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의 찬가(아2:1-17)

아가서 2장 성경 좋은 말씀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찬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ㄹ 남자들 중에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다고 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다고 했다. 또한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다고 말했다. 솔로몬 왕은 구속사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모형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술람미 여인처럼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의 말씀으로 기뻐하면서 즐거워하게 된다.

Ⅰ. 자신과 교회에 관한 표현 2:1,2

(1)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독생자이신 그는 여기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이것은 그가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나아오기 쉬우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수선화’는 원문에 장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에 있어서 모든 꽃들 중 으뜸이며 ‘백합화’는 우리 구주께서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답다고 하신 꽃이다. 그리스도는 ‘사론의 수선화’이시다.

사론은 가장 훌륭한 장미들로 유명한 곳이므로 어떤 역본에는 ‘들판의 장미’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으로 인한 구원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닫혀진 정원 안에 핀 장미가 아니셨다. 그는 순결하기로 ‘백합화’같이 순결한 그는 또한 ‘골짜기의 백합화’같이 향기로우시다. ‘골짜기’는 낮은 곳으로서 그의 겸손하심을 암시해준다. 겸손한 골짜기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가 백합화인 것이다.

유다서 1장 거짓 그리스도를 조심하라 헬라어 원어성경말씀

(2) 그의 교회도 백합과 같다. 그리스도 자신은 백합화이셨으며(1절) 성도들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에 있으므로 그들 또한 백합화같다. 즉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넘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다. 장미 한 송이가 가시덤불보다 낫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른 어떠한 집단보다 훨씬 뛰어나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2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는 사악한 세상의 딸들이 쓸데없고 무가치하며 해롭고 귀찮은 이 가시나무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가시나무에 긁히고 찢긴, 가리워져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백합화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사랑받는 자들이지만 아직도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Ⅱ. 교회의 간구 2:3-7

(1)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을 칭찬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를 좋아한다.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3절). 사과나무는 맛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사람에게 이로운 혜택을 주는 반면에 다른 나무들은, 심지어 백향목조차도 잘리우기 전에는 그 자체로써 거의 효용 가치가 없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2)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누렸던 풍성한 안위를 기억한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목자들도 때때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 예수의 곁에 가까이 앉음으로써 다음 두 가지의 이득을 얻었다.

1) 상쾌하게 해주는 그늘에 앉았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큰 나무의 그늘이 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쉴 수 있다. 우리는 그 그늘에 앉아 크게 기뻐하며 그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2) 맛있고 영양있는 실과를 먹었다.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나무는 그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열매를 떨구어 주었는데 그것들은 아주 맛이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는 달다. 용서함, 양심의 자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성령의 기쁨, 영생에의 소망, 그리고 그것을 현세에서 미리 맛보는 것은 영적인 감각이 발달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척 단 것이다.

(3) 그녀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였기 때문에 모든 유익과 안위를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4절). “나는 사과나무 밑에 앉았을 뿐인데 그가 나를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노라.”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어떤 율법 학자는 ‘잔치집’이 백성들이 모이는 서막이라고 해석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것을 복음이 가르쳐지고 복음의 계명들이 지켜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볼 수 있으며 특별히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잔치집’에 갈 수 없으며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그는 우리 머리 위에서 기를 흔들며 인도하셨다. 복음은 ‘기’, 혹은 ‘기호’로 비유된다(사 11:12). 이 기가 의미하는 바는 곧 ‘사랑’이며 이것이 잔치집에서의 즐거움이 된다.

(4)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가 품고 있는 열정적인 사랑을 고백한다(5절).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라. 그에게 흠뻑 빠져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여, 포도주나 향기름 혹은 꽃이든지간에 나를 소생시키는 것으로 내게 머물러 계시옵소서. 사과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열매로, 곧 그리스도의 은혜와 중재로, 그리고 내 영혼을 사랑하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5) 그녀는 혼절에서 깨어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권능과 부드러움을 맛본다(6절). 그가 잠시 떠났던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때 다시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6절). 머리를 지탱해 줄뿐만 아니라 베개로서 편안하게 기댈 수 있게 하신다.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왼손으로 머리를 받쳐 주는 동안에 오른 손으로는 그녀를 안음으로써 의심할 여지없는 그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의 받쳐 주는 왼손과 안아 주는 오른손으로부터 힘과 안위를 얻는다.

