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0장 복음 설교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회복되어 돌아올 것을 예언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바벨론에 끌려가서 고통 받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 다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했다.
Ⅰ.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 40:1-2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 임무와 지시는 비단 이사야 선지자에게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모든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특히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포로로 잡혀갔던 당시의 선지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이다. 포로된 자들을 격려하여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또한 이 말은 성령께서 위로자와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조력자로 세우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자신들의 임무를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체적으로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1절).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최악의 환경 가운데서도 위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이사야서 전반부에서 본 것과 같은 정죄의 말씀 뒤에는, 반드시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위로의 말씀이 따라온다. 그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그 분이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하신 위로의 말씀이다(2절).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이것을 속삭이지 말고,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즉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악을 보여 주고, 또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보여 주라. 예루살렘으로 이것을 듣게 하라.” ‘그 복역의 때’, 즉 정해진 노예 생활의 기간이 끝났다. 이제 전쟁이 종료되었다. 인생은 전쟁이다(욥 7:1). 성도의 생활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전투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때 선한 백성들은 안식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제거되었을 때 결과도 끝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게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고, 하나님께서 그와 화해하셨다고 말하라. “아들아 즐거워하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이 말보다 더 큰 위로의 말은 있을 수 없다. 죄사함을 받는 그때에 사랑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제거된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즉 예루살렘이 그 모든 죄를 치유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우상 숭배는 큰 죄악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이 죄악에서 깨끗케 하시기를 작정하셨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우상 숭배에서 격리될 만큼 충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포로 생활의 고통은 그들의 마음속에 우상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 놓았으며, 이 죄악을 깨끗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강한 처방이었던 것이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고난 안에서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이루신 속죄가 죄의 대가보다 두 배 이상,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이다.
Ⅱ. 구속을 위한 준비 40:3-8
시온에 은혜 베푸실 때가 다가왔을 때,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은혜에 알맞게 준비시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글을 보는데, 우리는 이 말을 포로 시대의 선지자들 즉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포로된 자들에게 이 구원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외치던 선지자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는 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정돈시키기 위하여 즉 ‘여호와의 길을 에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1) 그는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요구함으로 그들을 준비시켰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 전파하고(마 3:2,5), 이렇게 함으로써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였다'(눅 1:17). 하나님은 지금 자비의 길로 오신다(3-5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에 적용시킨다면,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그들 앞에 가로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돌아올 때에 이 모든 어려움이 제거되리라는 약속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광야의 소리는 선구자들로 하여금 길을 고르는 작업을 하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준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자신을 정돈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여호와께서 들어오심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없애 버려라.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라.”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실의와 좌절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를 얻지 못하는 자들은 ‘돋우어야’ 되는 골짜기들이며 자고한 마음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를 얻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낮아져야’ 되는 언덕이며 산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도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며 불순종하는 자들은 곧게 되어야 하는 굽은 길이다.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5절).
포로된 자들이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고레스 왕이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일정 기간 동안 회개를 전파하여 백성들이 여호와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을 때(눅 1:17), 메시야가 직접 그의 영광가운데 나타나셔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실 것이며, 요한이 죄인이라고 선언함으로 상처 입혔던 자들을 은혜로써 안위하시고 싸매고 치료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은 이웃 백성들이 주목하여 보았던 것처럼(시 126:2),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2) 그는 어떤 피조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믿게 함으로 백성들을 준비시켰다. 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예언과 약속이 성취될 때, 여호와의 언약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 앞에서 풀과 같이 될 것이며, 시들어서 당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바벨론 사람들도 풀과 같을 분이다. 또한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돕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의뢰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풀과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려 하실 때에는, 그들이 피조물을 의지하던 행위와 산과 언덕에서 구원을 찾던 행위를 모두 끊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곧 이제 나타날 여호와의 영광과, 그의 은혜 곧 영광과 함께 우리에게 보내주시며 또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려는 우리는 ‘모든 육체는 풀고 같이 약하며 시들어져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피조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과 꽃과 같을 뿐이다. 피조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과 꽃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행복을 공급해 주시는데 이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Ⅲ.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40:9-11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5절).
(1) 이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9절).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소식이 시온과 예루살렘에 나아 있는 자들, 곧 전에 그 땅의 포도원 지기와 농부들이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공포될 것이다. 그들은 형제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포로된 자들도 이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시온이 ‘바벨론의 딸과 함께 거한다’고 표현되어 있다(슥 2:7). 시온은 거기에서 고레스의 관대한 정책 발표를 들었다.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공포할 것이다(본문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 이미 돌아온 자들은 이 소식을 가능한 한 크게 외쳐야 한다. 힘써 소리를 높이라.
