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12제자 선택(막3:1-35)

마가복음 3장 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유한 사건과 12제자를 선택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것은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예수님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죄는 영원히 좌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Ⅰ. 치유의 기적과 그리스도에게 몰려든 군중 3:1-12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주 예수께서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신 뒤 바닷가에서 가르치는 바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예수님이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어디든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심을 가르쳐주고 있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실 때’ 그는 그곳에서 얻은 기회를 선을 행하는 데 이용했다(1-6절).

1) 그 병자의 처지는 비참했다. 그는 손 마른 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손으로 생계를 위하여 일할 수 없었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전도서 1장 인생의 허무함 설교말씀

2) 구경꾼들은 그 병자뿐 아니라 의원인 그리스도에게까지 몹시 불친절했다. 그들은 가련한 이웃을 협조하기 보다는 그가 병을 고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안식일에 그를 고칠 경우 그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자로 고소하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구경꾼들을 아주 공정하게 대했으며 가능한 한 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먼저 그들을 상대했다.

① 그리스도는 구경꾼들의 그릇된 판단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구경꾼들이 그 병자를 보고 동정심을 일으키도록 그리스도는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했다. 그런 뒤에 그는 그들의 양심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보다 더 적절한 질문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질문이 그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잠잠하였다.

② 그들이 빛을 대적했을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완악함을 슬퍼하셨다. 그래서 그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셨다'(5절). 그가 주목했던 죄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이었다. 우리는 잘못 말한 것을 듣고 잘못 행해진 것을 보지만 그리스도는 마음속의 고통의 근원인 마음의 무지와 완악함을 보신다. 첫째, 그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어떻게 노했는지 알아 보자. 그리스도는 저희를 둘러 보셨을 때 ‘노하심’으로 보셨다.

그리고 그의 노하심은 아마도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죄인들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노하게 한다. 우리가 화를 내고도 죄짓지 않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단지 죄에 대해서 화내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어떻게 동정했는지 알아보자. 그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 우리 주 예수는 죄인들이 멸망에 빠진 것을 보실 때 몹시 슬퍼하신다. 그는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좋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 슬퍼해야 한다.

4) 그리스도는 그 병자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그리스도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자 그의 손은 즉시 회복되었다.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리 반대가 격렬하다 해도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 확고부동하게 밀고 나갈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가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는 일을 단념해선 안된다. 그리스도 보다 남을 노하게 하지 않도록 더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가련한 병자를 치료해 주지 않은 채로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에워싼 모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노하게 하셨다. 이 일을 통하여 그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병을 고쳐준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들의 손들은 영적으로 메말라 있으며 우리들의 영혼도 죄로 말미암아 허약해졌다. 우리의 손이 메말라서 우리 스스로 그 손들을 내밀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손을 내밀도록 시도해야 하며 가능한 한 손을 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매달려 영생을 얻도록 해야하며 그 손들은 선한 일에 써야 한다. 이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도록 노력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메마른 손을 치료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메마른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병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5)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매우 야비하게 그들 대했다. 그리스도가 베푼 자비를 보고 그들은 그를 사랑했어야 했으며 그리스도가 행한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들은 그를 믿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6절)

(2) 예수께서 바다로 물러가셨으나 그곳에서 선을 행하셨다(7-12절).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곳을 물러나셨는데, 이 사실은 우리가 환난을 받을 때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1) 예수께서 물러가셨을 때 무리가 그를 어떻게 따라갔는지 알아보자. 예수님에게 증오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그를 자기 지방에서 쫓아냈지만 예수님을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그가 어디를 가든 그를 따랐다. ‘허다한 무리’가 유대 전역에서 그를 좇았다.

