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 대해서 예수님이 설교하셨다. 팔복 강해 설교는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했다. 성도는 마태복음 팔복의 강해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Ⅰ. 설교가 행해진 상황 5:1,2
여기서 우리는 이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보게 된다.
1. 설교자(1)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이시다.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이 능력있게 설교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설교에 있어서 이들 모두를 능가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에 의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말씀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많은 기적적인 치유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이 그처럼 많이 나타나는 이에게서 나오는 교훈들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었다. 필시 이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전하신 것들의 요약일 것이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2. 장소(1)
설교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어느 산이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설교하기에 좋은 시설을 제공받지 못하셨다. 즉 그에게는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 설교할 만한 장소는 더욱이 없었다. 위대한 진리의 선생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광야로 내몰아졌으며 거기에서 그는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산은 시온의 거룩한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평범한 산이었다. 이 사실로써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가깝고 편리한 곳이면 어디서든지 기도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산에서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의 해석인 이 설교를 산에서 하셨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에는 다음의 차이점이 있다. 율법이 수여될 때는 여호와께서 산으로 내려 오셨다. 그러나 지금은 주께서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때는 주께서 천둥과 번개 속에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그때는 백성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들이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는다. 이 얼마나 복스러운 변화인가!
3. 청중들(1)
그들은 주께로 나아 온 그의 제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주를 따라 다녔지만 그들은 주를 사랑하고 주를 배우기 위해서 따라 다녔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고, 그가 가르치신 것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셨다. 비록 이 강화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일지라도 많은 무리가 그 말씀을 들었다. 이 산 둘레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어떠한 경계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무리를 안중에 두시고 이 설교를 하셨다. 이 사실은, 몇 마리라도 잡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고기 떼가 몰려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바라보는 눈길은 설교자에게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바라 보는 눈길은 설교자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리들의 유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4. 이 설교의 엄숙성(2)
그 엄숙성은 ‘예수께서 앉으시니’라는 말 속에서 암시된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서 하신 정식 설교였다.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특유의 완곡어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이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회중들이 넓게 퍼져 앉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소리를 높여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이같은 견해를 말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 그의 거룩하고 모범적인 생활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이 끌려 갈 때조차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가르치셨으나 지금은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혐오해야 할 악과 그 안에 거주하여 살펴 풍성히 해야 할 선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우리 마음의 기질과 대화의 방향을 조절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 시대는 개혁의 시대이다(히 9:1). 그리고 우리는 복음에 의해서 개혁되어야 하며 선해지고 더 나아져야 한다.
Ⅱ. 팔 복 5:3-12
그리스도는 복에 대한 말씀과 함께 그의 설교를 시작하시는데, 이는 그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기(행 3:26) 때문이다. 그는 권세를 가진 자처럼 복을 명하실 수 있고 심지어 영원한 생명까지도 명하실 수 있는 자처럼 복을 설교하신다. 구약은 저주로 끝을 맺었으나(말 4:6) 복음은 축복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선언하시는 각각의 복은 두 가지의 의도를 지니고 있다. 첫째, 참으로 복 있는 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고 둘째, 이 복들이 어떤 점에서 참된 행복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1) 이 팔복의 설교는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을 초래하는 오해들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적을 오해하고 있고 행복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길을 잃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복 있는 자란 세상에서 부유하고 위대하며 환락과 즐거음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기름진 것과 달콤한 것을 먹고 마시며 거만한 자세로 시중을 받는 자들이다.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오셔서 복과 복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이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시작은 그와 같은 금언들로부터 행복의 척도를 취하여 그에 따라 자신의 행복 추구의 행위를 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이 팔복의 설교는 복음을 받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갖기 쉬운 낙담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곧은 자는 천국의 영에와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행복하였다.
(3) 이 팔복의 설교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으로 베풀어진 은혜로운 치유들을(마 4:23,24) 본 사람들과 이제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들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시종일관 사랑과 친절을 베푸셨다고 말할 것이다.
(4) 이 팔복의 설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정 조항들을 설정하고 요약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한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팔복에서 만큼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충분하게 설명된 곳은 없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 바로 여기에 열려 있고 그 대로가 나 있다(사 35:8).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서 복된 사람들의 여덟 가지 특성을 제시하는데, 이 특성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주요한 은혜들을 나타낸다. 각각의 복은 ‘…하는 자는 (지금) 복이 있나니’에서처럼 현재의 복으로 선포된다. 또한 각각의 복에는 미래의 행복이 약속되어 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
사람을 행복스럽게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먼 빈약한 심령이 있다. 그것은 죄와 덫이 되는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라.
(1) 하나님이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의 부를 비우고 가난하게 살기를 만족히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교만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빌 4:12).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에 대해 냉담하며 그것에 착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랑이나 허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버려서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다.