“유다의 성읍들과 그 당의 모든 거민들에게 말하라.” 너희 하나님을 보라.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도다.” 후에 유대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즉시 제단을 세우고, 예루살렘에서 다른 유다 성읍들에게 통지하여 와서 희생드리는 일에 그들과 동참하라고 초청하였다(스 3:2-4). 본문의 이 예언은 이 초청의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공공연하게 담대히 전파할 때 완전히 성취될 예언이었다.
(2) 장차 나타날 그 영광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그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누가 대항한다 할지라도 전혀 방해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의 업적에 따라 보상하실 것이다.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하나님은 행하신 바를 친히 아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시 80:1). 또한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그의 말씀은 양떼를 먹이는 꼴이며, 그의 법은 양들이 뛰노는 들판이다. 그리고 그의 사역자들은 작은 목자들이다.
그는 약하여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양들과 ‘젖먹이는 암컷들을’ 돌보신다. 선한 목자는 어린이들, 연약한 초신자들, 믿음이 약한 신자들과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이들은 그의 양떼들이다. 그는 이 양들이 방황할 때 모아 들이시며 넘어질 째 일으키시며 흩어질 때 함께 있게 하심으로 결국 함께 모아 안전하게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손수 하시므로 양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갈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요 10:28). 그는 양들을 자상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Ⅳ. 하나님의 크심 40:12-17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격려하여 희망을 가지게 하고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신앙심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함이다.
(1)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다(12절).
1) 하나님의 영역은 광대하다.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은 ‘뼘으로 하늘을 재신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릴 수 있으며, ‘땅의 티끌을 (한)되에 담으신다.’ 혹은 세 손가락으로 집는 것 이상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힘은 무한히 커서, 상인들이 물건을 저울에 달아보는 것처럼 쉽게 산들을 옮기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산들을 평형 저울에 달아 놓으신 것처럼 정확하게 균형을 잡아 놓으셨다.
(2) 하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13,14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않으신 어떤 것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요 26:13), 그에게 충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에게는 이 세상 통치에 대하여 조언하는 어떤 묘사도 필요하지 않다.
(3) 비교해 보면 세상의 열국들은 아무것도 아니다(15,17절). 모든 크고 강력한 나라들과 가장 호사스러운 왕들과 가장 인구 많은 왕국들을 보라. 많은 섬들 열방의 무수한 섬들을 보라.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들이 광대한 바다에 비하여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땅의 모든 티끌에 비하여 ‘저울의 적은 티끌'(너무 적어서 저울이 움직이지도 않아, 무시될 정도의 양) 같다. 그가 ‘섬들을 먼지같이’ 드시며 열방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므로 우리도 이것들을 이와 같이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모든 것을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끌어 내신 것처럼, 또한 쉽게 없이 하실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빈 것’이다. 이 단어는 창1:2의 공허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와 같이 하찮은 것이지만,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사실은 세상에 대한 하남의 사랑을 웅변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무엇을 더해 드리는 것은 아니다(16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하나님은 모든 찬양과 송축,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훨씬 높이 계시는 분이시다.
Ⅴ. 하나님과 우상 비교 40:18-26
여기에서 선지자는 첫째,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이것들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하며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책망한다. 둘째,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이들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한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같은 질문을 두 번 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18절).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25절). 이 질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고 또 거기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준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며, 탐심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과 같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거나 사랑하며 두려워하거나 그 안에 희망을 둔다면, 그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모독이 된다.
(1) 이제 선지자는 우상이란 한낱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고 설명해 준다(19,20절). 우상들 가운데 좀 나은 종류를 생각해 보자. 이것도 어떤 형편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제작자가 원하는 모양대로 주물한 후, 금 신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도금하였거나 겉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 이것은 직공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제작물이지 ‘참 신이 아니다'(호8:6). 이것은 겉은 금이지만 속은 납이나 동이다. 따라서 비록 신성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드러나 보이는 것과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기만이다. 너무 ‘궁핍하여’ 자기 신에게 희생 하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자도 비록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신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상이라도 가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그것을 조각하여 자기의 신상을 만들 것이다. 좀 나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슬을 가지고 자기 신상들을 장식한다. 그리고 비록 나무 우상을 가진 자들도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그 신상들(‘느후스단’, 놋조각 혹은 나무 막대기)이 자기들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으리라고 허황된 꿈을 꿈으로써 자신들의 이성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가! 또한 이들이 유일하시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애하는 우리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가! 이들은 자신의 우상들을 위해 어떤 지출도 아끼지 않는데,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것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는가.
