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 설교문] 메시아 예언과 십일조 헌물 규례(말3:1-18)

말라기 3장 설교문은 메시아 예언과 십일조 헌물 규례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다. 메시아는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 했다고 책망 받았다. 십일조를 도둑질 했다고 하나님이 말씀했다.

Ⅰ.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 3:1-6

본 장의 첫 구절은 불경건한 무신론자들, 곧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던 자들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보인다. “그가 여기 계시니라. 그는 바로 문 가까이 계시니라. 오랫 동안 고대 되었던 메시야는 곧 나타나실 것이라. 그리고 그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임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라.”

(1) 메시야 앞에 올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되었는데, 이 세례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자로 예언했었다(사 40:3).

1) 그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세례 요한은 그의 사역을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고 고침을 받게 한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사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보았던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이다. 그는 백성들을 그들의 아비인 아브라함에 관한 자신감(그들은 구세주 없이도 아브라함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으로부터 떼어놓고, 메시야가 이제 가까이에 와 계심을 알려 주는 것으로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자’가 되었다.

(2) 메시야 자신이 오실 것에 대해 예언되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세상을 버리셨다고 너희가 생각하는 그 ‘공의의 하나님’이 임하실 것이라. 오랫 동안 ‘오실 자’로 불리워졌던 그 메시야가 이제 곧 오시리라.”

1) 그는 아도나이(Adonai) 곧 ‘주님’이시다. 세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기반이요 기초로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마 28:18), ‘만유의 주'(행 10:36)가 도신다.

2) 그는 ‘언약의 사자’ 혹은 ‘언약의 천사’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천사’로서 그의 중재에 의해 언약이 체결되고 제정되었다. 그 언약은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이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히 2:3)가 되게 한다. 그는 ‘언약의 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사 ‘언약의 사자’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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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며 바라고 있던 ‘저희의 구하는 자’ ‘저희의 사모하는 자’이시다. 그를 찾고 기다리는 가운데, 그들은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대했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눅 2:25,38).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 마음의 바라던 이가 되신다면 그는 또한 우리 마음의 기쁨이 되실 것이다.

4) 그는 ‘홀연히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가까우며, 우리는 족장들이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되다.

5) 그는 ‘그의 전에 임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 성전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그의 전 ‘그의 아버지의 집'(요 2:16)이다.

(3) 그가 오시는 데에는 위대한 목적이 있었다(2절). 그는 그들이 찾는 분으로, 비록 그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오시지 않고,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다 할지라도,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할 것인가.’ 심지어 그가 육신을 입고 계실 때조차도 그에게는 아무도 그의 변하신 모습을 증거하고자 그 앞에 설 수 없을 정도로 영광과 권능의 빛이 발산되었다. 유대의 박사들은, 그가 오시는 때에 이스라엘에게 있을 큰 환난이 메시야의 고통과 슬픔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광석을 녹여 금과 찌꺼기를 가려내는 ‘연단하는 자의 불’과 옷을 비벼서 얼룩을 빼어내는 ‘표백하는 자의 잿물’ 같으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밝히고자 곧 ‘여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려'(눅 2:35)고 오셨으며, ‘손에 키를 들고'(마 3:12) 귀중한 것과 하찮은 것을 가려내려고 오셨다.

1) 복음은 선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할 것이며, 그들에게 그것은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다(3절). 그가…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즉, 그는 그들의 마음 속을 성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불로 금과 은을 깨끗이 하듯이 그들을 깨끗케 하실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성령과 불로(마 3:11), 곧 불과 같이 일하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로운 재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즉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돌아와 봉헌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열매가 선하게 될 나무를 선하게 하실 것이다.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4절). 그 헌물은, 그들이 토색한 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왔을 때처럼 더 이상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지 않고 열납될 것이다. 메시야는 그들 가운데 은혜를 내리시사 그들의 헌물을 열납하실 것이다. 그가 그들을 정결케 하고 연단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꺼이 받으실 만한 그러한 제물을 드릴 것이다. 메시야는 그들을 중재하심으로 그들을 열납될 수 있게 만드신다.