혹시 우리가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즉 가난한 자들의 위치로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체험하듯이 그들을 동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가난해질 것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며, 가난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가난이 우리에게 덮쳐올 때는(히 10:34) 오히려 우리는 그 가난을 환영해야 한다. 욥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을 때 뿐만 아니라 주신 모든 것을 취하여 가셨을 때도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2)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하고 비천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하는 일을 비천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와 은혜 면에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 영적인 일들에 부요하였지만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을 사도들 중의 가장 작은 자요,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에, 즉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기에 자신이 부끄럽고 비천하며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우리는 비천하고 그는 거룩하시나 우리는 죄스럽고 그는 모든 것이 되시나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3) 우리 자신의 의와 능력을 결코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세리가 불쌍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부르짖을 때 가졌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바로 이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은혜들 중에서 제일 앞에 온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도덕적 덕성들 가운데서 겸손을 하나의 덕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제일 앞에 두셨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은혜들의 기초가 겸손에 놓여 있다. 세우려는 자들은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얻을 것이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복이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롭게 살피시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그와 같은 자들로 구성되며 영광의 왕국은 그런 자들을 위하여 준비된다. 크고 교만한 영혼들은 지상 나라들의 영광과 함께 사라지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순종하는 영혼들은 천국의 영광을 얻는다. 똑같은 행복이 부를 유용하게 쓰는 자들에게와 같이 가난에 처해 만족하게 사는 자들에게도 약속되었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쁘게 돈을 쓸 수 없고 단지 그를 위하여 즐거이 궁핍하게 지낼 수 밖에 없을지라도 그것도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4)
이것은 또 다른 묘한 축복이다. 우리는 즐거운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크게 애통하는 자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에는 복의 원수가 되는 죄스런 애통 즉 세상의 슬픔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는 자연스런 애통도 있다. 그러나 복을 받기에 적합한 은혜스러운 애통이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이 있다. 이것은 경건한 슬픔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슬픔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죄에 대한 슬픔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는 자들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하는 애통이 있다. 이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멸망해 가는 영혼들을 동정하여,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듯이 그들을 위하여 우는 자들의 애통이다.
이 은혜로운 애통자들은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웃더라도 그 마음이 종종 슬픈 것처럼, 이 은혜로운 애통은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빛이 저들에게 뿌려지고, 저들은 틀림없이 천국에서 나사로처럼(눅 16:25) 위로를 받을 것이다. 천국의 행복은 저들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는 것이며,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기어 지는 데 있다. 천국은 실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들의 천국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의 대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께 조용히 순종하며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관용하는’ (딛 3:2) 사람이며, 불길 같은 성을 내지 않고 참을 수 있으며 잠잠하거나 부드러운 답변을 사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성급할 때 침착할 수 있으며, 그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을 때 인내로써 자기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자이다. 한번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스무 번의 가해를 용서해 주려고 하는 자가 곧 온유한 자이다.
여기서 이 온유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다고 묘사된다. 첫째, 그들은 복되신 예수와 같기 때문에 복되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안락하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기쁨을 얻기 때문에 복되다. 그들은 얼마든지 살 수도 있고 편안히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언제나 많은 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며 또는 그들이 오직 땅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이 경건의 가지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온유함은 놀림을 받고 모욕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건강과 부, 위로와 안전을 진척시키시는 실제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저희가 땅을’ 즉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위로 하늘의 모든 복들과 아래로 땅의 모든 복들은 온유한 자들의 차지가 된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6)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빈곤과 비천한 상태에 대한 계속적인 예로 이해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만약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이러한 곤란들을 겪는다면 그들은 복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자. 심한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 주시도록 조용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은 때가 이르면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족하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실 때 보여 주실 지혜와 자비를 보고 크게 만족할 것이다.
(1) 의가 여기에서는 모든 영적 축복들을 가져오는 근거로서 제시된다. 모든 영적 축복들이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새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에 관심을 갖는 것, 이것들이 곧 ‘의’이다.
(2)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의를 갈망해야 한다. 영적인 복들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진지하고 끈질겨야 한다. “이것들을 저에게 주십시오 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 즉 “이것들을 주십시오 다른 아무 것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하고 구해야 한다. 배고픔과 갈증은 자주 발생하는 욕구로서 새로운 만족을 요구한다. 소생한 영혼은 끊임없는 의의 양식을 요구하며 매일 매일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은혜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애써 일할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영적인 복들을 바라야 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복들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
이처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첫째, 그와 같이 갈망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은혜를 바라는 모든 욕구가 다 은혜는 아니지만(가장되고 희미한 욕구는 은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보다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시는 욕구이다. 둘째, 그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은총만이 영혼이 정당한 욕구에 적합하다.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되(눅 1:53) 차고 넘칠 정도로 풍족히 주신다(렘 31:25).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7)
이것 또한 다른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긍휼이 여기는 자란 가장 지혜로운 자로 간주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장 부유한 자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들이 ‘복되다’고 선언하신다. 관대하게 베풀만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발적인 마음을 받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경들을 끈기있게 견뎌 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동정심으로 우리 형제들의 고통을 나누어 짐으로써 동정을 보여야 하며(욥 6:14) 긍휼의 그릇 노릇을 해야 한다(골 3:12).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부지한 자들은 불쌍히 여겨 가르치며 경솔한 자에게는 주의를 주어야 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은 위난에서 속히 구해 내야 한다. 아니, 선한 자는 짐승에게조차도 긍휼을 베푼다.
