리가 이미 얻어 놓은 것을 이용할 때, 곧 ‘지킬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리의 양심을 그릇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마 10:37,38).

10) 매우 큰 슬픔을 당할 때에 하듯이 옷을 ‘찢을 때’가 있으면, 그 슬픔이 지나갔다는 표시로 그 옷을 다시 ‘꿰맬 때’ 가 있다.

11) ‘잠잠히’ 있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악한 때'(암 5:13)이거나 우리가 잘못 말할 우려가 있는 때(시 39:2)이다. 그러나 침묵이 공의로운 주장을 배신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해야 할 때’인 것이다.

12) ‘사랑할 때’가 있으며 우애를 보이기 위해 명령항고 자유스러워 할 때가 있다. 반면에 ‘미워할 때’가 올 수도 있는데, 그때는 우리가 좋아하던 자들과의 모든 친밀한 감정을 끊어 버릴 만한 명분을 보게 되는 때로서 그 친밀감을 유보시켜야 하는 것이다.

13) ‘전쟁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칼을 빼어 드시는 때이며,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칼을 빼어 드는 때이다. 그러나 또한 ‘평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평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가 ‘전쟁을 쉬게’하시는 때이다(시 46:9). 전쟁은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평화도 영원한 평화라고는 불리지 않는 것이다.

(3)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 정도로 변천하기 쉽다면, ‘일하는 자가 무슨 이익이 있으랴'(9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변화 속에서 시험 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실로 ‘우리가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 이익도 없다. 물건 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때에라도 우리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가 정해 놓은 대로 바르게 사용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는 그것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단련을 받고 다양한 사건들을 통한 연단으로 갖가지 은총들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일을 중지하게 만드는데, 이때 우리는 그 변화 자체보다도 이 새로운 일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한삼서 가이오와 디오드레베 신앙 비교 설교말씀

Ⅱ.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 3:11-15

솔로몬은 그 모든 변화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1) 우리는 현재 있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이용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믿고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11절). 더위가 여름에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위는 겨울에 어울린다. 또한 제 차례가 되어 돌아온 밤은 흑암의 아름다움이고 때가 되어 돌아온 낮은 밝음의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모든 경륜 가운데는 놀랄 만한 조화가 있어서, 그 섭리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것들이 일어난 시기와 관련 사항과 성향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는 영광,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섭리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가 완료되는 때에는 그것을 보되 영광스럽게 된 모습을 볼 것이다(신 32:4;겔 1:18).

(2)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현재 우리에게 뒤엉키고 복잡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 완전한 발견을 할 수 있기 위해 끈기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동안, 그리고 집에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마지막 손질을 하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매우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중간 부분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일의 처음도 보지 못했으려니와(만일 그 처음을 보았더라면 하나님의 경륜 속에 그 계획이 얼마나 훌륭하게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이 영광스럽게 성취되는 그 일의 마지막 부분 또한 보지 못한다(만일 그 마지막을 보았더라면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영화로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우리는 휘장이 찢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사람에게 세상(한글 개역에는 ‘영원’으로 나옴-역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다.

1) 혹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보다 많이 알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유로 삼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몰두하기만 한다면 그 대부분의 사물 가운데서 경탄할 만한 질서와 짜임새 있는 계획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처럼 모르고 있는 지에 대한 이유로 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마음 속에 너무 많이 두고 있으며 세상 일들에 대한 생각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 그 일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없는 것이다.

(3) 이러한 일들 가운데는 분명하고도 지속적인 선이란 없다(12,13절).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가난한 자에게, 대중에게, 그리고 사회와 종교의 유익을 위해 곧 선을 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재능과 재산을 가지고 있겠는가? 이 생에서의 우리는 저 생을 위한 시련과 시험의 상태에 놓여 있다. 모든 사람의 생은 자기를 영원케 할 것을 행하는 기회이다. 우리는 자신을 편안히 하고 즐거워하며 우리 수고의 낙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림으로써, 그 낙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며 그에게 감사를 돌리도록 하자.

(4)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인적, 혹은 공적 관심사에 대해 내리는 처분들을 흡족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게 하소서.” 왜냐하면 우리 계획과 이익에 아무리 어긋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변경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한 번 그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너무도 완전하여 그 이상 아무것도 더 추가 시킬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안에는 아무런 결함도, 덜어낼 것도 없으며 불필요하거나 남아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5)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 가운데 있는 그의 목적에 응답하기 위해 애서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거나 느끼는 변화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15절). 세상은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기 쉽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에 행하신 것을 반복하신다.

Ⅲ. 인간의 한계성 3:16-22

솔로몬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경외 없이는 헛된 것임을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권력이나 생명 그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제시한다.

(1) 본문에는 허무, 곧 보좌에 앉은 권세자와 재판석에 앉은 자의 허무가 나타나 있다. 그들에게는 권세가 있으므로 만일 그들이 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기만 하다면 그들은 하나님 밑의 부지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경외심이 없는 재판관은 다음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재판관은 올바른 재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솔로몬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존귀에 처하여 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곧 맹수같이 된다. 백성들에게는 그런 자들을 재판관으로 삼느니 차라리 재판관이 없는 것이 나을 뻔하게 된다. 또한 재판관들로서는 권력을 가지고 그런 나쁜 목적에 사용하느니보다는 차라리 권력을 갖지 않는 것이 낫다.

유다서 1장 이단자의 심판 설교말씀

2) 그러한 재판관은 올바로 판결하지 못한데 대해 그 자신이 심판받게 될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 불의한 재판을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재판에 대한 검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17절).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위해 재판하시고 변호하실 것이다. 압제받는 자들로서는 자기들의 주장이 재심리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것이니 또 다른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소를 다시 들으시고 불평을 시정하시며 부당한 법령을 번복시키실 때가 있는 것이다(욥 24:1).

(2) 이 세상에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의 허무가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이 세상의 인생의 일에 대하여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서, 종교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한다면 인간의 이성이라도 인간을 짐승보다 낫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인간의 감옥으로 지으셨고 인간의 생을 고행이 되게 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 만일 인간이 천하고 비참하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에게 자기가 단지 인간에 불과한 존재인 줄 알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시 9:20). 더구나 악인들에게, 저희가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세상적이며 육욕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는데,’ 이는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이다(19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죽음은 짐승과 사람에게 동일한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과 짐승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표하는 관심에만 차이가 있을 뿐 똑같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한 곳으로 간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인간과 짐승의 시체는 다 똑같이 부패한다. 모든 것은 썩어서 ‘다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과 짐승의 혼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차이이다(21절).

인간이 죽으면 그 ‘혼’은 그를 지으신 혼들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혼은 육체와 함께 죽지 않고,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받는다'(시 49:15).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초롱에서 꺼낸 촛불과 같아서 그 초롱은 실로 쓸모없는 채로 남게 되나 촛불 그 자체는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다. 모든 육욕적인 감각주의자들처럼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저희 눈에 보이는대로 행하는 자들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전혀 없다.’ 짐승처럼 죽으리라고 생각되는 자들이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바가 없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성의 고귀한 여러 기능들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상의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추론되고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절대로 불의한 의로움의 자리에 들여놓지 말라. 명랑한 삶을 누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형통케 해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즐거워해야 하며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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