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장 새벽예배 설교문] 예수님의 성전정화 작업(요2:12-25)

요한복음 2장 새벽예배 설교문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것을 보시고 성전에서 쫓아냈다.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면서 세상적 이익을 치했던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렸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했다. 우리는 새벽을 깨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영혼을 세상으로부터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새벽예배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복음 말씀으로 정화시켜야 한다.

Ⅱ. 성전과 그리스도 2:12-22

1. 잠간 동안의 가버나움 방문(12)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가버나움을 방문하셨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동네 즉 ‘그의 본 동네'(마 9:1)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갈릴리에서의 본부로 삼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서 거의 쉬시지 않으셨다. 가버나움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합류 지역으로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도록 그러한 장소를 택하셨던 것이다.

(1) 그 지역으로 가는 데 동행했던 사람들은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었다. 어디든지 그리스도께서 가실 때는 홀로 다니고자 하시지 않으셨으며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을 자신의 지도 아래 이끌고 다니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혼자 다니시려 하여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또는 그의 포도주의 달콤함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다(요 6:26). 그의 어머니도 여전히 그를 뒤쫓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중재하고 나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배우기 위해서였다. 결혼잔치에 있었던 그의 형제들과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기적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몇몇의 기적에 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2)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여러 날 머물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이곳 저곳으로 다니셨으며 당신이 일하실 곳을 한 장소로 국한하고자 하지 않으셨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유월절이 다가왔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버나움에 오래 체류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참석하셔야 되었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13-22)

이 유월절은 그가 세례를 받으신 후 맞은 첫 유월절이다. 율법 아래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셨다. 유월절이 가까운지라(13절). 그리스도는 거기서 그 첫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열두 살이 된 뒤로 그리스도께서는 해마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셨었다.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이 마당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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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전을 깨끗케 하심(14-17절)

1) 우리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처음으로 발견하다. 이로 미루어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올라 오실 때까지 공적으로 나타나신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그가 성전에서 처음으로 행하신 일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일이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잘못되어 있었던 것을 말끔히 청소해 내시고 그 후에 그들에게 올바로 행동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이 그 마음들을, 그리고 그 삶과 생활들을 개혁시킬 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성전을 깨끗이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교훈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그렇게 말끔히 씻어 내버려야 할 타락이었는가 살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는 성전 뜰이 시장으로 된 것을 보셨다. 그 뜰은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희생에 쓰일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팔았는데 이렇게 매매하는 일은 일상 용도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먼 지방으로부터 와야 하기 때문에 종류대로 자신들의 희생 제물을 가져 올 수 없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장은 부당 이득을 취하려고 대제사장들이 허용한 시장이었다. 교회안에 그렇게 큰 타락과 부패가 생긴 것은 돈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애착 탓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바꾸었다. 이는 성전 봉사를 위해 반 세겔의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심할 것도 없이 환전을 하여 대제사장들은 돈을 벌어들였다. 우리 주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러한 타락을 축출하셨는지 살펴 보자. 우리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이 그러한 부패를 묵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므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항의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주님 스스로 직접 하셨다.

①소와 양과 그것들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아내셨다(15절). 우리 주께서는 결코 누군가를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완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시나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내몰기 위해서만은 완력을 사용하셨다. 우리 주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는데 아마도 그 노끈은 장사치들이 소나 양을 부릴 때 사용했던 노끈일 것이다. 죄인들 스스로 자기들이 성전에서 내몰릴 때 사용될 채찍을 준비한 것이다.

②그리스도께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셨다. 돈을 쏟아 버리시므로 우리 주께서 그 돈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상을 뒤엎으시므로 종교를 세상적인 이들의 도구로 만드는 사람들을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시는가도 보여 주셨다. 성전 안에 환전상이 있다는 것은 성전의 추문인 것이다.

③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16절).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 참새와 제비는 하나님의 섭리로 성전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시 84:3)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되었던 비둘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성전이 비둘기 집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④우리 주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밝히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여기에 왜 그 사람들이 성전을 더럽혀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장사한다는 것은 거래하는 장소에서 해야 좋은 일이지 성전에서 할 일이 아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행위는 신성 모독 행위요 하나님을 강도질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일은 장엄하고 두려운 것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행위요,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 일은 종교적인 일은 세속적인 이득에 종속시키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사람의 집으로 만드는 자들은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부당한 소득을 노리고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세상적인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 주께서 그렇게 내쫓고자 하신 이유는 성전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써 자기 집에 대한 권리, 즉 그들을 자기 집에서 내쫓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자 “이 집은 내 아버지 집이다. 그러므로 이 집이 더럽혀져 아버지께 욕되게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열심을 내던지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그의 친구중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서 그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고려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들 가운데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의 타락은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정당화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죄인들의 양심은 개혁자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라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전부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확연히 드러나는 신적인 권능, 사람들의 정신을 압도하는 하나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⑤그 일에 대한 제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절). 제자들의 머리속에 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는데 그 구절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행위를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와 함께 이스라엘 왕의 위엄으로써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구절이었다. 이는 다윗이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전에 대한 메시야의 열심이 특심하여 자신을 삼켜 버리기 까지 할 정도라고 말한 구절이다(시 69:9). ㉠제자들은 성경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한 것을 기억하더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가 서로를 설명해 주며 각각을 예증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성경 말씀으로 준비되고 강력하며, 또한 성경의 진리를 기억에 잘 간직해 두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제자들이 기억했던 성경 말씀은 매우 적절하였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구약의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은혜, 특히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이러한 열심이 특별히 그리스도에게서 현저히 나타났다. 하나님의 전에 대한 우리 심령의 열심이 그리스도의 봉사에 필적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 열심으로 해서 우리의 위신이나 편안함이나 안전함을 조금도 구하지 않게 되며 우리 몸이 따라가 주지 못할 만큼 아주 멀리, 아주 빠르게 우리 심령이 먼저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를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자들에게 하나의 식별하는 표적을 주셨다.

