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설교 말씀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증거 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Ⅰ. 예수의 신성 1:1-5
이제 이 힘찬 그의 내용을 살펴 보자. 여기에서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입증하고자 하는 위대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함께 계신 분임을 주장한다.
1. 말씀(1)
요한의 기록 가운데 독특하게 쓰이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이란 단어이다. 일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가르침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복음서 기자는 18절에서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말에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과 입밖으로 발설된 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품고 있는 말이란 곧 생각으로서 영혼이 최초로 즉시 떠올리는 산물이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중 제 2위 되시는 이를 말씀이라 칭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가 성부 하나님의 첫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생각한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이 없으며, 우리가 어떻게해서 사고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만큼 더 모호한 사실이 없다. 누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 속에서 생각이 발생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원한 정신에서 발현되고 탄생되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끝을 잴 수 없는 신성의 위대한 신비로 여길 수 밖에 없으며 그 끝없는 깊이로 인하여 더욱 경모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입 밖으로 나온 말 즉 발설된 말이란 그 마음 혹은 정신이 품고 있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주요하고 가장 자연스런 표시인 연설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히 1:2). 사람이 자기의 언어와 연설로 자기의 생각을 알리듯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소리였으나 그리스도는 말씀이셨다.
2. 말씀은 곧 하나님(1-5)
(1) 말씀의 선재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절). 이 말씀은 말씀이 성육신 이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에 앞서서 계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세상은 태초부터 존재했으나 말씀은 태초에 이미 계셨다. 다시 말해 세상이 있기도 전에 말씀은 계셨던 것이다. 태초에 이미 계셨던 말씀은 결코 시작도 없으셨으며 그러므로 영원히 계셨던 것이다.
(2) 성부와 더불어 계심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이 말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는 2절 말씀 속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영원부터 그렇게 함께 계셨다는 말이다. 태초에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되었지만 말씀은 항상 그러했듯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가? 첫째, 말씀은 하나님이시므로 본질(essence)과 실체(substance)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둘째, 만족함과 지고의 복된 상태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거기에는 영광과 복락, 즉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영광과 복락이 있었다(17:5). 셋째, 뜻과 계획에 있어서 함께 하셨다.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웅대한 사업이 영원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협의되어 있었다.
(3)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말씀의 역할(3절) : 여기 3절 말씀에서 창조 사역에 있어서의 말씀의 역할이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주장이다.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세계를 출범시키는 신적인 역할 수행에 있어서 능동적이셨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 피동적인 도구로서 쓰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한 몸에 딸린 눈으로 사물을 보듯 유기적으로, 상호 협력적으로 일하신 것이다. 둘째, 하늘의 천사로부터 미천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예의란 없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말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수행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 점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탁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기도교의 탁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창시자요, 기초자가 바로 만물의 창조자요 기초자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구속과 구원 사역에 있어서 말씀이 가장 적격자임을 보여 준다.
(4) 빛과 생명의 근원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이 사실은 더 나아가 말씀이 하나이심을 증명한다. (1) 그는 자신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참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2)모든 생명체는 말씀 안에 그 생명을 가진다. 즉 피조계 안의 모든 생명은 그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사람은 바로 이 말씀에 의해 빵만으로 사는 삶 이상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마 4:4). (3) 이성적 피조물들은 그 빛을 그로부터 가진다. ‘사람들의 빛’인 그 생명은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단지 동물적이 아니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보다 훨씬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다.
이 인간의 영혼은 여호와의 촛불이며 이 촛불에 불을 밝힌 것은 바로 영원하신 말씀이셨다. 감각있는 생명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빛 역시 그로 말미암는다. 타락하여 어두움과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우리에게 있어서 신령하며 영원한 생명과 빛은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말씀이 구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분이심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사람다운 이성의 빛을 주신 그 분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 우리가 신성한 계시의 빛을 바랄 수 있겠는가?
(5) 인생들에게 나타난 말씀(5절) : 세상을 창조한 말씀이 세상에 왔는데 왜 이렇게 무시를 당했는가? 이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도 영원하신 말씀은 타락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었다. 첫째, 하나님으로서 영원하신 말씀은 중생치 않은 자연적인 양심의 어두움을 비추고 계시다. 모든 인류는 신성한 말씀의 권세에 대하여 무엇인가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둘째, 구약의 계시와 언약을 통해서 영원하신 말씀은 어두움에 비추셨다. 어둠을 밝히라고 이 세상의 빛에 명하신 그 분 자신이 오랫동안 어둠을 비추던 빛이셨던 것이다.
2) 이러한 비췸을 깨닫기에 타락한 이 세상은 너무도 무능력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죄와 오류의 어두움이 너무 지나쳐서 이 빛이 아예 가리워져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둠 속을 비추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 빛을 헛되이 받고 있다. 구약의 빛을 가족 있었던 유대인들 조차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 세계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유대교가 지니고 있던 진리를 보강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오셔야 했다.