(6) 사랑하는 자가 그렇게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된 그녀는 그와의 교제가 방해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7절).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너희에게 부탁한다. 그녀는 ‘노루와 들사슴으로’ 부탁하는데 그것들은 그들 눈에 사랑스럽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사랑스러운 사슴과 뛰노는 노루라고 표현될 만큼 보기에 좋은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달콤한 것인 줄 경험해본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복된 방문이 지속되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주님의 재림 원어성경 설교문

Ⅲ. 사랑을 확인한 신부의 환희 2:8-13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좀더 가까운 교제를 나눈다는 생각에 기뻐한다.

(1) 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기뻐한다(8절). 그녀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내게 자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그녀는 또한 그가 오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성자들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리라고 예견한 것에 매우 잘 비교될 만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그의 날을 보고는 기뻐하였었다. 신앙의 눈으로 이스라엘에 위안이 될 만한 것을 찾던 자들은 그가 오시는 것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매우 경쾌하게 다가왔다. 그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이 껑충껑충 뛰면서 왔다.

그는 즐거워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발견하시는 듯이 보였다. 그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 건너왔다.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8절). 그는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왔다. 율법의 저주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 하고 흑암의 권세들과 싸워야 했지만 사랑을 펴시려는 그의 결심 앞에 이 험난한 산들은 평지가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를 널리 전파하려는 것이 어느 때, 어떤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뚫고 나가신다. 그는 노루와 어린 사슴같이 빨리 왔다. 그들은 그 시간이 꽤 길다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그는 실제로 서두른 것이었다.

(2) 그녀는 그를 흘끗 보고는 흐뭇해하였다.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노라. 왜냐하면 그는 종종 창으로 들여다 보고 창살 틈으로 엿보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메시야가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던 구약 시대의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은 그와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와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예배소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고 계신 것과 창살 틈으로 미소짓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들의 제물과 성결함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고 그의 은혜를 암시하시며 넌지시 보여 주셨다. 성례식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와 가까이 계시나 외적인 의식의 벽 뒤에 계시며 창살 틈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렇지만 우리는 곧 그를 확실히 만나게 될 것이다.

(3) 그녀는 그가 함께 가자고 초대한 말을 다시 반복한다(10-13절).

1) 그는 그녀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 주신다. 그는 자기에게 쏟아진 사랑을 추호도 잃음이 없이 다시 사랑해 주신다.

2) 그는 그녀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권한다(10,13절).

3) 그는 봄이 돌아온 사실을 알리고 화창한 날씨를 즐겁게 읊는다. 본 날씨가 매우 우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겨울도 지나고. 어둡고 춥고 황량한 겨울은 지났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똑같이 견디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봄은, 만일 그것이 겨울 뒤에 오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는 그리 크게 즐거워할 것은 못된다. 즉 겨울 뒤에 온다는 사실이 봄의 아름다움을 훨씬 더 빛내 주는 것이다(전 7:14). 비도 그쳤고. 겨울에 내리는 차갑고 험악한 비도 이제는 그쳤다. 이제는 풀잎 끝에 영롱하게 달려있는 이슬이 있을 뿐이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꽃들은 겨울 내내 죽어 뿌리만 남은 채 살아 있는 아무런 기미도 없지만 이 봄에 다시 소생하여 아름다움과 푸르름을 다시 보여 주게 된다.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작은 새들도 겨울 내내 둥지에 박혀 거의 움직이지 않다가 이 봄에 겨울의 혹독함을 다 잊어 버리고 다시 능력껏 조물주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느라 여념이 없다. 새들이 배고파 우는 것으로 알던 시편 기자도(시 147:9)분명 그것들이 즐거움으로 노래한다는 사실을(시 104:12)깨달았을 것이다.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반구는 철새로서 예레미야 8:7에 언급되어 있는 바, 올 때와 노래할 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시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찬양해야 할 때에 찬양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이 말로 여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로 오는 봄에 대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추웠던 곳을 따뜻하게 하고 메말라 황량했던 곳을 풍성한 열매로 가득차게 하신다. 복음이 닿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아름다움과 영광이 같이 임할 것이다(고후 3:7,8). 봄은 즐거운 때이고 복음의 때 역시 그러하다. 핍박하는 적들의 손에서 교회를 구원하신 것은 고난과 압제의 겨울 뒤에 오는 봄과 같은 것이다. 고난의 폭풍이 사라지고 ‘반구의 소리’ 즉 그리스도 복음의 즐거운 소리가 다시 들리고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에야 ‘일어나서 함께’ 주의 길에 서서 찬양을 할 수 있게 된다. 교회가 평안할 때 든든히 설 수 있었다(행 9:31).

