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짧은 설교문] 이방인의 도덕적인 죄(롬1:19-32)

로마서 1장 짧은 설교문은 이방인들이 도덕적인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심을 주셨다. 선택받은 자는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고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니 구원받지 못한다. 선택받은 자는 말씀을 통해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Ⅳ.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심판 1:19-32

1.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방법들(19,20)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행 14:17).

[1]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절). 다시 말해서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알만한 것’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감지될 수는 있으나 파악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무한한 존재를 알만한 것이 있다.

[2] 이러한 지식들의 출처.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개념들은 자연의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에 새겨두신 것이다.

[3] 이러한 지식들이 창조된 만물에 의해 확증되었다(20절).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1) 그들은 무엇을 알았는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았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다. 그럴지라도 그것들은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행하시지만 그가 행하신 것은 밖으로 나타내며 그 속에서 그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어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불의로 막은 그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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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이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았는가? 그들은 그 진리를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제 일 원인이나 지적인 행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제 일 원인이란 능력이 많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일수 없다. 작품을 보면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모든 부분이 연합하여 전체의 선과 아름다움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창조주와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쳤다. 그리고 그 빛은 ‘창세로부터’ 비춰진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창조의 위대한 작품인 사람을 예로 든다. 그 진리를 알게 된 연대는 창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어 온 아주 오래된 선한 길이다. 진리는 오류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2. 사람들의 심각한 우상숭배(21-25)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마저 그토록 쉽사리 우상숭배에 빠져든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인식들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막는데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는 사실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감각의 수렁에 빠져든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그처럼 비참하다.

[1] 그들의 우상숭배의 내적 원인(21,22절).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떤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지식의 빛과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였다(21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오직 그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많은 신들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렇게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를 영적으로 예배한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형상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를 전혀 영화롭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함이 우리가 그를 떠나는 죄의 주된 원인이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들은 일반적인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나(19절) 그 진리를 개별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사려분별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내 허망하고 미련한 수많은 공상들에 빠졌다. 진리를 버리자 오류가 증가하였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마음이 어리석음과 실제적인 악함이 지적 기능과 능력을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22절). 어떤 신에 대한 개념을 조작함에 있어 가장 화려한 상상을 했던 사람들은 가장 심각하고 터무니없는 자만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세상이 자기 지혜에 빠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지혜로 인한 자만이 많은 어리석음을 빚어내는 원인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만하는 유식한 아덴 사람들 가운데서 바울의 설교는 어디를 가나 매우 비웃음을 사고 조롱당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평범한 진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이상의 것을 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아주 심각한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2] 그들의 우상숭배의 외적 행위들(23-25절).

1)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었다(23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가장 큰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행하는 가장 큰 치욕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상이 거짓 것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영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몸을 가지신 것처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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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외를 행함.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그들은 피조물에게 경배를 드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창조주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최고의 신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이 피조물을 경배하였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였다는 이 사실이 그 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이방세계에서는 널리 행해지고 있는 악이었다.

최고의 신을 알고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확신하는 지혜있는 이방인들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했다. 여기서(18절) 사도가 말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란 말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행한 치욕이라고 언급한 바울은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칭송하며 하나님께 경외에 찬 찬미를 드린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을 듣거나 볼 때 우리는 그를 높이고 영광스러우신 분으로 말해야 한다.

3.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4,26-32)

이것은 현세적인 심판이 아니라 그들을 아주 야만적이고 괴상한 정욕에 내버려두는 영적인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내어 버려두셨으니’라는 말이 여기서 세 번 거듭되고 있다(24,26,28절). 영적인 심판이야말로 모든 심판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의 한 방법으로 그들을 포기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것이므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거절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죄의 장본인은 아니시다. 왜냐하면 비록 이 내어버림으로 인해서 아주 심각한 악이 발생한다 해도 그 악의 책임은 죄인의 악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사의 처방대로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면 의사는 그 책임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환자에게서 발생되는 치명적인 증상은 의사의 탓으로 돌려져서는 안되고 질병 자체와 환자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상태로 내버려졌는가?

[1]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졌다(24,26,27절).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24절). 모든 잘못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든 자들이 자신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일에 내버려졌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노예상태에 빠질 수는 없다. 그들의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비정상적인 정욕들이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은 물론 그들 가운데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그런 일들에 악명이 높았다.

아마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그들의 우상숭배를 통해 저질러진 혐오스러운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추악한 신들에게 드려지는 추악한 예배이다.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악이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약한 본성을 억제하는 은혜를 얼마나 베푼지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이런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단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어진 인간이 자신을 마귀보다 더 형편없이 낮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다’고 말한다.

[2] 상실한 마음으로 이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졌다(28절).

1)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의 맹목적인 지식은 그들의 완악한 의지와 감정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 지식 안에 하나님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하게 되면 그들의 정욕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이교도들도 하나님을 알지만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2) 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 대한 보응으로, 그들을 여기서 ‘상실한 마음’이라고 불리는 아주 무서운 죄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셨다. 죄가 어디까지 발전되며 마침내 죄인을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리는가를 보라! 이 상실한 마음이란 감각이 없고(엡 4:19) 무분별하며 마비된 양심을 말한다. 이와 같이 완악한 굳은 마음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엄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써 그들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하신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들이 짓는 합당치 못한 일들의 죄목들을 덧붙인다. 상실한 마음이 악을 좇을 때만큼 본성의 빛에 어긋나는 악은 없다. 그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여기에 언급된 죄들은 로마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던 죄들이다. 자그만치 스물 세 가지 종류의 죄와 죄인들이 여기에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29-31절). 그 당시야말로 로마가 개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였다.

먼저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30절). 여기에서 마귀의 본성이 드러나며 죄가 죄로써 명백히 나타난다. 모든 죄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다. ‘교만한 자’와 ‘자랑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야 할 면류관을 자기들의 머리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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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여기에는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있는데, 이 죄과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모든 죄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과 ‘무정한’ 것은 다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당연히 무정한 부모들에 의해서 그리고 부정한 부모들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다. ‘악의'(악을 위하여 악을 행하는 마음),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무자비’ 등은 여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이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 대한 미움 즉 마음의 살인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추악'(간음)은 일곱째 계명을, ‘불의, 탐욕’은 여덟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사기, 수근수근하는 자, 비방하는 자, 배약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우매한 자’들은 아홉째 계명을 거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은 악을 행하는데는 지혜로우나 선을 행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죄를 꾸미는 일에는 아주 영리하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는 우매하다(그것도 거의 백치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부터 그 속에 이모든 죄들의 씨앗과 알을 품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사도는 그들의 죄가 더욱 악화된 상태를 언급한다(32절).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한 형벌도 알았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알고도. 그들의 양심이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면서도 죄를 지을 때 그 죄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기들만 행할 뿐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순전히 죄 그 자체를 위하여 죄를 사랑하는 처사이다. 그것은 마귀의 왕국을 위하여 마귀와 동맹하는 짓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옳다고 하고 그 죄에 협력할 때 우리의 죄는 더욱 무거워진다.

이제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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