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장 설교 말씀은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모압으로 이주하는 내용이 나온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났다. 결국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 모압에서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도 죽었다.
I. 슬픔을 당하는 나오미 1:1-5
이 이야기의 연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첫째 구절에 들어 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절). 그때는 사사 시대의 초기였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여호수아 시대의 정탐군을 숨겨 주었던 라합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를 에훗의 시대였다고도 하고 드보라 시대였다고도 한다. 지식이 해박하던 패트릭 주교는 이때를 기드온 시대였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기드온 시대에서만이 미디안 사람의 침입으로 기근을 겪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삿 6:3,4).
(1)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금들에게 내리셨던 심판이었다(레 26:19,20). 나라는 평안했지만 식량이 부족했다.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조차도 식량이 거의 없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방종함을 고치기 위해서 기름진 땅은 황폐하게 되었다.
(2) 흉년으로 고생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엘리멜렉의 가족이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이다. 엘리멜렉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는데 나오미는 “나의 친절한 자 또는 나의 상냥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의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으로서 “병, 폐병”이란 뜻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병역한 자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3) 이 가족은 흉년 때문에 살기 어렵게 되자 베들레헴에서 요단 건너편에 있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1,2절). 이스라엘에는 식량이 귀하던 이 시기에 모압에는 식량이 풍족했던 것 같다. 일찍이 비슷한 이유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이삭이 블레셋땅으로 갔던 것처럼 엘리멜렉도 모압 지방에 가서 흉년이 든 동안만 잠시 머물고자 했다. 엘리멜렉이 가족을 부양하고자 하여 아내와 자녀들을 함께 데리고 간 사실은 분명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사실을 정당하다고 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정착했으며 이방인의 영토로 이주해서는 안되었다. 왜 엘리멜렉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가야만 했을까? 그가 만약 다른 이웃들을 잘 참아낸 그 적은 양에 만족하지 못해서라면 또는 때가 오면 다시 풍년이 오리라는 희망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라면 또는 풍년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은 엘리멜렉의 잘못이며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을 모독한 것이며 형제들의 손을 약하게 한 것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자기의 기업을 기꺼이 지켰어야만 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본을 보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장소에 싫증을 내며 불편을 느낄 때마다 즉시 그곳을 떠나는 것은 불평하기 좋아하고 신실치 못하며 침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또한 그 땅을 떠난다고 해도 하필이면 왜 모압 지방으로 갔는가? 잘 조사해 보았다면 이스라엘 지파가 사는 땅 중에도 풍요한 지역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요단 건너편에 모압 땅과 경계를 이루던 지역에 살던 지파는 풍족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이스라엘인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형제들을 위한 사랑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쉽사리 혼자 떠나 모압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4) 엘리멜렉이 죽은 후 두 아들은 모압 사람의 딸과 결혼한다(4절). 이것이 옳지 못한 행위였다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한다. 시리아역에는 “그들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고 되어 있다. 그들과 결혼한 여자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르바는 자기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15절). 룻이 모압 왕 에글론의 딸이었다는 유대인의 전설은 근거 없는 것이다.
(5)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이 죽자 나오미는 아주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남편은 죽었으며(3절) 갓 결혼한 두 아들도 죽었다(5절). 시리아역에는 그들이 이방인 아내를 얻어서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들의 날 수가 단축되었다”고 되어 있다. 남편을 잃자 나오미는 아들들을 더 의지하게 되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을 때 불쌍한 나오미의 심령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들을 잃고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홀연히 임하리니 누가 그를 위로하랴(사 49:9, 51:19). 이렇게 절망한 자를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Ⅱ. 돌아오는 나오미 1:6-18
1. 이스라엘 땅에 대한 나오미의 깊은 애정(6)
모압 지방에서 나오미는 안식처를 얻었으며 곤궁할 때 식량을 얻었지만, 그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거룩한 땅이 아니면 어느 곳도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백성에게로 돌이키셔서 자비를 베푸신다. 마침내 하나님은 자비롭게 그의 백성을 권념하사 그들에게 식량을 주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풍족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오셔서 생명을 유지케 하는 빵을 주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살리신다. 흉년 뒤에 이런 자비를 만난 것이 더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늘 그런 자비를 누리며 흉년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 자비를 아주 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2) 마침내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나오미는 벰들레헴에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부득이한 이유로 좋지 못한 곳에 마무르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없어지게 된 때에는 결코 그곳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악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대단한 고통이다. 그러한 피치 못할 형편이 지나갔는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환경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모압 땅은 이제 나오미에게는 슬픈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나오미는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땅에서 실망하게 되면 하늘을 더욱 사모하게 될 것이다.
2. 두 며느리, 특히 그 중 한 며느리가 나오미에게 보여준 애정(7-18)
나오미도 그들의 애정을 매우 고마워했다.
