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 사탄은 예수님을 먹는 음식으로 시험하고 명예로 시험하고 영광으로 시험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에덴동산에 뱀이 들어와서 아담을 미혹하므로 죄가 들어왔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다.
Ⅰ.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심 4:1-11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결투 즉 천사장 미가엘과 용,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자신과의 백병전의 사건을 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당하며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며 그의 머리가 깨뜨려진다.
1. 시험받으신 시기(1)
그때에는 하늘이 그리스도께 열리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한 직후이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 시험 받으셨다는 소식을 우리는 듣게 되는데 그때에야 말로 주께서 시험을 가장 잘 싸워 이기실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할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큰 특권들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징표들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시험받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그보다는 오히려 큰 영광을 받은 후에 우리는 우리를 겸손케 만드는 어떤 것이 오리라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보통 그의 백성들을 시험에로 부르시기 전에 시험에 대비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시험을 대비하는 최상의 준비이다.
그 때에, 즉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그 때에 그는 시험을 받으셨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은 후에 우리는 사단에게 공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부요해진 영혼은 자신의 경호를 갑절이나 주의해야 한다. 사단은 유용한 사람들 즉 선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선을 베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 특별한 악의를 드러낸다. 따라서 젊은 목회자들은 앞으로 닥쳐올 것과 이에 따른 무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2. 시험을 받으신 장소(1)
광야로 가사. 하나님과 교제를 가진 후에 우리가 받은 것을 군중과 번잡한 세상일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로 물러 가셨다. 그것은 첫째로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은거는 묵상을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장 활동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을 위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지내는 시간을 찾아야 한다. 먼저 혼자서 은밀하게 하나님의 일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공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기에 부적당하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행위는 시험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고독이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지만 사단은 그 고독을 이용해서 우리를 대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결과 헌신을 핑계삼아 토굴과 광야로 가서 은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그들의 영적인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과 거기에서 성도들과의 교제의 유익을 바라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제멋대로 일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 물러가셨다. 승리를 더욱 더 빛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해와 바람을 제공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원수를 그렇게 유리하게 만들어 주시고서도 그의 공격을 좌절시키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 광야로 물러 가셨다. 예수께서는 한시도 지체치 않고 시합장에 들어가셨다.
3. 마귀의 시험에 대한 준비(1,2)
(1) 그는 전투하도록 인도받았다. 그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위에 비둘기같이 내려온 성령은 그를 온유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담대하게 만들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우리를 시험받는 환경 가운데 처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갑절이나 조심해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주 안에서 강하라 믿음 안에서 굳세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가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도록 하시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마귀에게 시험받도록 인도되었다. 그리스도는 오직 마귀에게서만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으로'(약 1:14)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순전히 마귀에 의하여 시험받으시기 위해 마치 전사처럼 싸움터로 끌려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심은 그 자신의 겸손과 비하의 실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그의 형제와 같이 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자 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일에 복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은 사단을 당황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전투 없이는 승리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시험자를 정복하시기 위해서 시험받으셨다.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안을 준다. 우리의 원수가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시험 받으심에서 나타난다.
비록 그 원수가 무장한 용사일지라도 우리의 관원의 대장께서는 그 보다 더 강하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죄가 아니라 단지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사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더욱 부드럽게 대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
(2) 그는 ‘모든 일에 절제하는'(고전 9:25) 경기 선수처럼 전투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것은 그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금욕을 위해 금식하실 필요가 없으셨다(그는 다스려져야 할 타락한 욕망을 갖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식하셨다. 선한 사람이 낮아지거나 친구나 구원자가 없어졌을 때 그들의 주께서도 친히 그와 같이 연단받으셨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떡이 없을지라도 하늘의 은총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 아래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그는 결코 주리지 않으셨다. 그에게는 하늘과의 대화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식 후에는 실로 그가 참된 사람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주리셨다. 사람은 먹는 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우리도 종종 그 문제로 죄를 범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주리셨다.
4. 시험들(3-10)
사단이 예수께 던진 모든 시험들 가운데서 목적한 바는 주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짓도록 함으로써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귀가 노린 바는 첫째,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을 느끼도록 하고, 둘째, 아버지의 능력을 이용하도록 만들며, 셋째, 영광을 사단에게 줌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딴 데로 돌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전자의 두 가지는 그 의도를 분별하기 위해서 깊은 지혜를 가지는 그 의도를 분별하기 위해서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아주 교묘한 시험들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의 시험은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을 요구하는 강한 유혹이었다.
(1)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보호를 불신하도록 시험하였다. 여기서 마귀의 시험 방법과 그리스도의 대항과 정복을 살펴보자.