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를 좇게 하였나. 그것은 그들이 ‘그의 하신 큰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그렇게 큰 일을 행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 사람들도 있고 또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해 큰 일을 행하기를 바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큰 일을 생각할 때 우리도 그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② 왜 그들은 그를 좇았나.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10절). 여기서 사용된 병이란 말은 천벌, 징계, 징벌이란 뜻을 지닌 말로 사용된다. 이와 같은 징벌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왔다. 이 징벌은 병을 심부름꾼으로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안부를 묻도록 자극하고 또 우리의 의원인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도록 한다.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그를 ‘핍근히 할’ 정도로 그들은 각기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먼저 병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만지기 만을 갈망했다.

③ 그리스도는 아무 때라도 그들을 돌보기 위하여 무슨 준비를 하셨나. 그는 호기심 때문에 따라온 무리들로 말미암아 밀리지 않고 같은 해변가에서 여러 장소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다(9절). 이와 같이 현명한 사람들은 가능한 한 군중을 피한다.

2) 예수께서 물러가셨을 때 그는 얼마나 많은 선을 베풀었는지 알아보자. 그는 게으름을 피우려 물러난 것이 아니며 또 그가 물러났을 때, 그를 따르기 위하여 마구 모여든 사람들을 돌려 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그를 찾아 온 목적을 친절히 받아들이고 그 목적을 해결해 주셨다. 그는 결코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에게 ‘네가 나를 헛되이 찾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첫째로 여러 병들이 효과적으로 치유되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막 1:34). 둘째로 마귀들이 효과적으로 굴복당했다.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예수님 말씀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때 그 앞에서 몸을 떨었으며 그의 호의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진노하지 않도록 빌기 위하여 그 앞에 엎드렸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그 큰 일들을 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찬사를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큰 일들을 하여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셨기 때문이다(12절).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이 신문 광고처럼 병 고친 소식을 퍼뜨리는 데 열심을 내지 말도록 경고하신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그가 행한 일로 말미암아 그를 찬양하게 하고 그 소문이 소문을 낳아 스스로 퍼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구경꾼들이 그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하게 한다.

Ⅱ. 열두 사도를 택하심 3:13:21

(1) 그리스도께서 충실한 제자인 동시에 수행원이 될 열두 사도들을 선택하신다(13-19절).

1)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부르거나 승격시킬 때 하신 준비 : 그는 ‘산에 오르사’ 그곳에서

기도하고자 하셨다.

2)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선택할 때 매우 기뻐했던 기준 : 그는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그는 ‘우리가 부름에 합당하다'(엡 4:1)고 생각한 자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르시게 된 그 일에 합당하다고 결정한 자들을 택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다.

3) 부르심의 효력 :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스스로 무리로부터 떨어져 자기 곁에 서도록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그리스도는 그가 원하는대로 부른 자들이 기꺼이 나아오도록 하셨다.

4) 이 부르심의 목적과 의도 : 그리스도께서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14절) 자기의 교훈과 생활방식과 인내를 충분히 알도록 그 증인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교훈을 받도록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예정한 일들을 그들이 감당하려면 시간을 요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해야 한다.

5) 그리스도가 그들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도록 주신 권세 :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세우셔서 ‘병을 고치고( 이 말은 흠정역에 나옴- 역주) 귀신을 내어쫓게’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본래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곧 그는 그 권세를 종으로서가 아니고 그의 아버지 집의 아들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자기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한량없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의 약한 것들과 미련한 것들(고전 1:27)에게까지 이 권세를 줄 수 있었다.

6) 제자들의 수효와 이름 :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수효대로 열 둘을 세우셨다. 여기서 지명된 그들의 이름이 마태복음과 같은 순서대로 나오지는 않지만 마태복음에서처럼 이 마가복음에서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오고 유다는 맨 나중에 나왔다. 이 마가복음에선 마태가 도마 앞에 놓였지만 마태가 자신을 묘사한 마태복음에선 자기 이름을 도마 뒤에 놓았다. 그러나 이 사도들의 목록 속에서 마가만이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그리스도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로 불렀던 점이다. 아마도 그들은 크고 당당한 음성 때문에 주목에 받았거나 놀라운 능력을 지닌 복음 전파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레의 아들이란 말은 오히려 그들의 열렬한 기질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우레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은 그의 서신들 속에 나타난 것처럼 사랑과 온유로 가득찼으며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7) 주님과 함께 물러나 주님을 더욱 신봉하는 제자들 : 그들은 집에 들어갔다. 이 배심원들이 뽑혔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증거를 심리하기 위하여 나란히 섰다.