2) 복음은 사악함을 계속 고수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을 거스리는 증거임이 드러날 것이다(5절).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한 그들의 패역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다. “너희는 그가 계시는 곳을 알게 될 것이며, 너희의 두려움과 혼란을 인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왜냐하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가까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심판받기 위해 나아와야 하는 죄인들은 영적인 사악한 일을 다루는 ‘술수하는 자’요, 육체의 욕망 속에 빠져 있는 ‘간음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를 증인으로 불러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거짓 맹세하는 자’요,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하고 ‘과부와 고아’를 짓누르는 압제자이다. 이 모든 것의 주원인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것’에 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4)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준하신다(6절).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악행들(5절)에 대한 심판이 속히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변역지 아니하시는 주 앞에 실행되고야 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그의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인하여 그가 변치 않는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동에서 거짓되었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고로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한다.’

Ⅱ. 규례를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 3:7-12

하나님은, 하나님 섬기기를 버린 세대와 하나님의 것을 강탈한 세대의 사람들과 변론하신다.

(1) 그들은 그들의 주에게서 달아나 그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주신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7절).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신 은혜로운 제안은 무엇인가.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의 직책으로, 너희가 충실을 기할 곳으로 돌아오라. 길을 잃은 여행자같이, 자기네의 군기를 가지고 도망친 군인처럼, 자기의 남편을 떠난 불실한 아내처럼 돌아오라.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도 돌아가서 너희의 당한 심판을 옮기고 너희를 두렵게 한 자들을 막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돌아온다는 대답은 얼마나 까다로운가? “그러나 너희는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너희 자신의 마음을 서로 멸시하며, 너희가 가진 확신마저도 지워 버리면서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그들은 이 말을 그들의 흠에 관해 말하는 것이요, 그것들을 고치려고 요구하는 모욕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고지식함과 유한성, 영적 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대해 무지하였으므로 그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 안에 계속 거하려는 굳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2) 그들은 주의 것을 도적질했고, 그의 물건을 사취했다. 그들은 약탈과 신성 모독과 극악한 강도 행위로 고발받을 자리에 처해 있다.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사람이 어찌 감히 무례하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단 말인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폭력을 가한단 말인가”라고 이해한다. 또 다른 학자는 “어찌 사람이 그분을 제한하거나 똑바로 세운단 말인가”라고 읽기도 한다. 백성들은 ‘범죄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예를 빼앗고, 그를 섬기는 데 쓰도록 바쳐진 것 중에서 빼앗으며, 그에게서 그들 자신을 빼앗고, 안식일을 빼앗으며, 그들의 종교가 유지되도록 지시 된 것, 곧 그들의 재산 중에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아니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라고 묻는다. 그것은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들은 그것들을 더럽혔고, 제사장들은 그것들 중에서 속여 빼앗고도, 그들의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물들을 가져오는 대신 도리어 토색한 것과 저는 것, 병든 것 등 쓸모가 없는 것들을 가져왔다. 이것 때문에 그들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9절). 하나님은 불순한 기후로 그들이 기근과 결핍을 당하도록 벌하셨다. 혹은 땅의 소산들을 먹어치우는 곤충들로 그리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식량 부족으로 그들을 벌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뿐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이제 빈궁해졌기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들을 가져올 형편이 못 된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따를 경우 심판을 옮기리라는 약속 하에 이 점에 대해 개혁하도록 재촉받았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너희의 집에 곡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제단에 올릴 것으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최대한도까지 지켜 충분한 십일조를 가져와. 먼저 하나님을 섬긴 후에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여는지 안 여는지를 보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표현은 비유적인 것으로, 위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선물은 이때로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풍성함을 따라 그들에게 넘치도록 부으실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갑작스런 풍성함은 ‘하늘 문을 여신다'(왕하 7:2)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그 문들은 ‘복을 붓도록’ 열려졌으며 그 복은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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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회개하고 마음을 고친 죄인들과 화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약함과 우리의 바라는 바가 적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것들을 넉넉히 받지는 못한다. 그들의 땅의 실과가 메뚜기와 모충에 의해 다 먹히운 까닭에, 하나님은 이제 그 심판을 옮기시고자 한다(11절). 그들이 기근의 질책을 당했던 반면, 이제는 모든 나라가 그들을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다.