1) 이 시험이 어떻게 진척되었는가(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시험하는 자는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스도께 왔다. 일찍이 사단이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였다면 바로 지금 그렇게 가장하여 선한 수호신인 천사인 체하였다.
이 첫 번째 시험을 그때 것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시험을 더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험하는 자의 간교함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막 굶주림을 느끼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필수적인 생명 유지를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제안은 타당한 것처럼 보였다. 궁핍과 가난은 불만족과 불신앙에 이르게 하는 큰 시험거리이며,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할 사람 없다는 핑계 아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도록 유혹하는 시험거리이다. 그러므로 궁핍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은 배나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 죄를 지음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번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되셨다. 그래서 마귀는 여기서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의심하도록 시험한다.
이 시험에서 마귀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첫째, “이제야말로 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 지를 의심해 볼 때를 만났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만물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그와 같이 궁핍한 처지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이 네 아버지가 아니든가 아니면 그는 매우 몰인정한 존재이다.” 선한 백성들을 시험하는 마귀의 중대한 목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외부적인 고통과 궁핍 그리고 무거운 짐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양자됨을 의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들이다.
거룩한 욥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굶주리게 하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며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험에 대해 어덯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이냐?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혹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귀는 마치 하나님께서 몰인정하시고 불신실하신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완고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써 대부분의 자신의 계획들을 수행해 나간다.
둘째, “지금이 바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때이다. 만일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아마도 지금 그 앞에 놓여 있는 돌무더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명하여 떡이 되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라(3절).”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이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 수 있도록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떡덩이가 되도록 명령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니 이제는 자립하고 그의 신세를 지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는 겸손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위하지 않고, 하는 일마다 주제넘게 구는 것이다.
2) 이 시험이 어떻게 격퇴되고 극복되었는가를 보자. 먼저 그리스도는 마귀의 그 제안을 승낙하기를 거절하셨다. 그는 그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자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고자 하지 않으셨는가? 얼핏 보기에 그 제안은 아주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시험이 그럴듯 하면 할수록 그리고 겉모양이 훌륭해 보일수록 더 위험하다.
이 문제는 논쟁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재빨리 풀 속에 숨어 있는 뱀을 알아차리고서 아무 것도 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사단의 말이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들은 목소리의 진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말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보호를 불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 말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독립해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도록 이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 말이 그의 제안대로 행할 때 마귀를 기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그 제안에 즉시 답변할 준비를 갖추고 계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4절). 그리스도께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사단의 모든 시험들에 답변하시고 그것들을 좌절시키신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존중하시고 율법에 기록된 바에 호소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병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들 중에 유일하게 공격적인 무기이다(엡 4:17).
이 시험에 대한 답변은 다른 나머지 답변과 마찬가지로 제2의 율법을 의미하는 신명기에서 인용되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의식적인 것은 거의 없다. 레위기의 제사와 정결 예식들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들일지라도 사단을 내어 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으로 혼합된 도덕적 교훈들과 복음적 약속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무기들이다.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기르셨는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신다.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궁핍한 처지에 빠졌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그의 아들됨을 의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알라'(신 8:5)는 말씀이 따라다녔다. 이와 같이 아들로서 그리스도께서도 순종을 배우신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불신하게 만들려고 한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굶주림을 느끼기 시작하자마자 곧 양식의 공급을 찾게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이 궁핍할 때조차도 그를 시중들며 그를 기대하게 하실 것이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떡을 준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로 살았던 것처럼 사람이 떡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명하시고 지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떡 만큼이나 사람을 위한 좋은 생계 수단이 될 것이며 또한 사람을 부양해 줄 것이다. 우리가 떡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축복을 거절하시면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떡이 생명을 지탱해 줄지라도 떡의 양부의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떡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살찌우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부요할 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가장 빈곤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 자신의 습득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준비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의 소산들로 풍족하게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을 의지하여 적절하게 사는 것이 낫다.
(2)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이용하도록 시험하였다. 마귀란 얼마나 끈덕지고 지칠 줄 모르는 적인가 보라. 이제 이 두 번째 시험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보자. 대체로 마귀는 예수께서 그를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를 아주 굳게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로 하여금 안전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를 이용하도록 꼬이려고 애쓴다. 우리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실망이나 추측보다 더 위험한 극단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으며 기꺼이 구원하시려고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들을 죄 가운데서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도록 유혹받는다.
이제 이 시험에서 마귀의 행동을 살펴보자.