시편 31편 여호와를 신뢰하는 신앙 설교말씀

죄인이 본성의 지배를 받다가 은혜의 장으로 들어옴은 봄이 다시 돌아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변화이며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나는 것이다. 완악하게 냉랭하여 얼어붙어 결실하지 못하는 한겨울의 대지와 같던 영혼이 봄철의 대지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되며 또 점차로 그 열매는 성숙해진다. 이런 복된 변화는 전적으로 의의 태양이 다가와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심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겨울의 대지같이 되어 밤은 길어지고 낮은 어둡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다시 이르러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련하고 의기 소침한 영혼은 일어나서 함께 갈 수 있게 된다.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은, 현재는 땅속에 뿌리만 남아있는 겨울철의 꽃들과 같으나 부활의 그날 ‘연한 풀의 무성함’같이 될 것이다(사 66:14,26:19). 그날에 겨울을 영원히 작별하고 영원한 봄을 맞게 된다.

Ⅳ. 교회를 핍박하는 것들에 대한 지시 2:14-17

(1)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모든 믿는 영혼들에게 자신과 교제를 나누자고 불러주신다(14절).

1) 다윗은 교회를 하나님의 멧비둘기, 즉 반구라고 일컬었는데(시 74:19) 여기서도 똑같이 불리어진다. 비둘기는 아름다움과 순전함 그리고 무저항을 상징하는 바, 은혜를 입은 영혼이라고 일컬어진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같이’ 내려왔던 것처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내려오시사 그들의 영혼을 온순하고 평온하게 만드신다.

2)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그리스도는 있는 비둘기가 사나운 짐승들에게 위협을 받을 때 날아와 깃드는 바위틈처럼 교회가 와서 깃들일 수 있는 반석이시다(렘 48:28). 교회는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평안히 쉴 수 있다. 즉 거기서 홀로 거하며 자신의 양심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가끔 기도하기 위하여 홀로 산으로 가셨었다.

3)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은신처에서 불러내신다.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4)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음악처럼 들릴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종에게 교회에 닥쳐오는 위험을 없애 주라고 임무를 부여하신다(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작은 여우를 잡으라. 그 여우는 비록 작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게 살금살금 들어와서는 ‘포도원을 헐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은 ‘우리 포도원에 꽃이’ 피었으므로 그것들을 막지 못한다면 수확할 것이 없어진다. 성도들은 포도 넝쿨과도 같다. 그들은 처음에는 꽃만 피므로 그것은 완전히 성숙하여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우를 잡으라는 임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것은 성도들이 마음속의 죄악된 성향과 열정 등을 죽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여우 곧 작은 여우’로서 은혜를 막고 좋게 시작한 것을 망쳐 놓으므로 열매가 완전히 성숙될 때까지는 그것들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것은 죄악된 생각이 처음 일어날 때, 비록 그것이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종종 매우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므로 처음부터 조심하라는 것이다.

룻기 4장 보아스와 룻의 결혼 설교문

2)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더럽히며, 마음을 혼동시키고, 덕스러운 성향을 꺾어 버리는 생각이나 행동을 반대하고 삼가라는 것이다. 핍박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곧 여우이다(눅 13:32;겔 13:4). 이단과 종파 분리의 가라지의 씨를 뿌리는 자들, 그리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이 ‘여우 곧 작은 여우’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고 또 막아야 한다.

(3)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와 가졌던 교제에 대해서 고백한다(16절).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부름에 대한 그녀의 답변인 것이다.

1) 그녀는 그녀와 신랑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느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재게 속하였고. 이것은 적합한 표현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고락을 함께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언약으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 그리스도가 복음에 약속하신 것들과 하늘에 예비해 두신 모든 것들이 다 우리것이다.

2) 그녀는 또한 자신의 백성들과 교통하시는 그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안위를 느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그는 성도들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신다. 즉 그들 중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4)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간절히 바라는 교회의 소망과 기대감이 나타나 있다.

1) 그녀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것을 의심치 않는다. 복음의 날의 여명이 밝아오고 의식의 율법의 그림자는 사라져 갈 것이다. 이것이 구약 시대 교회에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2) 그녀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에게 그 동안도 와서 힘을 주고 위로해 달라고 간청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돌아와서. “내게 다시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같이 있어 주소서. 비록 산이 중간에 가로막혀 있더라도 그날의 광명과 사랑에 대한 은혜로운 표식을 가지고 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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