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장 복음 설교말씀은 사탄이 욥에게 두 번째 시험을 하게 된다. 사탄이 욥에게 악성 종기를 시험하고 있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비웃으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욥의 세 친구가 방문했다.
Ⅰ. 사단의 또 다른 시험 2:1-6
사단은 욥을 다시금 참소하려 한다.
(1) 재판일 열리고 고발자가 지난번처럼(1:6,7)나타났다(1,2절).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고 사단도 그들 가운에 끼어 있다. 사단은 “네가 어디서 왔느냐?” 라는 이전과 똑같은 질문을 받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라고 이전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아무런 해로운 일도 행하지 않은 듯한 어투였다.
(2) 재판장 자신이 욥을 위해 변호하셨다(3절).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선한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는 순진하고 정직하니라. 네가 오히려 욥이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다는 것을 보았을지라.” 욥에 대한 진술 때문에 사단은 정죄받았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사람이나 사단이 우리의 재판장이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 그들은 옳든 그르든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며, 그의 재판은 결코 오류나 치우침이 없으시다. 사단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킨 욥은 칭찬을 받았다.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지조를 지키는 것은 순전함을 이룬다.
(3) 그 고발은 더 진전되었다(4절).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그들의 재산을 내걸 뿐만 아니라 주기도 한다. 사단은 이런 것을 근거로 하여 교활하게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고발하였다.
1) 욥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비정한 사람이므로, 자기의 자녀들이나 종들의 죽음에 동요하지 않았다.
2) 욥이 전적으로 이기적이어서 자기 자신의 안위와 안전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4) 욥의 순전함을 더욱 시험하기 위해 도전이 제기되었다(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그가 자기의 순전함을 버리리이다.” 육신의 날카로운 고통과 질병은 사람의 생각을 가장 초조하게 만들며, 사람의 마음을 가장 혼란시킨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찌르는 가시를 견디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으며,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후 12:8,9).
(5) 이 시험을 시행하도록 사단에게 허락이 내려졌다(6절).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너의 가장 악한 것을 그에게 행하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를 괴롭히되 죽이지는 말라.” “그의 영혼은 해하지 말지니라. 즉 (어떤 사람의 견해대로) 그의 이성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로 그 이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정당한 시험이 아니니라.” 그가 만일 혼미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저주하였다 해도, 그것으로 그의 순전함을 반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정신 이상에서 나온 소리이기 때문이다.
Ⅱ. 끝까지 견디는 욥의 인내심 2:7-10
불쌍한 욥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도록 허락받은 마귀는 우선은 괴롭히는 자로 그 다음에는 유혹하는 자로 욥에게 역사하기 시작했다. 옛 뱀이 온갖 기교를 다해서 고안해낸 그 유혹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그 뱀은 우리의 첫 조상을 희롱했던 바로 그 수법으로 여기에서 욥을 희롱하고 있다(창 3장).
(1) 마귀는 악창으로 욥을 괴롭힘으로써 하나님을 저주하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욥 자신에게 짐이 되도록 했다(7,8절).
1) 욥에게 닥쳐온 질병은 아주 혹독한 것이었다. 사단은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그의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독한 염증”으로 보는데 아마도 그것은 매우 심한 단독(erysipelas)이었을 것이다.
2) 욥은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에 기와 조각 곧 깨어진 돌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이 불쌍한 자에게 또 하나의 아주 비통한 일이 찾아왔다. 거지 나사로조차도 개들이 와서 혀로 그 헌데를 핥았을 때 어느 정도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쌍한 욥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전에 욥이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의 병이 악취가 나고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전염병일까봐 두려워서 돌보아 주지 않았다. 욥은 부드럽고 따뜻한 침상에서 쉬기는커녕 ‘재 가운데 앉아 있었다.’ 이처럼 욥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강하신 손아래 겸손히 맡겼고, 자기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고 있었다. 칠십인역에서는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욥은 성밖 거름더미 위에 앉았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있었다고만 말할 뿐이다.
(2) 사단은 욥의 아내를 이용하여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마구 충동질하였다(9절). 욥의 아내는 욥의 모든 위로가 사라졌을 때에 그를 괴롭히고 유혹하였다. 사단이 없앨 수 있는 허락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남겨 두었다면 거기에는 어떤 유해한 계획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욥의 아내는 욥의 신앙이 계속 지속되는 것을 보고 그를 야유하였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당신은 당신의 봉사를 보상하기는커녕, 진노를 살 만한 어떤 이유도 없는데 당신의 소유물을 빼앗고 징벌하는 것을 은총의 표시로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그렇게 굴종할 정도로 얼간이가 되어 쩔쩔매니이까?
그런데도 왜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하여 섬기니이까?” 욥의 아내는 그의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가장 큰 악을 담대히 행하도록 충동질하였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당신이 스스로 사형 집행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구원자가 되시오. 당신의 생명을 끝냄으로써 당신의 고통을 끝내시오.” 이것들은 사단의 모든 유혹들 가운데 가장 험악하고 끔찍한 유혹이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보다 자연적인 양심에 위배되는 것은 없으며 자살하는 것보다 더 본성에 위배되는 것도 없다.
(3) 욥은 그 유혹에 용감하게 대항하였으며 그 유혹을 물리쳤다(10절).