①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진행시켰는가? 마귀는 그리스도를 강압적으로나 억지로 데려가지 않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가도록 만들고서 그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전 꼭대기에 서셨다(5절).’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을지라도 결국은 그를 반드시 정복하시기 위해 이같이 서둘러 시험을 받으심에 있어서 참으로 순종적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사단의 이같은 능력을 풀어 놓으셨지만 그와 같이 우리를 대적하도록 그 능력을 풀어 놓으시지 않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묶어 두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가! 둘째로 사단은 이 시험을 위한 장소의 선택에 있어서 매우 간교하였다. 마귀는 그를 인구가 많고 온 땅의 즐거움인 예루살렘에 있는 한 공공 장소에 세웠다. 즉 세상의 경이들 중의 하나로서 끊임 없이 뭇 사람들의 찬탄과 존경을 받는 성전에 그를 세운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며, 광야의 궁벽한 곳이 아니라 대중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실 수 있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신앙 고백에서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마귀와 그의 시험들을 면하여 주고 그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만큼 그렇게 거룩한 성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거룩한 성에서 마귀는 최대의 장점과 성공을 누리면서 사람들을 오만과 자랑에 빠지도록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에는 불결한 것은 아무 것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영원히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마귀는 그를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성전의 꼭대기들은 시험하는 장소이다. 높은 장소는 다 그와 같다. 그런 곳은 미끄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떨어뜨리시지만 마귀는 떨어뜨리기 위하여 끌어올린다. 교회에서의 높은 자리는 특별히 위험하다. 탁월한 은사와 높은 지위를 맡고 있으며 큰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견고히 서 있는 일에 유이해야 한다.
②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일으켰는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6절). 이제 네 자신을 세상에 알려라. 그리고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 뛰어 내리라 그러면 먼저 너는 하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자로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너는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고 온자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고 네가 보통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사자 즉 ‘홀연히 그 전에 임할'(말 3:1) 언약의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마귀가 예수께 “네 자신이 뛰어 내리라”고 말한 사실이다. 마귀는 그를 내어 던질 수 없었다. 사단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네가 여기까지는 오고 더 이상은 오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를 내어 던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다치지 말자. 그러면 감사하게도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잠 9:12).
③ 마귀가 어떻게 그의 제안을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 했는가를 보자.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러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는가?” 마귀가 그 말씀을 그렇게 재빠르게 인용할 수 있을만큼 성경에 그처럼 정통한가? 그런 것 같다. 마음이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라도 그 머리 속에는 성경의 개념들로 가득차고 그 입에는 성경적인 표현들이 흘러 넘칠 수 잇다.
첫째, 마귀의 이 시험에는 옳은 것이 있다.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단은 그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천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을 보호한다(계 7:5,11). 둘째, 마귀의 이 시험에는 많은 잘못이 있다. 필시 마귀는, 이 약속이 자주 그를 방해하며 성도들을 대적하여 해를 끼치려는 그의 계획들을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 약속에 대해 특별한 악심을 품고 그것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먼저 마귀는 그 말씀을 잘못 인용하였다. 그 행위는 사악한 것이었다. 그 약속은 저희가 너를 지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지키는가? 네 모든 길에서 지키며 그외는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벗어나면 즉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이 약속을 잃어 버리며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경우에 성경을 참고하며,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태도이다. 둘째, 마귀는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하였다. 그 행위는 더 사악하였다. 이 약속은 확실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마귀는 이 약속을 악용하였다. 그는 그 약속을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해 보기 위한 격려로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는가? 천사들이 우리를 떠받들도록 하기 위해 뛰어 내리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를 금하고 계시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는가를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시험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처럼 이 시험도 그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이기셨다. 마귀가 성경을 악용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사용하시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명기 6:16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이 말씀이 인용된 신명기에서는 주어가 복수로서 ‘너희는 시험치 말라’고 인용되었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약속들을 특별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고 받아들일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뛰어 내리셨다면, 그 행위는 이미 아주 잘 확인된 것에 대해 더 이상의 확증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며 그를 돌보셨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계셨다. 또 한편 그리스도께서 뒤어 내리셨다면. 그것은 그가 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특별한 보호를 요청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궁핍을 채우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비위를 맞추시며 우리의 변덕을 만족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망상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분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이상의 다른 어떤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3)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제공하면서 가장 사악하고 끔찍한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
1) 최악의 시험은 맨 나중을 위해서 보류되었다. 우리가 이미 어떤 시험을 치루었든지 간에 여전히 우리는 더 악한 시험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 이 시험에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①마귀는 그리스도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그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성전 꼭대기 정도의 높이로는 충분치가 못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는 그리스도를 자기 영토로 더 높이 데리고 가야 했다. 복되신 예수께서 좀 저 잘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마치 마귀는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그가 이미 알고 계신 것보다 더 상세히 세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처럼 그곳으로 그리스도를 데려갔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단지 시험을 잘 꾸미며 속임수에 착색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속지 않으셨고 그 속임수를 꿰뚫어 보셨다.
