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장 히브리어 원어성경말씀은 느헤미야의 회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이 훼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느헤미야는 유다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회개 하면서 기도했다. 유다 백성이 죄를 지음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다가 이제는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느헤미야가 들었다.
성 경: [느1:1] 디브레 니헤미야 벤 하칼리야 바예히 베호데쉬 키실레브 쉬나트 에시림 바아니 하이티 비슈샤브 하비라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하가라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 여기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이 없다고 해서 본서의 영감성을 의심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물론 예언서들의 초두에서 예언자들이 자신의 전언(傳言)이 신적인 기원을 갖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롑 1:2; 호 1:2; 암1:1). 그러나 그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예언적 특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Schultz). 그러면 본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본서가 ‘느헤미야’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본절은, 본서가 에스라서의 속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느헤미야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성된 책임을 암시한다. 한편, ‘하가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분명치 않지만 ‘여호와의 흑암’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느헤미야’는 포로 전후기를 막론하고 대단히 흔했던 이름으로서,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이다. 바로 이 이름의 축약형이 ‘나훔’이다(나 1:1).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 년. B.C. – 445년을 가리킨다.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 ‘기슬르월’은 태양력으로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에 해당되는 달(月)이 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당시 느헤미야가 머물러 있었던 ‘수산 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들은 대개 겨울에는 ‘바벨론’을,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를 휴양지 삼아 거기서 통치하였으며, 봄이나 가을이 되어야 ‘수산 궁’로 돌아왔기 때문이다(스 6:2; 에 1:2). 느헤미야가 고국으로부터의 급박한 소식을 접하고서도(2, 3절) 즉시 왕에게 부탁하며 귀국할 수 없었던 원인도바로 여기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실제로 느헤미야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의 자초지종을 아뢰고서 귀환 허가를 받은 것은 ‘니산월'(2:1), 곧 B.C. 444년 3, 4월에 해당되는 때였다.
성 경: [느1:2] 바야보 하나니 에하드 메아하이 후 바아나쉼 미후다 바에쉬알렘 알 하예후딤 하필레타 아쎄르 니쉬아루 민 하셰비 비알 예루샬람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친동생인 것으로 추정된다(Fensham, Schultz, 7:1, 2). 나중에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느헤미야를 돕는 관리로 임명되었다(7: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셨다’이며, ‘하나니아’라는 이름의 추약형이다.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 이들이 ‘하나니’를 우두머리로 해서 ‘수산궁’에 온 것은, 예루살렘의 급박한 상황을 페르시아 왕궁의 고위직에 있었던 느헤미야에게 알리려는 의도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니’는 페르시아나 바벨론에 살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결국 이것은 ‘하나니’가 자신의 친형 느헤미야와 헤어져 에스라를 따라 B.C. 458년에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대열에 합류 했었음을 암시한다.
내가 형편을 물은즉 – 이처럼 느헤미야가,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것을 알리려고 급히 찾아온 동생의 일행이 보고를 하기도 전에 먼저 질문한 것은, 그가 고국의 소식에 매우 목말라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Fensham). 특히 여기의 ‘형편을 물은즉'(솨알)은 ‘구걸하다’, ‘간청하다’, ‘질문하다’ 등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출 3:22; 삿 5:25; 왕상 3:1; 렘 30:6 )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 이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스 2:1). 유대인들에게 있어 포로 생활이란 커다란 수치였으므로, 성지(聖地)에로의 귀환은 곧 수치를 면한 것으로 이해되었다(스9:13 참조).
성 경: [느1:3] 바요메루 리 하니쉬아림 아쎄르 니쉬아루 민 하쉬비 샴 바미디나 비라아 가돌라 우비헤리파 비호마트 예루샬람 미포라체트 우쉬아레하 니치투 바에쉬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 이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숫자가 적고 무장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이방인들의 노략 대상이 되며, 지극히 가난하여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Batten). 한편, ‘그 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유프라테스강 서편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Aharoni), (2)사마리아를 가리킨다고 보고 당시 유대는 페르시아의 행정 구역상 사마리아에 속했다고 이해하는 견해, (3) 유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유대가 고레스나 다리오 때에 이미 페르시아의 독립된 한 속령으로 인정받았다고 보며, 학개가 스룹바벨을 ‘유다 총독’으로 지칭한 사실을 그 증거 자료로 제시한다(학 1:1). 따라서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할 듯하다.