(1) 나오미가 유다 땅으로 돌아갈 때 두 며느리는 친절하게도 얼마 동안 나오미와 동행해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알수 있다. 즉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매우 친절했으며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오르바와 룻은 나오미의 친절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서로 친족이 되게 해주었던 사람들은 비록 죽었으나 그들은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신을 섬겼으나(15절) 나오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서로간의 사랑이나 친절이나 또는 친척 관계에 있어야 할 호의를 해치지는 않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종종 불화하게 된다(마 10:35). 그러므로 이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은 무엇보다 칭찬할 만한 일이다.
(2) 두 며느리가 얼마간 나오미와 동행하자 나오미는 깊은 사랑으로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권고한다(8,9절).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나오미는 그들에게 친정 어머니가 시어머니 보다 훨씬 잘 해 줄 것이며 특히 친정에는 집이 있는데 시어머니인 자기에게는 자기 혼자도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말해 준다.
1) 나오미는 그들을 칭찬해 주면서 보냈다.
2) 나오미는 기도해 주면서 그들을 보냈다. 친척들과 헤어질 때 기도하면서 헤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나오미는 축복하면서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시어머니의 축복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축복하면서 나오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말한다. 그때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다시 결혼했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 나오미는 깊은 애정을 표시하면서 두 며느리를 보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입맞추었다. 그들에게 줄 만한 좀더 좋은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금이나 은이 나오미에게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작별의 입맞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표시가 될 것이다.
(3) 젊은 두 과부는 어진 시어머니와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인 나오미와의 친교를 매우 기뻐했으며 또한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이처럼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또한 그들은 나오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오르바는 후에 자기의 신에게로 돌아갔지만 지금은 나오미와 함께 갈 결심을 했던 것 같다.
(4) 나오미는 그들이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게 설득한다(11-13절).
1) 나오미는 자기의 괴로운 처지를 말했다. 가나안에 다른 아들이 있거나 가까운 친척이 있어서 이 과부들을 결혼시킬 기대만 있었다면 이들이 베들레헴에 안락하게 정착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했을 것이다. 나오미가 처했던 비참한 상황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녀가 해주고 싶은 대로 두 며느리에게 해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자기가 받아야 할 고통이 두 며느리에게 내려진 것을 가장 애통해 한다. 자비하고 관대한 사람은 자기의 고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슬퍼하거나 괴로움 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의 당하는 고통을 더 견디기 쉬운 것으로 여기곤 한다. 며느리가 곤궁해지는 것을 보느니 자신이 곤궁해지는 것이 나오미에게는 차라리 쉬웠다.
2) 그러나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감으로써 그들을 모압의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나오미가 함께 가려고 하는 그들을 말린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 나오미는 물론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자신과 같이 가더라도 자기가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척의 비위를 맞추고 친구들의 청을 들어주기 위하여 혹은 교제 때문에 신앙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별 가치가 없으며 오래 지속되지도 못한다. 또한 그들이 나오미와 같이 간다 하더라도 나오미는 그들에게 신중하게 선택하게 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따르는 값을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게 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따르는 값을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게 하려 했을 것이다. 최악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마음에 열심을 가지고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좇겠나이다”하고 담대히 말한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너라. 내가 지내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지낼 수 있겠느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네 마음 속에 나와 운명을 같이 할 생각이 드는지 생각해 보라”(마 8:19,20). 나오미도 이렇게 며느리들을 대했다.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결심하게 된 생각이라면 마음 속에 늘 기억될 것이다. 성급하게 익은 것은 곧 썩게 된다.
(5) 오르바는 고향과 친지들이 강력하게 부르는데 마음이 기울자 가지의 부패된 성향에 쉽사리 굴복하여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다시 울었으며'(14절) 나오미가 애틋하게 한 말에 몹시 감동되었다. 그러나 두 며느리가 받은 감동은 서로 달랐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가게 되면 틀림없이 불편을 겪데 되리라고 한 나오미의 말은 오르바를 모압 지방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룻의 경워에 있어서는 그녀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을 뿐이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었다. 즉 애정 어린 작별을 영원히 고한 것이다. 오르바의 입맞춤은 나오미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며 나오미와 헤어지기 싫어한 것이 보여 준다.
그러나 나오미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날 만큼 나오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며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로 인해 구원얻는 데까지는 나아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것들을 버릴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를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며, 다른 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젊은 청년 역시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났던 것이다. (마 19:22). 그러나 ‘룻은 그를 좇았더라.’ 그녀가 집을 떠날 때부터 이미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심했는지의 여부는 나타나 있지 않다.
(6) 나오미는 룻에게 돌아가라골 설득하며 동서의 예를 들어 더욱 권고한다.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즉 “언젠가 돌아가고자 한다면 지금 돌아가라. 이는 너의 지조에 대한 최대의 시련이다. 이 시련을 극복하면 너는 영원히 내 사람이다.”