(1)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이 있다. 구약이 그와 같이 말하였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41:1). 이 점에서 그들은 그의 선하심이 곧 그의 영광인 하나님을 닮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련된 기쁨들 중의 하나가 선을 행하는 기쁨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복음서들 속에서 찾아 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2)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들은 긍휼이 필요할 때 사람들에게서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며(우리는 언제 시급히 친절을 필요로 하는 때를 당하게 될 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늘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로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한 자에게 그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기(시 18:25) 때문이다. 가장 자비스럽고 긍휼을 잘 베푸는 사람은 공로가 있는 체 하지 않으며 서둘러 긍휼을 베풀곤 한다. 그러나 긍휼을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보게 될 것이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복은 모든 복들 중에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1) 여기에 복 있는 자의 가장 포괄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 안에, 즉 ‘악으로부터 나오는’것을 씻음에9렘 4:14) 있으며 마음의 청결성에 있다. 우리는 깨끗한 손 뿐만 아니라 청결한 마음으로도 또한 하나님께 빌어야 한다(시 24:4,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대되는 의미로 순수해야 한다. 그 마음은 오염과 불결에 반대되는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혼합되지 않은 포도주와 같고 흐려지지 않은 물과 같아야 한다. 마음은 육신과 영혼의 불결로부터, 즉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청결을 지켜야 한다. 마음은 믿음으로 정화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온전해야 한다. ‘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2) 여기에 복 있는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첫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혼이 극치의 행복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지상 위의 천국을 보는 것이며 미래 상태에서 보게 될 때는 천국의 천국을 보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보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만 약속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깨끗지 못한 영혼이 무슨 즐거움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누구든지, 즉 참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은 모두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욕구가 하나님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욕구라는 것을 안다.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9)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다. 복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순결하고 사람들에 대하여는 화평한 사람들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첫째, 화평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다. 화평한 성향이라는 것은 화평을 사랑하며 바라고 기뻐하는 것이며, 우리의 천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화평한 가운데 지내려는 것을 말한다. 둘째, 화평한 교제를 갖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히 아직 깨어지지 않은 평화는 보존하고 이미 깨어진 평화는 회복하도록 힘써야 한다.
화평케 하는 것은 때때로 검사받지 못하는 일이며, 싸움을 말리다 도리어 양편으로부터 해를 당하는 일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선한 일이므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모든 원수들을 소멸하고 땅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자녀들로 인정하실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평화를 깨뜨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10-12)
이것은 모든 복들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복이며 기독교에 있어서 특이한 점이다. 이 복은 믿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바로의 꿈처럼 두 번 반복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 핍박받는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첫째, 그들은 마치 없애기 위해서 찾는 유해한 짐승들처럼 핍박받고 사냥되고 추적당하며 몰아 붙여졌다.
둘째, 그들은 그들을 거스려 거짓으로 말하는 온갖 악과 비방을 받았다. 별명과 치욕적인 이름들이 그들에게 붙여졌고, 때로는 무서운 이름들이 붙여져 그들이 심한 공격을 당하였다. 그들에게 다른 어떤 해악을 끼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이 일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핍박할 만한 힘을 가진 자들은 그들을 야만적으로 취급하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성도들을 욕하는 것은 곧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며, 그 일은 머지않아 강퍅한 말(유 1:15)과 희롱(히 9:36)이 정죄되는 때에 밝혀질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에 대하여 거짓된 온갖 악한 말’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음흉하고 끔찍한 악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는 악은 없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하고'(10절) 주님을 위한(11절) 것이다. 이 말씀은 정당하게 고통을 받으며 자신들의 실제적인 악 때문에 사실대로 악한 비방을 받는 사람들을 이 복에서 제외시킨다. 순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대의에 있다. 선을 행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2) 핍박 받는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위로를 받는다.
첫째, 그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은 ‘악한 것들'(눅 16:25)을 받으나 좋은 이유로 그것들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영광이 되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임재의 징표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보상받을 것이다. 전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들은 현재 천국에 대하여 확실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천국의 즐거움을 미리 맛보며 머지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 보상은 그들이 한 봉사를 훨씬 뛰어 넘을 만큼 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자들이 결국은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실 것이다. 이 기쁨이 너희 앞에 놓여 있다는 바로 이 말씀이 모든 시대에 고통 받는 성도들을 지켜왔다.
셋째,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2절). 그들은 너희가 당하는 핍박을 능가하는 점에 있어서 ‘너희 앞에’ 있으며, 너희에게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약 5:10) 보일 수 있도록 시간적으로 ‘너희 앞에’ 있다. 당신은 어느 정도 당신 혼자 힘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고난의 길이 모든 성도들에 의해 다져진 길임을 아는 것이 위로이며, 그 길을 간 지도자들을 따르는 것이 영광이다. 그들이 고난을 견디기에 충분했던 은혜가 너희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절). 이러한 고통들을 참고 만족해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고통들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자랑은 모든 것을 망친다). 그리스도께서 핍박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 앞서 계시며 우리 뒤에 계시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