1) 욥은 하나님께 대해 그렇게 말한 것에 매우 분개했다. “뭐! 하나님을 욕하라고? 그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니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욥은 매우 온화한 태도로 비록 그의 아내가 불친절했을 때에도 그렇게 대했다(욥 19:17). “나는 내 몸에서 나온 자녀들로 인해 나의 아내에게 정중히 대했노라.” 그러나 그의 아내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라고 충동질했을 때에 욥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녀의 말이 악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경건한 가장인 욥과 같이 그의 아내도 신앙심이 매우 깊은 여자였으나 이제 그들의 재산과 즐거움이 사라지자 그녀는 그 손실을 욥과 같이 평정을 가지고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사단 노릇을 하였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혜롭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어느 때라도 어리석고 잘못된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을 신실하게 책망해야만 한다.
2) 욥은 그 유혹에 대해 반박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쓴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우리는 책망하는 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욥은 참아야 하는 것으로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재앙을 말하였다. “우리가 재앙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우리가 재앙을 받게 되리라고 예상해야 되지 않겠느뇨?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복을 주셨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괴롭힘으로써 번영과 불행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해도 우리가 놀라거나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느뇨(벧전 4:12)? 우리가 스스로 재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뇨?”
이 말씀은 재앙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환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감정과 경건한 영혼의 기질을 나타내고, 그 환난들을 선물로 간주하거나(빌 1:29) 우리의 죄악에 대한 형벌로 받아들여(레 26:41) 그 환난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복을 받아 이제까지 평화의 번영을 누리며 살아오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내리시는 재앙을 우리가 받지 않겠느냐? 우리가 육신을 위해 매우 많은 복을 받았다면 영혼을 위해 또한 복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 슬픔을 당하게 하시므로 마음을 더 선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4) 욥은 여전히 자신의 순전함을 굳게 지켰으며, 욥을 치려던 사단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은혜가 승리했고 욥은 ‘쓴 뿌리가 나서 자기를 괴롭게 하지’ 못하도록 주의했다(히 12:15).
Ⅲ. 욥의 세 친구들의 방문 2:11-13
욥의 세 친구가 친절하게도 고난 가운데 빠진 그를 찾아왔다. 욥의 대적들은 그의 재앙을 알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16:10;19:18;30:1 등).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으며 위로하려고 노력하였다. 세 사람의 이름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다(11절). 이들 세 사람은 그들의 담화에서 나타나듯이 아주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로하였고 지식있는 사람들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판단을 인정하였다(32:6).
(1) 욥은 번창할 때 그들과 우정을 맺었다. 인생의 즐거움은 현명하고 덕이 높은 사람들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데에 많이 있다. 그래서 소수라도 그러한 친구들을 가진 사람은 그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좋게 대해야만 한다. 욥의 세 친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손자인 데만의 후손이며(창 36:11), 빌닷은(추측컨대) 아브라함이 그두라의 몸에서 낳은 수아의 후손이고(창 25:2), 소발은 에서의 후손인 스보(창 36:11)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약속의 언약에 대해 외인이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이처럼 큰 지혜와 경건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가로막혔던 장벽이 후대에 무너져 하나님의 은총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복된 조짐이었다. 에서는 거부당했으나, 에서에게서 나온 많은 후예들은 최고의 복을 어느 정도 상속받았다.
(2) 대부분의 친구들이 욥을 버렸을 때에(19:14) 그들은 재난 가운데 있는 욥과의 우정을 유지하였다. 이전에 욥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왔었던 것처럼 그들은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왔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는 우리는 많은 좋은 교훈을 배운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살펴보고 교훈을 받아들임으로써 지혜롭고 신중한 사람이 된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몇 마디의 훌륭한 말을 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도록 도와 줄 수도 있다.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우리가 정죄해야 하는 자들을 방문하는 것보다, 환난 중에 있어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먼저 방문하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누가 보내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왔다(6:22). 그러나 그들은 욥을 위로하는 방법이 서툴렀으므로 실제로는 형편없는 위로자들이었다. 그들이 조금 멀리서 욥을 보았을 때, 욥의 모습은 악창으로 인해 너무 추하고 보기 흉해서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다'(12절). 심한 병이나 압박을 주는 걱정과 깊은 슬픔이 사람의 안색과 육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까지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가! “이가 욥이냐?” 욥이 이와 같이 처참하게 변한 것을 알았어도 그들을 무서워하거나 혐오감으로 욥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만큼 더 욥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을 보자 욥은 슬픔이 되살아나 다시 울게 되었고 이것은 그 친구들로 하여금 눈물 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그들은 친구가 빼앗기고 능욕당함을 보고 그들 자신이 빼앗기고 능욕당한 자와 같이 되어 ‘자기의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그들은 욥이 번창할 때에 여러번 욥과 함께 욥의 안락 의자와 식탁에 앉았을 것이다. 그처럼 그들이 욥과 함께 기쁨과 풍요로움을 누렸기 때문에 이제 기꺼이 함께 슬픔과 빈곤함을 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록 욥이 지금은 그들을 대접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욥의 환난이 호전되고 끝나는 것을 볼 때까지 욥과 함께 머물기로 작정하여 욥의 옆에 있었다. 그들은 7일 동안 매일같이 환난 가운데 있는 욥의 친구로서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욥과 함께 앉았으나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 단지 욥이 자기의 환난에 대해 푸념하는 것만 듣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함으로써 그들이 침묵 후에 이야기하는 것이 심사 숙고하고 정돈된 많은 생각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한 것 같다. 우리는 한 번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야만 한다. 특히 이와 같은 경우에는 오랫동안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간략하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