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지명 설교 말씀 중에서 오늘은 가버나움의 위치와 원어설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 호수와 접해 있었습니다.
지명연구 : 가버나움 Capernaum
1. 지명과 현재의 위치
1) 지명 : 코페르 나훔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독한 이름이다.
2) 지명의 의미 : 코페르 나훔은 ‘나훔의 동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훔이 구약의 나훔 선지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3) 현재의 위치 :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텔 훔 지역이 가버나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후 530년 이후부터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현재의 텔 훔 지역은 1.6Km에 걸쳐서 주초들만이 남아있는 폐허이다.
4) 주변 :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요단강이 있다.
5) 지명에 대한 다른 견해 : 유대교 랍비들은 랍비 탄훔이 장사된 곳이 후에 와전되어 텔 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 신약 당시의 가버나움
1) 규모 : 가버나움은 신약 당시에 가로 800m, 세로 250m 규모의 동네였다.
2) 위치 : 갈릴리 북서쪽 호수와 접해 있었다.
3) 인구 : 대략 1천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거주 시기 : 주전 약 1세기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5) 주된 시설 : 국경 지역이었으므로 세관이 있었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cf)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은 백부장도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6) 도시의 형태 : 성곽이 없는 국경의 작은 소도시(마을)에 불과했다.
3. 가버나움의 변화
1) 거주민들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가버나움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거주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 콘스탄티누스 : 그는 회심 이후에 이방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이 지역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음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보충적으로 알려준다.
3) 주후 7세기 : 가버나움은 아랍인들이 정복했으나 쇠퇴하지는 않았다.
4) 주후 8세기 : 중엽 때(746년) 강한 지진으로 인해서 큰 피해가 있었고,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5) 주후 11세기 : 완전히 쇠퇴하여 없어진 마을로 변모하였다.
4. 베드로의 집
1) 고대의 기록 : 4세기 말경의 순례자였던 에게리아는 가버나움에 가정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는 베드로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례자들은 그 집 둘레에 담장이 처져 있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2) 설립 연도 : 기원전 1세기경에 세워진 하나의 건물이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이 발굴되었다.
3) 기록과의 일치 : 그 건물의 주변으로는 가로 27m, 세로 27m의 담장이 처져 있었다
4) 한 방의 발견 : 고대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방이 발견되었는데, 크기는 가로가 5.8m, 세로가 6.45m로 예수께서 머무르셨던 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5) 장식 : 중앙 건물의 벽면에는 여러 색채의 장식물들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6) 다른 증거들 : 그 건물에서 나온 몇몇의 석회 반죽들 중 일부에서 아멘, 주, 예수 등의 어귀들이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런 글씨들은 헬라어, 아람어, 시리아어, 라틴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건물이 매우 중요한 순례지였음을 보여준다.
7) 교회 건축 : 4세기 때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었고, 5세기 때 팔각형의 교회를 완공했다.
8) 담장의 파괴 : 원래의 담장은 7세기까지 남아있었으나 그 후에 파괴되었다(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교회 건물과 담장이 파괴되었다).
5. 가버나움의 회당
1) 보존 상태 : 거의 완벽에 가깝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거의 유일한 회당이다.
2) 건축 : 예수 당시의 회당 터에 주후 3세기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3) 특징 : 정통 유대식의 회당의 모습이 아니다.
4) 장식 : 기하학적인 장식들이 많이 있다(이것은 주술과 상관되어 있다).
5) 다른 문헌의 언급 : 랍비 문학에서는 가버나움을 우상 종교들의 소굴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과 가버나움 회당의 모습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6. 고고학적인 발굴
1) 발굴 이전 : 유적지들의 돌들을 취당하여 많은 유적들이 손상당했다.
2) 발굴의 시작 : 1894년이 되면서부터 고고학적 관심이 기울여지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부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관리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7. 복음서에서의 가버나움의 중요한 모습들
1) 예수께서 거주하신 도시 : 예수께서 집에 계셨다는 기록이 유일하게 나오는 도시이다(막2:1).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유하셨던 도시이다(요2:12).
2) 병자들을 고치심 : 예수님께선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막1:21-28눅4:31-38), 백부장의 하인(마8:5-13), 베드로의 장모(마8:14-17), 중풍병자(막2:1-12), 왕의 신하의 아들(요4:46-54) 등의 병을 고쳐 주셨다.
3) 저주를 받음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가버나움에 대해 저주를 내리셨다.
원어설교 :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 히브리어 : 카파르 나훔 헬라어 : 카페르나움 Capernaum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번창한 도시(마11:23)로 갈릴리 바다, 게네사렛 호수의 서쪽 연안에 위치했습니다(요6:17). 가버나움은 히브리어(카파르)라는 ‘마을’과 히브리어(나훔)이라는 ‘위로’의 합성어로 ‘위로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는 한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겼습니다(눅7). 또 예수는 이곳에서 사역을 많이하였습니다(마4:13).
1. 인간은 위로를 받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 받고자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깊은 내면에서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또다른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렘31:15)하고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말에 아들들의 위로를 거부합니다(창37:35).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으나(욥2:11) 오히려 근심에 쌓이게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을 위로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입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위로할 수 없기때문에 위로부터 누군가가 와야 합니다. 위로부터 온 자만이 이 땅의 사람들, 위로 받기조차 거절하는 사람들을 진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오시어(막1:21) 아예 그곳에서 사셨습니다(마4:13).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역사를 행하셨습니다(눅4:23).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참다운 ‘위로의 마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마5:4).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 아뢰지 않고 묵묵히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을 애통해 할 때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세상을 위로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사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위로의 사도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하도록 명령하십니다(사40:1). 우리는 위로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마음이 여리고 환난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받는 것도 믿음이 연약한 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또 위로받는 것도 그들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로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역사할 때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고후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세상 사람들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초청하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위로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은 바로 남을 이해함으로 위로할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모든 사람의 위로자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