예루살렘 성은 훼파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 이 같은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1)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Feysgan, Rawlinson, Schultz),(2) 스 4:7 – 24에 기록된 르훔과 심새등의 훼방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Williamson, Kidner). 예루살렘 함락은 본문 시점로부터 무려 140여 년 이전에 발생한 오래된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본문의 정황은 최근에 발생한 충격적인 요소가 전달된 것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3) 에스라서와 본서 사이의 공백 기간인 12년 사이에 몇차례의 성벽 재건이 시도되었으나 그때마다 훼방당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시대 설정의 측면에서 비교적 무난하다고 이해된다.
성 경: [느1:4] 바예히 키샤미이 에트 하데바림 하엘레 야샤비티 바에비케 바에트아빌라 야밈 바에히 참 우미트팔렐 리페네 엘로헤 하샤마임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울고 슬퍼하며 –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벽없이 살고 있음으로 해서 주변 민족들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괴로움을 당할 것을 염려한 느헤미야의 반응으로서, 유다 백성의 죄로 인하여 삼 주 동안 슬퍼했던 다니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단 10:2).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의 고관으로서 누리는 현세적 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민족의 환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신의 일처럼 고뇌하였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 여기의 ‘금식’은 ‘기도’와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금식’은 기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간절함을 표시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Brongers). 이 같은 ‘금식’과 ‘기도’의 밀접한 관련성은 에스라(스 10:6), 에스더(에 4:16), 다니엘(단 9:3), 사무엘(삼상 7:5, 6) 등에 의해서도 예증된다. 한편, ‘하늘의 하나님’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신 ‘오르무즈드'(Ormuzd)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느헤미야가 전통적인 여호와 신관(神觀)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그 당시 페르시아인들의 용어만 빌려 사용하였을 뿐, 실상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여호와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느1:5] 바오마르 아나 아도나이 엘로헤 하샤마임 하엘 하가돌 비하노라 쇼메르 하베리트 바헤세드 리오하바이브 우리쇼메레 미체오타이브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 여기서 ‘크고'(가돌)는 ‘큰’, ‘위대한’, ‘힘센’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서 인격에 적용될 때, 그 인격의 존귀성 혹은 다른 사물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리킨다(시 57:10; 71:19; 76:1).
주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 – ‘주를 사랑하고’와 ‘계명을 지키는’은 본질상동일하다. 주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방식이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 문자적으로 ‘언약과 긍휼을 지키시는’이다. 여기서 ‘언약'(베리트)은 언약 상대자에게 시여(施與)되는 ‘긍휼'(헤세드)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구는 ‘언약적 사랑을 포기치 않으시는’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Fensham). 이 같은 사상은 신명기 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신 5:10; 7:9).
주여 간구하나이다 – 여기의 ‘주'(엘)는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존재들 위에 뛰어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Jack Scott). 한편, 본절의 기도는 단 9:4의 기도 내용과 내용 상 유사하다. 아마 느헤미야는 B.C. 535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니엘서에 매우 익숙했던 것 같다.
성 경: [느1:6] 테히 나 아지니카 카셰베트 비에네카 피투호트 리쉐모아 엘 테필라트 아비디카 아쎄르 아노키 미트팔렐 리파네카 하욤 요맘 바라옐라 알 베네 이스라엘 아바데카 우미트바데 알 하토오트 베네 이스라엘 아쎄르 하타누 라크 바아니 우베이트 아비 하타누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 –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신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주야로 기도하오며 – 여기에는 원문에 있는 ‘하욤’, 즉 ‘지금’ 혹은’오늘’이라는 단어가 탈락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하욤’은 느헤미야가 그날 하루 동안만 기도했었음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느헤미야’가 그날부터 당장 기도에 돌입했음을 말해준다. 어떻든 그의 ‘주야’를 막론한 기도는, 그 당시 왕이 ‘수산궁’에 없었던 관계로 왕이 그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관한 비보(悲報)를 접한 것이 양력으로 11월 중순 경(1절)이고, 아닥사스다왕이 바벨론의 휴양지에서 3월 중순 경에 돌아왔다고 한다면(1절) 느헤미야의 특별 기도는 약 4개월동안 계속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 이것은 주로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의 범죄 행위와 관련이 있다(8, 9절). 한편, 여기의 ‘자복하오니’는 에스라가 그랬듯이(스 9:6, 7), 느헤미야도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인양 생각하는 등, 시공간(視空間)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철저한 연대 의식을 소유했었음을 잘 보여준다.
