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1장 설교 말씀은 제사장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제사장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흠이 있는 것으로 드리고 있다. 성도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 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경고’라는 제목을 가진 이 선지자는 다음의 사실들이 암시 되어 있다. 첫째, 이 경고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노래와도 같이 자주 반복되어 선언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것에 부담을 느끼고 책망을 받을 자들이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그들에게 하나의 짐이 되어,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경고’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졌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을 시에게 보내셨고, 이제 다시 한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고는 말라기에 의해, 곧 말라기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본 절들에서 그들은 배은망덕의 죄로 책망 받고 있다.
(1)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품고 계신 큰 애정을 단언하신다(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어떻게 돌연히, 이렇게 다정하게 그 말씀을 시작하시다. 이 한 마디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요약하신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모든 은총의 근거를 자신의 사랑에서 찾아내시는 것같이, 자기를 거스린 그들의 모든 죄의 근거도 그의 사랑을 멸시한 데에서 찾아내신다. “우리는 쇠하고 헐벗었으며, 포로가 되었는데 어떤 점에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단 말이니이까?”
(3)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음을 입증하셨다. 혹자는 그들의 질문을 “주는 무슨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시나이까?”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나 그 사랑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 대가에 불과하다는 것, 곧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에서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혈족이 아니었느냐.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사랑에 대한 어떤 보상이 있다면 당연히 에서도 그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에서를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였노라.”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 사이에 차별을 두셨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 곧 쌍둥이 형이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13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나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이 말씀은 야곱이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반면, 에서는 거절당하였음을 보여 준다. 에서는 공정하게 미움을 받았으나 야곱은 값없이 사랑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3절). 그의 산은 세일산이었고 그것이 ‘그의 산업’이었다. 갈대아 군대가 세계의 대부분을 휩쓸 당시 에돔도 파괴를 당했다(사 34:6,11). 그들이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을 보고 개가를 올렸던 것 만큼 똑같은 공포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야곱의 지경들은 훼파되었으나 재건되었다. 반면 에돔의 지경들은 결코 재건되지 않았다. 의로운 자의 고난은 그 끝이 잘 될 것이요, 고통에서 회복될 것이며, 그들의 슬픔 또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의 고난은 에돔의 멸망같이 될 것이다(4절). 에돔 족속의 헛된 소망에는 의지할 만한 약속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헐벗게 된 것은 사실이며 있을 법한 일이라. 고칠 수도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와 무너진 곳을 일으켜 세우리라.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회복되리라”고 말한다(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은, 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직접 여리고를 건축한 것(왕상 16:34)처럼 재빠르게 일어선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는 일어설 것”이라고 했어도, 만군의 여호와는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지역을 일컬어, 구제할 수 없을 만큼 죄로 가득한 나라인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을 백성’이라 할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이 결코 개혁되어지지 않을 것이듯이 그들의 멸망도 결코 복구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2)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백성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목도하고 그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의심을 버리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과 지경에서 여호와께서 크시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에돔 지경이 여전히 황폐한 채로 남아 있을 때 이스라엘 지경은 복구되고 짐승과 사람들이 그곳에 살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 된다.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실 때 우리는 그를 크게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를 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 1:6-14
말라기 선지자는 여기서, 제사장들이 비록 백성들을 책망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스스로 재판관이라고 여기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오히려 문책한다.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6절).
(1)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기대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들은 그 아비를 공경하나니. 그것은 그가 아비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본성적으로 자녀들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종은 주인에 대한 의무가 스스로의 서약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의무를 주인을 공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요 종들인 제사장들은 그를 두려워하지도 공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원래 백성들에게 아비요 주인들이었고, 그렇게 불리워지도록 기대되었다(삿 18; 마 22:7,10).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와 주인을 잊었고, 그에 대한 임무도 잊었다. 우리의 아버지이며 주인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그를 힘있게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아비를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와 주되신 이에게는 더욱 그리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히 12:9).