Ⅱ. 세례 요한의 증거 1:6-14
복음서 기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훌륭한 증거를 하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증거의 성격(6-8)
그는 세례 요한이 하고자 하는 증거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제시한다. 요한이란 이름은 은혜로운 또는 자비로운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 일반적으로 말해서 요한은 하니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불리운다. 복음서 기자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하지만 요한은 사람,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messenger)였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사명과 전할 내용을 주셨다. 세례 요한은 아무런 기적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의 생활과 가르침의 엄정함과 순결함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확연히 나타내 주었다.
(2) 요한의 직책과 일(7절) :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유대교회에서는 오랫 동안 율법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증거였었다. 그러나 이제 신성한 계시가 다른 채널을 통하여 증거되게 되었다. 사실상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 내셨으나(행 14:17) 구세주로서는 나타내지 않으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증거하기 전까지는 구세주에 대해서 깊은 침묵이 있어 왔던 것이다.
1)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 :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빛은 스스로 자기를 증거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빛도 결토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지만 어두운 이 세상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한다. 눈을 감고 있어 스스로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빛에 대하여 들려 줌으로서 빛을 깨닫게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마을 사람들을 깨우며 새벽녘 햇살이 찾아 들고 있음을 알리고자 온 마을을 두루 다니는 야경꾼이라 할 것이다. 그는 생명과 불멸을 가져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었다.
2) 증거의 목표 :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7절).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즉 자기를 거쳐서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라고 가르쳤다. 이 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는 이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을 통하여 믿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게 하려는 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이었다.
(3) 요한은 그 빛이 아님(8절) : 그는 이 빛이 아니요. 그는 그 빛이 아니라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요한은 우리가 기대해 왔고 약속받은 그 빛이 아니라 다만 그 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이다. 그는 동방 박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준 새벽별과 같은 역할을 맡은 존재였지 태양은 아니었다. 복음서 기자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큰 영예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그리스도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세례 요한 역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위대한 존재임에 분명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사역자들, 즉 주님의 일군들에 대해서 과소 평가해도 안되겠지만 지나치게 높여 주어서도 안된다. 일꾼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요, 다만 그들에 의해서 우리가 믿게 되는 사역자일 뿐이다. 사역자는 우리 주님의 집의 청지기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관할하는 지배자들이 아닌 것이다. 청지기에 불과하면서도 그 주인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횡령하는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영광을 박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그 빛에 대한 증거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이렇에 전해 받은 빛을 잘 비추어 주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가장 필요한 인물인 것이다.
2. 성육신(9-14)
세례 요한은 증거를 기록하기에 앞서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은혜의 사건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께 대하여 부연 설명을 한다.
(1) 참 빛이신 그리스도(9절) :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시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거짓된 빛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요한도 물론 빛이요, 작은 빛이었으나 요한에 비해 그리스도는 참 빛이라 불릴 만한 위대한 빛이시다. 다른 빛들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모호하게 빛이라 불린다. 거기에 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참 빛이다. 참 빛만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요 모든 위로의 근본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각 사람을 어떻게 빛에 눈뜨게 하시는가? (1) 창조의 권능으로 그리스도는 만민에게 이성의 빛을 비추신다.
이성의 빛이 우리에게 입혀 주는 모든 아름다움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다. (2) 만국에 복음을 공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비추신다. 빛으로 비유 되는 세례 요한이 방 하나 만을 비추는 촛불과 같이 유대와 예루살렘만 비춘 빛이었던데 비해, 그리스도는 이방 세계까지 빛을 비추시는 참 빛이신 것이다. 이제는 신성한 계시가 과거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까지 확산된 것이다(마 5:15).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빛은 그 빛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 세상에 계셨던 그리스도(10절) : 원칙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도 만물을 주관하시며 말씀으로서 세상에 계셨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을 취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내가 세상에 왔노라’하는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축복의 세계를 떠나 이 비참하고 우울한 세상에 오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셨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셨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이 세상이 가장 명예롭게 여길만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사랑과 존경이 어린 환영을 받아 마땅했다. 이 세상은 그에 의해 지음 받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바로 그에 의해 지음받은 세상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길 잃은 이 세상을 구원코자 오신 것이었다. 세상은 그에 의해 지음받았으므로 마땅히 그분께 경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냉대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받은 것이었으며 그가 오셨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소라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 법이련마는 짐승만도 못한 세상은 그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아니했다. 그러나 앞으로 그가 이 세상에 심판자로 오실 때 세상은 그분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3)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리스도(11절) :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으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소유인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다.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소유된 백성에게 오셨다. 그들은 그의 소유된 백성이므로 그들을 찾아 구원키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으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서 환영을 기대할만한 자격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기적과 표적으로 자신이 그 분임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10절).