주는 귀를 눈을 여시사 – 이 같은 신인동형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표현은, 솔로몬의 기도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즉, 솔로몬은 일찍이 만일 백성들이 범죄하여 타국 땅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그들이 회개하는 기도를 하면 그것을 응답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끔 해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다(왕상 8:46 – 53; 대하 6:36 – 40). 특히 솔로몬은 회개하는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관련해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했었다(왕상 8:52; 대하 6:40).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 하시기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 7:15)라고 하셨다는사실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느헤미야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마치 포로 시대의 상황으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느헤미야의 영적 판단은 (1) 당시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등지에서 여전히 귀환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2) 예루살렘도 포로로 끌려갔을 당시의 상황에서 대부분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당연했다.
나의 아비집 -이것은 슐츠(Schultz)의 주장과는 달리 느혜미야가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음을 암시치 않는다(Joseph Blenkinsopp : Williamson). 이것은 다만 온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의 자리에 동참했던 자들로서의 느헤미야의 조상을 가리킨다.
성 경: [느1:7] 하볼 하발리누 라크 비로 샤마리누 에트 하미체오트 비에트 하히킴 비에트 하미쉬파팀 아쎄르 체비타 에트 모셰 아비데카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 여기서 ‘계명'(미츠오트)과 ‘율례'(후킴) 그리고 ‘규례 ‘(미쉬파팀)는 동일하게 모세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시 119:15, 16). 이와 같은 동의어의 삼중적 반복(9:13, 14)은 본절 전반부의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와 뚜렷이 대비시키려는 저자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저자는 여기서 동의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중의 죄를 범했던 것처럼 연중 암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세 단어가 모세 율법의 각기 다른 세가지 측면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래서 ‘계명’은 ‘언약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요구된 특별 조건’인 십계명으로(스7:11), ‘율례’는 ‘반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스 7:10)으로, 그리고 ‘규례’는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행동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케 해주는 기준'(스7:10)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 이 단어들이 철저하게 율법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2) 율법의 모든 국면들이 이 세가지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없다(Rawlinson)는 사실이다. 어쨌든 에스라서와 본서에서는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모세 율법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1:8; 8:1; 9:14; 10:29; 13:1; 스 3:2; 6:18; 7:6).
성 경: [느1:8] 지카르 나 에트 하다바르 아쎄르 체비타 에트 모셰 아비디카 레모르 아템 티미알루 아니 아피츠 에트켐 바암밈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의 종 –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자였음(신 18:15)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에 의해서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다.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흩을 것이요 – 이 같은 말씀은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30:1 – 5을 해석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범죄하면'(마알 ) ‘배은 망덕'(背恩忘德)하게 행동하다’ 혹은 ‘불충성하게 행동하다’의 뜻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잊고 다른 신을 찾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는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일, (2)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멸망당하는 와중에서 또다른 제 삼국으로 피신한 일(왕하 25:26; 렘 42:10 – 22; 43:1 – 13)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열국’은 앗수르, 바벨론, 애굽 등을 가리킨다. 어쨌든 ‘흩을 것이요’라는 말의 주된 초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가 되게 하신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성 경: [느1:9] 비샤비템 엘라이 우쉬마리템 미체오타이 바아시템 오탐 임 이흐예 니다하켐 비키체 하샤마임 미샴 아카비쳄 바하보오팀 엘 하마콤 아쎄르 바하리티 리샤켄 에트 쉐미 샴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본절의 내용은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29:14 – 30:10까지의 기록을 축약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돌아와서 지켜 행하면 – ‘돌아와서'(슈브)는 죄악된 마음에서의 돌이킴, 곧 회개를 의미한다(시 7:12; 렘 8:6).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의 축복된 상태로 회복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신 4:30; 30:2; 왕상 8:33; 대하 6:24;욘 3:10).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 여기서 ‘쫓긴 자'(니다하켐)는 양을 몰거나(신 22:1) 메뚜기떼를 쫓아내는 행동(욜 2:20)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는 동사 ‘나다흐'(*)의 수동형 분사로서, 불법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부터 멀리 추방된 사람을 가리킨다(삼하 14:13; 사 16:3; 렘30:17). 특히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에스라서에 특별히 많이 나오는 ‘사로잡힌 자'(스 2:1; 3:8; 4:1)와 동의어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회개할 때 다시 본토로 돌아갈 수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무리로 묘사되고 있다(사 27:13; 겔 34:4, 16: 미 4:6; 습 3:19). 한편, ‘하늘 끝’은 ‘가장 먼 곳’을 의미한다(NIV).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 이는 신 12:5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은 곧 한 인물의 전인격 그 자체를 의미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한편, ‘두려고'(레솨켄)는 ‘임시로 거주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칸’의 강조형 부정사이며, ‘거처로서’의 뜻(NIV, Williamson) 갖는다. ‘성막'(미쉐칸)이라는 단어가 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동족어이다. 또한 ‘택한'(바하르)은 대개 종교적인 목적에 따라 특별히 하나를 구별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며(민 17:5; 왕상 11:13; 시 105:26; 학 2:23), ‘곳'(마콤)은 성경에서는 대개 종교적인 이유 및 목적 때문에 구별된 경배 처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신 12:14; 수 9:27; 삼상 5:11; 왕상 8:7; 대상 15:1).