(2)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따라 다니는 무리들(20절) : 무리가 다시 모여 특별한 목적도 없이 아무 때나 그를 핍근히 하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간청자들을 막기 위하여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그들을 환대하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마음이 넓어진 사람들은 그 일을 수행할 때 자신들에게 매우 불편한 것들을 쉽게 견딜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열성적인 청중들과 열성적인 전도자들이 만나서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때야말로 활용할 만한 가치를 지닌 최고의 기회였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드려야 좋다.

(3) 그리스도에 관한 친속들의 염려(21절) : 가버나움에 있는 예수의 친속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집으로 데려 오려고 붙들러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미쳤다고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1)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예수를 존경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하는 아주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염려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염려를 그가 미쳤다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해해야 한다. 곧 그의 친속들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큰 열심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소문을 듣고 그가 미쳤다는 결론을 서슴없이 내렸던 것이다.

2) 그 염려를 좋은 의미로 염려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원어인 에케스테(미쳤다)를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 때문에 그가 실신했다고 해석한다. 곧 “그는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질식한 정도로 힘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그 사건을 왜곡시켜 그에게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자”고 그들은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왕성한 열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적들이 품은 근거없는 불평은 물론이고 자기 친구들의 그릇된 애정 때문에 생기는 방해도 예상해야 한다.

Ⅲ. 예수님에 대한 오해 3:22-30

1. 그리스도가 귀신을 쫓아낸 일에 대하여 서기관들이 씌웠던 뻔뻔스럽고 불경스런 오명(22)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이었다(22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퍼지는 것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렇게 긴 여행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가장 지적이고 학식있는 서기관들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내려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흉계를 꾸밀 역량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의 명성은 지방 백성뿐 아니라 지방 서기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귀신을 내어쫓는 일만은 부인할 수 없었으므로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22절)고 빗대어 말했다. 이 주장 속엔 하나의 음모가 숨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고 동의하여 나간다는 뜻이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2. 이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절한 응답(23-27)

(1) 사단은 매우 교활하므로 결코 자발적으로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23,24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저희를 불러다가 모든 입을 막기 위하여(롬 3:19) 그들을 설득하려 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귀신의 왕국과 싸우며 그의 권세를 꺾으려는 직접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몸에서 그 귀신을 쫓아내어 그 교훈을 확증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은 사단이 직접적으로 자기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비유 설교말씀

(2) 그리스도는 매우 현명하시므로 사단과 싸우게 될 때 그 사단의 군대가 사람들의 몸에 있는 영혼에 있든 그들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그들을 공격하신다. 분명 그리스도의 계획은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는 것'(27절)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강한 자를 결박’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는 그리스도가 그를 굴복시켜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3. 그들이 얼마나 위험스런 말을 했는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두려운 경고(28-30)

아무리 그들이 추측으로만 하는 말과 방종한 생각을 갖고 하는 위험한 말들을 가볍게 여긴다 해도 만일 그들이 그 말을 계속 주장하면 그 말은 그들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말은 마지막 구제도 받을 수 없는 죄가 되어 결과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그는 아무리 큰 죄와 죄인들도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다(28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욕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성령의 역사로 하신 일이므로 서기관들의 말은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으로 말미암아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했기 때문이다(30절).

Ⅳ.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 3:31-35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생각게 한다.

(1)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고 계셨을 때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친속들은 그에게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렀던’ 것이다(31절).

(2) 이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영적인 친속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때에 그리스도는 다른 때처럼 그의 모친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는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그들에게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했다(33-35절).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속들 만큼이나 존중 받고 사랑받으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경회하는 자들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좋은 이유이며 또 우리는 영광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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