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례식에 부를 찬송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당황스럽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다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고인과 이별하게 됩니다.
524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밀레도 항구의 이별>
행 20:17-38
서론 : ‘이별’을 주제로 한 찬송인 동시에 다시 만나는 ‘상봉’을 전제로 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시 만날 것을 전제로 하는 이별이다.
우리 다시 만날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1절>
이 애절하고도 희망에 넘치는 찬송은 미국의 란킨(J. E. Rankin 1825-1904)목사가 지었는데, 목회에도 성공하고 말년에는 하와드대학(흑인계) 총장으로 봉직하였다. 란킨 목사는 고별예배를 위해 적당한 찬송을 찾다가 실패하자 자신이 친히 찬송을 지은 것이 이별찬송의 최고 걸작인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지어서 명찬송 반열 위에 올랐다. 사실 이별을 주제로 한 찬송이 많지 않음으로 매우 귀중시하는 찬송이다.
사람이 만나면 기쁘고 이별하면 슬퍼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항구는 이별의 상징이다.
가령 원항선 출범할 때 보면, 배에 탄 수 많은 선객들과 선원들은 부두에 전송나온 가족, 친지들과 오색 테이픈를 맞잡고 기다리다가 출항의 기적소리가 부두에 울려퍼지고 닻 감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맞추어 배는 움직이기 시작하여 테이프가 산산히 끊어지고 손순건을 흔들며 “잘 가시오” “잘 있으오”소리 지르며 이별하는 모습은 매우 뜻깊었다. 요즈음은 그런 풍경도 잘 안보인다.
그 곳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탔기 때문이다. 혹은 애인을 남겨 두고 멀리 이국에 가는 사람이나,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서 외국 유학길을 떠나는 학도, 혹은 장사 차, 공부 여행 차 등등으로…여하튼 항구의 이별은 서글픈 눈물로 부두가를 적신다고 하겠다.
1. 이별은 인간생활의 상사
(1)야곱과 에서의 이별은 불가피한 이별
그들은 쌍둥이 형제 사이인데 저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려고 미련한 경쟁을 하였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야곱을 귀히 여겼다. 이같은 편애적 사랑은 드디어 이삭 가정에 불화의 씨를 심었으며, 야곱은 간사하여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으니 더구나 아버지 이삭이 노혼하여 시력이 약한 것을 기회로 속여서 축복받았다. 이로 인하여 형 에서의 미움을 받아 어머니 슬하를 떠나 멀리 외삼촌의 집으로 망명하게 되었으니 이 형제간의 이별은 불가피한 이별이다.
(2)요셉이 부친 집을 떠난 것은 원통한 이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입어 이스마엘 대상들에게 팔리어 애굽으로 떠나가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으니 이는 억울하고 원통한 이별이다.
(3)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은 안타까운 이별
다윗과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 왕자와는 극진한 친구지간이다. 그러나 부왕 사울이 다윗을 시기 질투하여 여러차례 죽이려고 함으로 같이 지낼 수 없어서 이별하였는데, 다윗이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었으되 다윗이 더욱 심하였다(삼상 20:41-42)고 했다.
(4)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해방의 기쁜 이별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 노예생활을 계속하다가 모세시대에 그 쇠사슬을 끊고 홍해를 건널 때에 “너희가 오늘은 애굽인을 보나 이후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고 하였으니,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인 사이의 이별은 해방의 기쁜 이별이다.
(5)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갈 때의 이별
유대 민족이 우상숭배의 범죄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쓸데 없는 노약자들은 남기고, 주로 청장년들을 납치해가니 저들의 이별은 피눈물나는 비참한 이별이라고 하겠다.
(6)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 제자들과의 이별
감람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과 이별하였는데, 천사들이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우르러 보느냐 이 예수를 너희중에서 하늘로 오르게 하였으니 하늘로 오르게하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전별사를 하였는데, 이 재림의 약속을 하시며 이별하였으니 이는 위로와 소망과 사랑의 이별이다.
(7)바울과 바나바의 이별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선교여행의 동반자였는데, 제 2차 출발시에는 마가 동행의 찬반으로 인하여 헤어졌다. 바나바는 다시 동행을 주장한데 반하여 바울은 적극 반대하여 결국 이것 때문에 선교의 동지가 분리하였으니 너무나도 섭섭한 이별이라고 하겠다.
2. 이별이란 모두 슬픈 것이다.
환난을 당하여 살길을 찾으려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망향하는 이별은 심히 괴로운 일이다. 또한 학창의 성공을 목표로 부모 슬하를 떠나는 학생이나,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출가 이별하는 자들은 일시적으로는 석별의 정이 있지만 소망중에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내할 수 있다.
바울은 제 3차 선교여행에서 에베소교회를 창설하고, 3년간 채류하며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목회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항구로 불러다가 최후의 이별을 하는 장면은 얼마나 처량한가?
바울은 이제 에베소교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사 바울의 신변을 염려한 각 교우들을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하고, 바울은 그 말에 개의치 않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용감히 말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목자를 보내는 저들의 심정이 얼마나 처령한가? 육신적으로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면서 이별을 애석해 하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다.
3. 아니 할 수 없는 이별
그러나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 상경을 단념해도 될 것이다. 에베소 교우들이 강제적으로 붙들면 안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요, 아니 할 수 없는 이별이기에 더욱 서글프다.
이별하지 아니 함은 육신적인 정리뿐, 일사순교의 이별은 신령한 뜻을 수행하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지고서 자기를 이기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제자로서 마땅히 갈 길이었다.
작은 일을 떠나서 큰 일을 이루려고 이별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 목회도 큰일 같지만 예루살렘과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전파의 대사명을 지닌 바울로서는 어떠한 역경과 환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별하지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도 좋지만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서로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은 저들의 교제심을 더욱 두텁게 하였으니 이 별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이별이든지 이 별 중에서도 신앙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고 앞을 내다보며 인내해야 한다. 지상에는 육신적인 이별이 종종 있으나 천국에는 이별이 없이 영원히 함께하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결론 : 밀레도 항구의 구슬픈 이별곡, 지중해 파동물결만 부두 해안에 철석철석 부딪치며 갈매기가 끼륵끼륵 구슬피 울어 나그네 심정을 더욱 서글프게 한다. 사랑으로 만류하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슬픈 이별 아니할 수 없는 이별임을 설명하고, 따라서 말씀을 마치고 무릎을 꿇고 뭇사람과 더불어 같이 기도하여 남아 있는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애원하고, 또 자기의 진로를 부탁하는 노 사도의 주름 잡힌 얼굴에도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어 서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대성통곡하니 밀레도 항구의 파도 소리만 더욱 처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