성 경: [느1:10] 비헴 아바데카 비암메카 아쎄르 파디타 비코하카 하가돌 우비야디카 하하자카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간구]
주께서…구속(救贖)하신 주의 종…주의 백성이니 – ‘구속하신'(파다)은대신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던 한 개인에 관한 소유권을 넘겨 받는 것을 그 기본 의미로 갖는다(Harris). 한편, ‘주의 종’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종’이고, ‘주의 백성’도 ‘당신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주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신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신’때문이었다.
큰 권능과 강한 손 –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음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나온다(출 6:1;9:11; 신 3:24;4:34;5:15; 7:8;9:26,29).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문구의 사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다. 즉, 이것은 출애굽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이전의 형편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에 대한 느헤미야의 간절한 염원을 반영한다. 사실 에스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암시했으며(스 1:11 주석 참조). 특히 훨씬 후기의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단언하였다(F.M.Cross).
성 경: [느1:11] 아나 아도나이 테히 나 아지니카 카셰베트 엘 테필라트 아비디카 비엘 테필라트 아바데카 하하페침 리이리아 에트 쉐메카 비하칠리하 나 리아비디카 하욤 우티네후 리라하밈 리페네 하이쉬 하제 바아니 하이티 마쉬케 라멜렉크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간구]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 –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느헤미야를 찾아온 ‘하나니’ 일행을 가리킨다(Fensham , 2절). 느헤미야가 그들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전달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썼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온갖 위해(危害)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던(스 8:21, 22, 31) 약 1,400Km의 길을 자청해서 행(行)하여 느헤미야에게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구가 팔레스틴 본토의 경건한 유대인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음도 배제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 이것의 구체적 내용은 이어지는 문구와 관련된다. 여기서 ‘형통하여'(찰레아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시작한 일을 그 과정과 결과까지 성공적으로 이끄시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창 24:21, 40,56; 왕상22:12).이 단어는 성경에서 항상 그 주어가 ‘하나님’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 이는 (1) 느헤미야에게 왕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리고 소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스 4:11), (2) 느헤미야의 소청이 왕에 의해서 기꺼이 받아 들여지는 것(2:3 – 6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라는 특별한 지위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 중 첫째의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느헤미야가 중요 직위에 있었으면서도 이 같은 염려를 한 까닭은, 그가 페르시아왕들의 변덕스러움, 즉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호의를 베풀다가도 곧 그 태도를 급변시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느헤미야는 (1) 자신이 왕에게 소청하러 나갔을 경우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왔음을 이유로 왕이 진노하는 것(에 4:11),
(2) 자신이 왕에게 소청을 했을 경우 그것을 불쾌히 여겨서 심지어는 선대(先代)의 왕들이 내린 조서까지도 무효로 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이 사람’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왕에 대한 느헤미야의 시각을 잘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느헤미야는 세상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피정복민들의 생과 사를 좌우할 수 있는등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을, 신앙적인 시각에 따라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으로서만 보고 있는 것이다(Fensham). 다시 말해서 이것은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 가고 못가고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렸다고 보았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에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느헤미야가 기도의 응답으로 ‘술 관원’의 지위에 오른 듯한 오해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적절치 못하다. 느헤미야는 이미 ‘술 관원’의 지위에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그때에 술 관원이었느니라’고 번역함이 타당하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여기서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1) 앞의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시사해주며, (2) 자신이 왕에게 소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Rawlinson). 아무튼 느헤미야가 ‘하나니’ 일행이 팔레스틴으로부터 오기 전에 이미 ‘술 관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수산 궁’에 있었다는(1절) 점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술 관원’에대 한 자세한 내용은 본장 둘째 단락의 주제 강해, ‘왕의 술 관원으로서의 느헤미야’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