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예수님 설교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해서 말씀한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식을 주인이 들었다. 청지기는 자기가 주인으로부터 청지기 직무를 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것을 안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다.
Ⅰ. 불의한 청지기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하니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이다. 복음 안에서 이 양자를 밝히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일에 참여시키고 고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수 많은 은혜의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선하게 이용할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장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복지를 도모하기 위하여 경건과 자선의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우리의 재산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1. 청지기의 비유(1-8)
이 비유 자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청지기로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 청지기의 불성실 :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주인에게 고소당하였다(1절).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고소를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진보를 우리는 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데 힘써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박탈 : 그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2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실망하게 되어 유감인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은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고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책임을 지고 잠시 후 물러나게 되었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얼마 후에 청지기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청지기직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죽을 때에 우리가 청지기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틀림없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 날에 우리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드려야 한다.
(3) 그 후 갖게 된 지혜 : 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절). 그는 벌써부터 이점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 (1)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는 자기에게 그럴 만한 근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그러나 땅을 파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은 그의 게으름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땅을 팔 힘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따을 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2) 그가 구걸하여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 그럴 만한 겸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그가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을 보여 준 것처럼 교만에서 나온 말이다. 이 청지기는 구걸에서 얻게 될 수치보다 자기 주인을 속임으로 말미암은 수치가 더 큰 이유이었다. (3)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가 내 주인의 채무자들을 알고 있고, 여러 번 친하게 대해 왔었다. 이제 한번 더 도움을 베풀어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반길 수 있도록 하자. 내가 혼자서 살아나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에게 숙소를 정하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6절). 이와 같이 해서 그는 그 빚을 반으로 탕감하였다. “우리가 발각되거나 이심받지 않도록 빨리 앉아 고쳐 써라.”
그는 자기 주인에게 밀 백석을 빚진 다른 사람을 불러 그에게 십으로 고쳐 쓰라고 했다(7절). 본문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재산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보라.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그러하다. 그들은 그 재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맡은 이들에게 주인인 자기도 속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배반당하는가를 보라. 이 청지기는 부정 거래한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 잘못을 고치는 일은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칭찬 :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그의 주인, 즉 그 종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 자신을 위하여 기발한 생각과 계책을 세운 것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이 구절의 후반부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 전체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속였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서도 잘 하였고, 채무자들과는 바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무자들에게 빡빡한 거래를 했었으므로 저들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서 그는 이제 공정과 자비를 모두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주인의 신을 잃어 버리자 채무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해 우리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즉 빛의 아들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곳 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적인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 데 있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일에 관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일을 할 때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필요한 우선적인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이용한다는 원리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지혜롭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 살 것처럼, 그리고 이 후에는 다른 세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다른 세계에 최선의 애정을 쏟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2. 비유의 적용과 결론(9-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절).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즉 이 말은 “이 세상에 비록 얼마밖에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적은 것으로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시는 것은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이 후에 자기 돈의 이익을 배당 받을 수 있도록 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 후에 더 나은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소망을 갖고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듯이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돈을 이용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주의 재산이지만, 우리 주의 채무자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재산을 사용한다면, 우리 주님께 손해를 끼치기는커녕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편이자 주님께 대한 의무를 행한 것이 될 것이다.
(1) 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 또는 일시적인 재물이다. 부란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것에 기대를 거는 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2) 비록 이 불의의 재물이 행복을 위하여 맡겨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리가 그 재물에서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임종할 때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상인이 파산에 이르게 될 때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즉 죽음은 상점을 폐쇄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릴 것이다. (4) 우리가 쇠약하여 죽게 될 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로 영접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셔서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 디모데전서 6:17-19을 보라.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그는 여러 말씀으로 이 권고를 더욱 강조하신다.
1)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옳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선물을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섭리의 선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불성실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은혜를 상실한 자로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10-14절). 이 세상의 부는 보다 적은 반면에,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만일 우리가 적은 것에 불성실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10절).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고상하고 가치있는 지혜와 자비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것이나 이 세상의 부한 달란트를 묻어 두는 사람은 영적인 부 다섯 달란트를 절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불의의 재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빨리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그 재물을 이용하려 한다면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참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11절).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란 믿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만일 다른 부가 우리에게 추가되어 진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더 확고히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큰 영적인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하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부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하늘 나라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것들로 우리를 부요케 하실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에게 유용한 세상적인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를 섬기는 일에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경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와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더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과 그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이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앞에 분명해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들의 관심이 나누어지므로 그들은 절대로 혼합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 보자.
1)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 그의 말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부정할 수 없었지만 비웃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탐욕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범하는 죄이었다.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헌신적으로 많은 실천을 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세상을 사랑한 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이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욕망, 그들의 ‘들릴라’, 즉 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코웃음쳤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극도의 경멸과 모멸의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세상의 견해와 방법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예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롱까지도 참으셨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야유를 받고 조롱을 받으셨다. 이 사실로 충성스러운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경멸당하는 것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비웃음을 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선 수치가 아니라 비웃음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예수께서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과 냄새로써 그들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꾸짖으셨다(15절).
①가장한 외모 : 첫째,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져야 할 어떤 잘못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과제로 삼는 자들이며, 세상에 자신을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너희는 이런 일로 유명하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특별 취급하여 죄를 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②추악한 내면 :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의 모습이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 앞에 스스로 옳다 하는 것과 우리의 악한 것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충분히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악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사실을 숙지할 때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 속에 비천한 인격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평가에 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히 여김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미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경우도 있다(고후 10:18).
3)예수께서는 이 욕심 많고 자만에 가득찬 바리새인들보다 복음에 의해 훨씬 더 감화받을 수 있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원이 유대인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 조직과는 달리 오직 개개인을 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르치지 않도록 구원을 얻어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를 경멸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의 생각에 율법과 선지자에게 있었던 부에 대한 많은 약속과, 다른 현세적인 재물들에 대한 약속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그리고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 복음이 전파된 이상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다.”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들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세상과 거스려 싸워야 하며, 정반대의 길로 가는 무리들을 밀어내야만 한다.
4)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효로 만들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정되고 재가되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명하는 의무는 여전히 지켜야 할 본분이다. 그것이 금하는 죄는 여전히 죄로서 존재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에서 완전하여지며, 그 그림자는 복음의 색깔로 칠해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인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큰 부정을 막기 위하여 묵인한 몇 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복음은 그러한 허용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마태복음 5:32, 19:9에서 이미 상고한 바 있는 이혼의 사례에서처럼(18절), 율법을 거스리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부패한 탐욕과 정열의 지독한 그 근원을 쳐서, 그것들을 죽이며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욕망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완고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탐욕에 빠질 정도로 허용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