(7) 룻은 결코 나오미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자기 고향과 옛 친척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변함없는 결심을 엄숙히 선언함으로써 논쟁을 끝낸다(16,17절).
1) 누구도 이 말보다 더 단호하고 용감하게 말할 수는 없다. 룻의 동서는 가버렸지만 룻에게는 또 다른 용기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더 나은 것을 선택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한 보기이다. 룻은 시어머니에게 더 이상 가라는 말은 하지 마시라고 간청한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결코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다는 룻의 결심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즉 룻은 하나님과 하늘 나라를 섬길 결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룻은 나오미와 함께 가려고 한다.
즉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나이다. 비록 그곳이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라이며 또한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어떤 길이든 즐거울 것입니다.” 둘째, 룻은 나오미와 함께 기거하려고 한다.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비록 오두막집에 묵는다 하더라도 아니 야곱이 돌로 베개를 삼았던 곳보다 못한 곳에 묵는다 하더라도 나는 따르겠나이다.” 셋째, 룻은 나오미와 이해 관계를 같이 하려고 한다. 즉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입니다.” 넷째,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르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룻은 그녀의 전부를 바로 그 제단에 바칠 결심을 한다.
즉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다섯째, 룻은 나오미와 죽음도 기꺼이 같이 하려고 한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입니다.’ 여섯째, 룻은 나오미와 같은 무덤에 장사되고 나오미 옆에 묻히기를 바란다.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은 자기 시신에 호의를 베풀어서 모압 땅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지 않고 나오미와 영혼을 함께 함으로써 함께 다심 살아나고 함께 영원히 저 세상에 살게 될 날을 소망하면서 함께 흙이 되기를 바랐다. 룻은 엄숙한 맹세로 나오미를 따르려는 자기의 결심을 확고히 한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이는 고대의 저주하는 문체이다)
2)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돌이키는 전형이다. 우리도 어떤 순간에 이러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 “이 하나님이 영원토록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자백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모실 때는 그 백성들로 우리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들이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우리의 백성이다. 셋째,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면 기꺼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이 지내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
(8) 나오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18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그것이 바로 나오미가 자기를 따르려는 룻의 마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그때까지 이야기한 목적이었다). 그녀는 룻이 자신의 의도를 깨달은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해서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다.’
Ⅲ.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 1:19-20
나오미와 룻은 피곤한 걸음을 수없이 걸은 후에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적절한 때에 도착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 였는데 이 보리 추수가 끝난 후에 밀을 추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겨울을 준비할 기회가 생겼다.
(1) 이들을 보자 이웃 사람들에게 동요가 일어났다(19절).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전에 나오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나오미에게 몰려와서 나오미의 형편에 대해서 묻자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온 것을 환영했다. 혹은 아마도 그들은 나오미가 마을의 짐을 되지 않을까 하여 떠들썩했을 것이다. 그럴 정도로 나오미는 매우 가난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가 나오미냐?’ 고 묻는다. 전에 나오미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처한 나오미를 보고 놀랐다. 고생으로 인해서 나오미는 매우 상해 있었고 많이 변해 있었다.
‘이가 나오미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에 차서 이렇게 물었다. 즉 ” 이사람이 바로 그렇게 부유하게 살며 훌륭한 집을 지니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던 그 사람이란 말이냐?” 고통이란 순식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병들고 나이든 노인들이 얼굴이 변하고 성질이 변하는 것을 보면 베들레헴 사람들이 “이가 나오미냐”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그런 모든 변화 특히 엄청난 변화를 감당하게 해주신다.
(2) 나오미의 마음은 침착했다. 나오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비난하는 자가 있었으나 나오미는 가난하나 긍지가 있었으므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나오미란 이름은 “기쁜” 혹은 “상냥한”이란 뜻이다. 그러나 기쁜 일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나를 마라 즉 괴로움이라 불러라. 나는 이제 비통한 여자가 되었다.”
1)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가 변한 데 대해서 전혀 투덜거림이나 불평 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녀는 자식을 잃고 과부가 되어서 ‘비어 돌아온 것이다'(21절). 아마도 그녀는 가진 것을 다 팔았을 것이며 몸에 걸친 옷 한 벌을 제외하고는 가지고 갔던 것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같은 고난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인정한다.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신 이는 여호와시며 나를 괴롭게 하신 이도 전능자이시다.” 시련을 당할 때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는 것보다 영혼을 만족케 하는 것은 없다. 그 만드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없이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으로 채우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
2) 나오미는 이러한 변화에 순응하고 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라. 이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에게나 내 이웃에게 즐거운 자가 아니다. 나의 현재 형편에 맞는 이름으로 즉 마라라 칭하라.” 하나님이 그녀를 괴롭게 하셨을지라도 나오미는 그 섭리에 순응하려 하며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며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