1) 표적에 대한 저들의 요구 :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18절). 이 유대인들은 다수의 민중과 그 지도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그 일 자체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반대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행하는 그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묻고 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이곳에서 아무런 직책도 없는 자가 그러한 일을 하나니 그렇게 할 무슨 권리, 무슨 증명서를 가지고 있느냐. 그러나 그 일 자체로 표적은 충분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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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19절) : 장치 있게 될 사건에 대한 표적, 그 표적의 진상은 그 사건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표적은 당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그 징표가 될 것이라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평범한 용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상징적 표현을 사용해서 예언하고 계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와 같이 우리 주께서는 의식적으로 알지 않으려 하는 자들에게는 깨닫지 못하도록(마 13:13,14) 비유로 말씀하셨다.

보고자 아니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쓰인 이 상징적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 피고인 신분으로 심리를 당하실 때 그에 대한 증거 자료로 쓰일 만큼 그들에게는 걸림이었던 것이다(마 26:60,61).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는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적개심으로 인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든 고난에 대하여 분명한 예지를 지니셨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격려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세상에는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일어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성전을 파괴하고 재건한다는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표현하신 이유는 그 사람들이 더럽힌 성전을 깨끗이 하는 일이 자신으로서는 정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시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한 성전을 더럽힌 너희들은 너희가 부수어 버린 성전을 다시 일으키므로써 너희가 오염시켜 놓은 오물들을 치워 버리는 내 권위를 입증하겠노라.”

3) 그들의 무지 :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20절) : “성전 공사는 항상 진척이 느린 공사였는데 당신이 성전 공사를 그렇게 빨리 이룰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공사가 그야말로 오랜 시일을 요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본의에 대한 무지요, 둘째는 마치 그분이 다른 사람 이상의 무슨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무지였다.

4) 저들의 협잡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에 대한 변호 :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혹자는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을 때 곧 자신의 육체를 가리키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성전과 같이 성전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지음 받았으며 성전과 같이 그것은 거룩한 건물이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것이라 일컬어진다. 그것은 성전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신 처소였다. 즉 거기에는 영원하신 말씀이 거하였다.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시다.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들이 그 집을 향해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눈을 그리스도께 돌려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5) 제자들이 훗날에 이 일을 회상함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제자들의 뇌리 속에 담겨 있는 기억들은 새것과 옛것을 그 공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의 보화같은 것임에 틀림없다(마 13:5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 말씀을 간직해 두었으며 뒷날 그 말씀은 지혜롭고 쓸모있게 되었다. 배움의 길에 있는 후진들은 현재 배우고 있는 진리의 의미와 용도에 대하여 잘 깨닫지 못하더라도 금후엔 그 지식들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그 지식의 보화들을 잘 간직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드을 기억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밝히 깨닫게 하셨다(눅 24:45). 둘째, 그리스도의 하신 이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이었다. 성전된 그의 몸이 헐어지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났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 기억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었지만(눅 24:25) 확실히 믿었다.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기 함께 병행하여 서술되어 있다. 이는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서로 상호 예증하며 서로가 서로를 보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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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그리스도의 사역과 처신 2:23-25

1.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심(2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는 동안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이때는 성별된 때 즉 유월절 축제의 날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집결하는 이 때를 설교의 기회로 이용하셨다.

2. 많은 이가 그를 믿게 됨(23)

이렇게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이 니고데모와 같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믿게 되었다(3:2)

3. 저들을 의탁치 않으심(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이러한 새로운 회심자들에게서 마음 놓고 쉴 만한 근거를 찾지 않으셨다. 이는 첫째, 적어도 그들 중에 몇몇은 거짓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들보다는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 중에 더욱 믿을 만한 제자들을 많이 두고 계셨다. 둘째, 사람들의 연약함을 아신 까닭이었다. 그 사람들은 겁이 많았으며 열심과 용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곤란하고 힘든 시기에 겁쟁이는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들은 쉽게 동요하였으므로 사려와 자제력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의탁치 않으신 이유(25)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신 이유는 주께서 저들을 친히 아셨기 때문이요, 그들의 사악함과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되 그들의 이름과 얼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성, 성향, 감정, 의도 등에 대해서까지 알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전자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그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잘 아시되 그들의 고결함도 그들의 연약함도 모두 아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25절). 그리스도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확실한 직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 우리들이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겉으로 나타난 사실들만 아는데 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계시다.

이렇게 환자들의 상태와 경우, 안정과 불안 등에 대해 완벽히 알고 계신,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런 일이며, 또 얼마나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시겠는가! 다시 말해서 환자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이가 우리의 구주요 의사가 되시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적절한 일인가! 주께서 그의 성전에 오실 때 아무도 그에게 나아오지 않으나 오직 연약하고 순박한 백성들의 무리만은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을 신뢰할 수도, 그 사람들에 대하여 확신할 수도 없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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