(1) 제사장들을 무엇으로 하나님을 경멸하였는가. 그들은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께서 몹시 싫어하시는 제물들’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과 규례를 경멸했다. 이에 대해 7절과 12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성물을 귀히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사악한 목적에, 곧 그들의 자만과 탐욕과 사치를 위하여 악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그들이 보편적으로 범하던 죄였다. 이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나님께 도전하기도 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7절). 그들의 변명은 곧 그들의 공격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거만함과 완악함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범죄로서도 마땅히 비난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해 왔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보여 주신다. 첫째, 그들은 말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다. 그들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7절)’고 마음에 말했으며, 또한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다'(12절)고 말함으로써 어떤 상보다도 더 하나님의 상을 무시했다. 진설병이 놓여 있는 성전의 상 혹은 여기서 상으로 불리우는 번제단은 그들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그들 자신의 상과 그들의 귀인들의 상에 비교할 때 경멸할 만한 것이었다.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을 경멸히 여길 것이라(12절). 둘째, 그들은 그들의 말과 일치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다. 그들은 어떠한 것이든, 심지어는 매우 보잘것없고 열등한 것일지라도 제물로서 합당한 것이라고 여겼다.
모든 제물에는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나 그들은 ‘더러운 떡'(학 1:7)을 가져왔다. 그들이 바친 짐승들은, 율법이 흠없는 것으로 제물을 삼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8절)들이었으며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13절)등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들이었다. 혹자는 제사장들이(7절) 모욕적으로 말한 것이 8절에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너희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제물로 눈먼 것을 드린다 해도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 역시 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도다.” 만일 우리가 무지하게, 이해없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눈먼 것을 제물로 가져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주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또는 냉담하고 무딘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우리는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오는 셈이 된다.
만일 우리가 외적인 예배 의식만을 치중하여 그 예배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저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헛된 생각과 방심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토색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독이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도 엄청난 해악과 손상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대가를 받은 일 이상의 것은 결코 하려 하지 않았다. 제사장들 가운데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성전 문을 닫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아주 고된 것으로 여겼다(13절).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힘들고 귀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3)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그들에게 훈계하시며 변론하신다.
1) 그들이 이런 식으로 땅의 임금에게 모욕을 주겠는가? “너희가 나에게 드린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이제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것이 공물로 바칠 것이든 선물로 바칠 것이든 그것을 그가 기뻐하겠느냐?”
2) 그들은 이러한 제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것을 너희의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13절). 만일 그 사람이 의로운 상태에 있지도 거룩한 상태에 있지도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도 그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을 받으시고 그 후에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3) 그들은 이같이 제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면서 백성들을 중재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설득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4) 그들이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안락하게 살도록 돌보아 주셨고 그들이 임무를 기쁘게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한 제사장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9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원컨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하나님을 구하라. 너희 죄에 대해 스스로 낮추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받는 모든 책망들은 바로 ‘너희가 이같이 행한’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을 깨우치시려고 자신의 결심을 선포하신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고 경멸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크고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11절). 그들이 더럽힌 그런 세속적인 의식들 대신 신령한 예배 방법이 시작되어 확립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수소와 염소의 피와 기름 대신에 분향(이것은 시편 141:2; 계 8:3에 나타난 기도와 찬미를 의미한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백성들인 유대인들 가운데서만 그가 예배와 섬김을 받아오신 것 대신 모든 곳에서 경배되고 섬김을 받을 것이다.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나라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언어로 그 일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큰 개혁의 분명한 예보인데, 이 개혁으로서 이방인들 곧 ‘나그네들과 외국인들’이었던 그들이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감을 허락받게 되었다. 모욕적이고 조심성없는 경배자들은 ‘떼 가운데 수컷’을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여호와께 드린다.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으나 제사장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여 하나님보다 더 관대한 체하고 있었다. 그들은 속이는 자들로서 거짓과 사기술로 하나님을 대한다. 그렇게 속이는 자는 또한 위선자이기도 한데 그들은 자기를 기만하며 자멸하는 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저주를 받는다. 복을 기대하나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이교도들이 우상에 불과한 그들의 신들을 존중한 것에 비해 유대인들이 유익하고 참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교도들보다도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