Ⅲ. 하나님 앞에서 사악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 3:13-18

(1) 하나님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뻔뻔스러운 자들을 성난 눈으로 주목하신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그러한 말들은 그들의 교만과 오만,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제와 통치 아래 있는 것을 경멸하면서 멸시하는 어조로 교만스럽게 완악한 말을 하였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그런 것 때문에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나이까?”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다만 가벼운 문제로 처리해 버렸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헛되니, 즉 그는 헛되이 아무 목적도 없이 힘쓰는 바 단지 수고할 뿐이므로 그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도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앞에’ 몹시 엄숙하고 비탄에 잠겨 슬프게 혹은 우울하게 행하였고 우리의 영혼을 괴롭혔으나 아직도 우리는 나아진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규례를 단지 형식적인 의식으로 지켰음에도 그 규례들을 지켰다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계속하여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그를 섬기도록 그리고 그 앞에서 즐겁게 행하도록 요청하셨음에 반하여 그분 앞에서 ‘슬프게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미신에 의해, 하나님 섬기는 것을 그들에게 노역과 고된 일이 되게 했으며 그런 후에 그것을 힘든 봉사라고 불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고, 그럼에도 여전히 가난과 곤경 속에 처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사두개인들의 잘못과 연관이 있다. 그들은 내세를 부인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사실 어떤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악함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15절). 죄인들의 외적인 번영은, 마치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경건으로 그 손이 약해지는 것(시 73:13)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악함으로 그 악한 자의 손이 강해지는 경우와 같다. 잠시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의 활에 맞을 하나의 표적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볼 것이며, 그 괴롭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인도하여 시험하는 자들’을 볼 것이다.

(2) 진정한 경건에 대해 그렇게 큰 경멸과 부패가 있었던 부패하고 타락한 세대에도 하나님께 대한 성실과 열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혜의 근본이 되고 모든 종교의 근원이 되는 바 ‘여호와를 경외하였고,’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였으며, 그의 권세에 복종했다. 모든 세대에 때때로 적은 수이긴 했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생각하였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섭리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것에 대해 묵상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경외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피차에 자주 말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함께 모였고, 그들은 아무리 불의가 만연하는 때에라도 서로간의 사랑이 밀납같이 냉담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진척시키고자 서로 서로 친절히 말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거룩함을 위해 서로 이해하며 말했다. 불의한 자가 대담하고 뻔뻔스러울 때에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기를 갖고 스스로 각성한다.

즉 ‘무죄자는 사곡한 자를’ 거스리게 된다(욥 17:8). 종교가 잘못 전하여졌을 때, 그 종교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그 종교의 명망을 유지하고자 했다. 유혹하는 자들이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조심성없는 영혼들을 속이기에 바빴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서로 서로의 손들을 강하게 하는 데 부지런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뒤를 밀어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는 귀기울여 들으셨고, 그들과 동행하셨다(눅 24:15).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16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봉사를 기억하시며, ‘잘하였도다. 네가 주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애통하는 자들의 눈물과 탄식도 책에 기록하신다(시 56:8). 하나님에 대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 말해진 어떤 말도 그것이 꼭 보답되도록 반드시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장차 그의 영광을 그들과 나누실 것을 약속하신다(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출애굽기 19:5에서 쓰인 단어)를 삼을 것이요. 혹자는 ‘나의 정한 날’을 ‘내가 행하고자 뜻하고 말한 것을 이루고 행할 그 날’이라고도 읽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석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다(사 62:3). 하나님이 그의 보석들로 꾸미실 날이 오고 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 던져져 있던 진토 속에서와 흩어져 있었던 모든 곳으로부터 모아질 것이다. 그는 이제 그의 은혜를 그들과 나누심을 약속하신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이 말은 보통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시 103:13) 아끼심을 의미한다. 자식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들이어야 하고, 새로운 탄생에 의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종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게으름으로 훈련시키시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의 원리로부터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느헤미야는 그가 많은 선을 행하였을 때, 아직 ‘땅 위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선을 행하고 죄는 짓지 않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기도하기를 ‘주여,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옵소서'(느 13:22)라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자비를 보여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설교말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그들은 이렇게 하여 세상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질 것이다(18절).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는 너희는, 그리고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14절)고 말하는 너희는 너희의 잘못을 알게 되고야 말 것이라.” 이것은 예루살렘과 유대 교회와 나라가 로마에 의해 멸망할 때, 믿는 유대인들과 불신앙을 고집한 자들 사이에 생긴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거나 그를 섬기지 않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는 종종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분별하기가’ 힘들다.

추측컨대,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한 바른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이 아님이 판명될 것이며, 반면에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었다고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모든 사람의 성품이 완전하여지고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때에는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내고 그의 위장된 모습은 벗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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