그리스도의 소유된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모를 수가 없었으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 했던 것이다. 자기의 죄를 인정치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 즉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그리스도께 순종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으나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참된 표시와 속성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선하며 참된 것으로 영접해야 하며 우리의 감정과 행위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특질은 다음의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1) 양자되는 특권 :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이 양자되는 특권이 과거에는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관계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권리를 이방인에게도 주심으로써 모든 성도는 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야 말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의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도 원래는 비참한 이 세상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지음을 받는다는 말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자녀라 일컬으시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이러한 양자의 특권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이 권세를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시사 인간의 자녀들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2) 중생의 특권(13절) :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다시 태어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양자된 자들은 거듭난다. 여기에서 이러한 중생의 독특성을 살펴 보자. ①소극적으로 말해서 중생이란 첫째, ‘혈통에 의해서도, 육정의 뜻에 의해서도, 썩어질 씨(벧전 1:23)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혈육을 가진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은 같지 않다. 인간의 오염이 자손 대대로 전해지듯 은혜가 핏줄을 타고 흘러 내리지는 않는다. 성화되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성화되고 거듭난 자식을 낳지는 못하는 것이다.
둘째, 의지라는 우리 자신의 생태적인 힘에 의해 생산되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생은 혈통적인 것이 아니듯이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중생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러한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위대하고 유일한 창조자이신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요일 3:9;5:1).
(4) 육신이 되신 말씀(14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구절은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욱 명확하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표현했다. 때가 차매 ‘여인의 후손’이라는 다른 모습으로 말씀이 자신을 드러내셨다.
1) 그리스도의 인성 : 그리스도를 감싸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인성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혈육에 속했던 자들이었듯이 그리스도 역시 그들과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다(히 2:14).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예수가 “사람이었으되 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반하여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셨으나 육체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1절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진정으로 사람이 되사 자신을 사람의 본성이 가지는 비참과 불행에 복종시키셨다. 육신으로 죄로 오염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세상에 임하셨던 것이다(롬 8:3).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으며'(고후 5:21) 그리하여 ‘육신에 있는 죄를 정죄하신 것이다'(롬 8:3).
육신이 되신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육신이 되셨다 해서 결코 여호와의 말씀이시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말씀이 우리 사이에 거하셨다. 말씀이 사람의 속성을 입으심으로써 인류의 위치와 상태 속으로 들어오셨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동일한 몸을 취하시고 그 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영원하신 말씀이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우리, 타락하여 오염된 우리, 하나님께 반역한 우리들 사이에 거하셨다. 우리가 보다 우월한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이러한 육신, 이 몸, 또한 우리의 운명이 내던져져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은 얼마나 비천하고 못마땅하게 보이게 될 것인가!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세상에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주시는 한 우리 역시 육체를 입고 기꺼이 살아야 함을 말해 준다. 말씀은 유대 민족 가운데 거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를 환대하지 않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여행자가 하룻밤을 지새기 위해 우리 곁에 잠시 머무르듯 하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원어를 살펴보면 장막 안에 거했다는 말뜻이다. 양치기가 천막에서 지내듯 이곳 세상에서 매우 비천한 상태로 지내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러한 머무름은 영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향에서 머무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족장들처럼 장막에서 머무셨다(히 13:13-1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옛날 모세의 성막에 거하셨듯이 이제 말씀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거하셨다. 그리하여 구약의 모든 성도가 성막에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이다.
2) 육의 베일을 뚫고 드러난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의 광채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양은 구름이 그 빛을 가리고 있거나, 일식 현상으로 가리워진다 해도 여전히 그 빛의 근원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육신을 입고 계셨지만 여전히 성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셨다. 또한 그 베일을 뚫고 그 영광의 광채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그를 단지 육체로만 알았다.
①이 영광의 증인들은 누구였는가 : 이들은 우리 즉 그의 특별히 뽑으신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었으며 이 ‘우리’ 사이에 예수께서 거하셨다. 흔히 사람들이 자신과 친숙한 사람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는 데에 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라는 인간만을 보는 것에 그친데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의 신성의 영광을 보았다.
②그에 대하여 그들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었나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그 사람들은 기록은 살펴 간접적으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니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니 목격자들이었다. ‘우리가 보니’라는 이 말씀은 눈을 고정시켜 주목하여 보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요한 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1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③그 영광의 성격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육신이 되신 말씀의 영광은 다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 거기에 비하여 신자들은 양자로 삼아 주시는 특별한 사랑과 중생의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믿는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벧후 1:4), 하나님의 완전성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나, 유사한 본성임에 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이 분명하게 선포되었으며,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 그 사실은 그의 영광의 성격으로 드러났다. 그의 신적 영광은 그의 가르침의 거룩성과 천상적 성격에, 그리고 그의 행하신 기적에 나타났으며 그의 모든 언행의 순결함과 선함, 유익함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선을 행하려 두루 다니셨다. 복음서 기자는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변화산의 변용사건을 심중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그 역시 한사람의 증인, 곧 목격자였다(벧후 1:16-18).
④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셨던 우리들에게 이 사건이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 시대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옛 장막에는 율법이 있었지만 이제 육신의 장막에는 은혜가 있으며 옛 장막에는 은혜가 있으며 옛 장막에는 모형이 있었는데 반하여 지금 이 장막에는 진리 즉 참이 있었다. 그리스도에게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사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리스도에게 은혜가 충만함으로써 그는 우리를 중보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으며, 진리가 충만함으로써 우리를 교훈하시기에 적절하셨다. 그리스도는 지식이 충만하실 뿐 아니라 자비도 충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