여기서 사단의 시험들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첫째, 사단의 시험들은 종종 눈을 통해서 온다. 최초의 범죄도 눈에서 시작되었다(창 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언약을 맺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돌려 허영을 바라보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시험들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세상의 일들로부터 발생한다.
셋째, 이 시험은 마귀가 빈약한 영혼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큰 속임수이다. 마귀는 속이고 파괴한다. 그는 환영과 거짓 색채로 세상과 그 영광을 보여 주지만 이 모든 영광의 자랑을 얼룩지게 하는 죄와 슬픔과 죽음은 사람들의 눈에서 숨긴다. 넷째, 세상의 영광은 생각이 깊지 못하고 경솔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시험거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간다. 이생의 자랑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② 마귀는 그리스도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고 말하였다. 이 시험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마귀의 이 약속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앞절의 시험에서 자기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네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너를 버리고 굶겨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으냐? 그것이 바로 그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나의 통치를 받는다면 나는 네게 그보다 더 잘 해 줄 것이다.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하고 나의 축복을 구해라. 그러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 그들을 쉽게 먹이로 만들어 버린다.
이 약속의 기만성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데 있다. 마귀의 미끼는 전부가 속임수이다. 그 미끼들은 겉치레와 허상들로서 마귀는 그것들을 가지고 속인다. 땅의 모든 열방들은 오래 전에 메시야에게 약속되었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 모든 열방들은 그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일지라도 마귀의 손에서 받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 마귀가 내건 그 조건은 얼마나 천한 것인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마귀는 경배받기를 좋아 한다. 이보다 더 가증하고 음흉한 시험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장 훌륭한 성도가 가장 사악한 죄에로 시험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험이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시험에 동의하거나 시인하지 않는다면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경배하도록 시험받으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공격을 어떻게 방어하셨는가를 보자.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셨다.
①혐오와 증오심으로써 그 제안을 물리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10절). 그 제안은 첫 눈에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즉시 거절되었다. 이전 시험에서 사단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뛰어 내리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해를 입도록 시험하였을 때 그리스도는 비록 그 시험에 굴복하시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듣기는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험이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해 온 이상 그는 그 공격을 그대로 참고 계실 수 없었다. 그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사단의 주문에 귀를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
② 성경에서 끌어 낸 논증으로써 그 제안을 물리치셨다. 신명기 6:13과 10:20에서 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은 마귀의 제안을 물리치는 데 아주 적절하고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우리 구주께서는 필수적이며 보편적인 의무로서 이행해야 하는 기본법에 호소하신다. 종교적인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경배에 관하여 이 법을 인용하시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그 법을 적용하며 인용하신다. 첫째, 그는 사람의 신분으로까지 낮아지신 때에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공적으로 사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의를 이루신다. 둘째, 그는 그 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종교적인 경배의 법은 영원한 의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5. 이 싸움의 결말(11)
(1) 마귀는 싸움에 실패하여 싸움터를 물러 갔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마귀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의 말씀에 따르는 그 권세에 의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끄럽고 불명예스런 퇴각을 하였다. 창피스럽게 떠난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움직이기를 단념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더 이상 그를 시험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마귀를 대항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도망할 것이며, 우리의 입장을 지킨다면 그는 우리에게 굴복할 것이다. 마귀가 우리 구주를 떠났을 때 그는 스스로 완전히 패배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마귀는 비록 모든 성도들의 적일지라도 정복된 적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무장을 해제시키셨다.
(2) 천사들이 와서 승리를 거두신 우리의 구속자를 시중들었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한 천사라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리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천사들이 그를 시중들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그의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보라. 그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첫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그리고 특별한 모든 성도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악한 영들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그 모든 이들을 위해 고용되어 종사하는 거룩하고 복된 영들의 세계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리는 천사들의 기쁨이다. 셋째, 주 예수께 봉사하는 천사들은 단지 음식 뿐만 아니라 이 극심한 피곤에 따라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께 가져다 드렸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궁핍과 곤궁에 처하도록 하실지라도 그들이 멸망하도록 버려 두시지 않고 그들의 필요에 대해 효과적인 배려를 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험들 후에 이와 같이 도움을 받으신 것은, 첫째로 계속해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그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그를 신뢰하도록 우리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시험받는 백성들을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시기적절한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점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