(2) 선지자는 하나님을 무한히 크시고 최고의 경배를 받으실 만한 분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제시한다.
1) 그는 사람들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들은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21절). “너희는 직관적으로 ‘알지 못하느냐.’ 태초로부터 조상들과 선진들에게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전승에 의해 아버지들과 선생님들에게서 ‘듣지 못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항상 인정되어온 사상, 즉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들 위에 크신 왕이시라는 사실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롬 1:20). 우리는 조상들과 장로들에게 물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신 32:7), ‘길 가는 사람들’에게(욥 21:29),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신다.
하늘과 땅도 그의 관할 하에 있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22절). 그는 지금도 여전히 하늘을 펴고 계시며, 또한 하늘이 두루마리 같이 말려질 그 날이 오기까지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커튼을, 아침에는 열고 저녁에는 닫는 것처럼 쉽게 하늘을 펴신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하여 하늘은 ‘거할 천막’ 같은데, 우리 머리 위에 씌운 유리덮개와 같다. 하나님의 눈에는 수많은 이 땅 거민들이 우리 눈의 메뚜기 같이 작고 또 쉽게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탐꾼들이 아낙 자손들 앞에서 자신들을 메뚜기로 생각했다면(민 13:33),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되겠는가? 메뚜기는 잠깐 동안밖에 살지 못하며 개미와는 다릴 아무렇게나 생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생동하는 사람들을 그의 능하신 손으로 반드시 끌어내리실 것이다(23,24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흠정역에는 ‘하나님이 심으시지도 않고 씨를 뿌리시지도 않고’로 되어 있다-역주.) 씨를 뿌리거나 묘목을 심는 것은 식물을 번식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씨를 뿌리시지도, 심으시지도 않으신다면, 그리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는다면 그들은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주께 대하여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항상 이 땅만 살피지 말고, 가끔 위를 보라. 하늘의 찬란한 빛들을 보고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피조물 중에서 보는 것이 우리를 창조주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늘의 군중’들을 볼 때,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고 일월 성신에게 경배할 뿐이었다(신 4:19). 창조주께서는 마치 장군이 자기 부대 병력을 출동시키듯이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신다.’ ‘저가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 147:4). 그의 권세가 크고…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Ⅵ. 야곱을 꾸짖으심 40:27-31
(1)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책망한다(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네 자신과 네 적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하느냐.
1)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을 ‘야곱아’, ‘이스라엘아’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불신앙을 부끄러워하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공인하신 백성으로서,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으로서 이러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2) 선지자는 그들과 변론하는 방법을 택하여 그들을 책망하였다.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의 대부분은 그 원인을 냉철하게 따져볼 때 사라지게 된다.
3)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팽개치신 것처럼 말하였다.
4)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좋지 않은 말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결론 내리려고 하였다.
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현재 우리 경우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어려움들이 많이 있다.
②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능력이 없으시다.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내 소송 사건은 일단 재판이 끝난 것이며 하나님 자신도 그 원통함을 보상하실 수 없는 것이라.”
(2)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 모든 두려움과 불신앙을 잠잠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21절). 야곱과 이스라엘은 지식이 있는 백성이며, 이 지식은 들음에서 얻은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지식들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권능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시 62:11).
1)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부패가 도무지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분이다. 그는 시작과 끝을 초월해 계시므로 그에게는 변화가 도무지 없다. 그는 또한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이시다. 따라서 만물의 의로운 통치자이시며,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의 교회를 구원하실 능력도 있으시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따라서 그의 명철의 끝으로 찾는 자들의 의도를 꺾어 버리실 수 있다.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명철은 여기까지이며 더 이상은 아니라”라고 말할 수 없다. 곤비치 아니하겠고…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는 모든 창조 세계를 주관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그의 교회가 약해 쓰러졌을 때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며 그들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우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다.
①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실 수 있다(29절).
② 하나님은 스스로 하려고 하는 자들, 즉 겸손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가운데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시며,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성공하도록 도우신다(30,31절). ‘소년’과 ‘장정’들은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강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도 ‘피곤하며 곤비해질’ 것이며, 문제와 짐에 눌려서 ‘넘어지며 자빠지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들은 충분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새 힘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실 것이라'(33:2). 그들은 이 은혜를 가장 선한 목적을 위해 쓸 것이다. 그들은 위로, 곧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은혜를 입은 영혼이 타고 오르는 독수리의 날개이다. 그들은 힘차게 앞으로 하늘까지 전진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이 행하고 열심히 그 길을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