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예수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한다.이사야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을 예언했다. 성도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해야 한다. 오직 신랑이신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Ⅲ. 세례 요한의 증거 1:15-18
1. 세례 요한의 증거의 성격(15)
여기에서 복음서 가자는 우리에게 다시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제시하고 있다.
(1) 세례 요한은 어떻게 증거했는가 : 외쳐 가로되. 요한은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것이라는 예언에 적합하게 외쳤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죄를 지적해 주기 위하여 큰 소리로 외쳤지만 이 신약 시대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구주를 알려 주기 위해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 외침은 개방된 대중적인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 차릴 수 있도록 하였다.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거침없이 그리고 진심을 다해 증거하였다. 세례 요한은 외치되, 자신이 증거하는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 또한 그 진리에 대한 깊은 감동 속에서 외쳤다.
(2) 세례 요한의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기리킴이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역 초기에 자기 뒤에 올 자를 기대하라고 말했던 그 사실을 듣는 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요한은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했다. 지금 이 구절에서 세례 요한은 자기가 과거에 말했던 그 사실을 최근에 자신이 세례를 베푼 이 예수라는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은…바로 이 사람을 가리킴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능가하고 있으니 즉 그가 그 인물을 정확하게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1) 세례 요한은 이 예수가 앞서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왕이나 고관 대작의 선두에 앞서 가면서 길을 여는 내시나 전령보다 그들 내시나 전령의 뒤에 오는 왕이나 귀족이 훨씬 우월한 자들이듯이 세례 요한은 자기의 뒤에 오시는 이가 자기보다 더 높으시다고 말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라 일컫게 될 그리스도 예수(눅 1:32)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앞선 분이셨다. 세례 요한 역시 위대한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높으신 그분께 그 높으심을 돌려드리고자 하였다.
세례 요한의 이러한 태도와 같이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역자들은 자신들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여겨야 하며 자신들의 유익보다 그리스도께 유익이 되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이지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며 야곱의 경우와 같이 그 순서가 바뀐 예가 허다하다. 바울의 예를 보아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보다 앞서 있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것이다.
2) 계속해서 세례 요한은 그 이유를 밝힌다 :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첫째, 연배상에 있어서 그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지는 얼마되지 않지만 그분은 영원부터 계셨던 분이다. 둘째, 주권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신데 반하여 나는 그 주인의 일군이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2.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육신하신 말씀(16-18)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16절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하여 쓰고 있는 14절 말씀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흘러넘치는 충만한 샘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우리가 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다 성육신하신 말씀으로부터 받는다. 참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받는다. 즉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성자라도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미천한 신자라도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에 의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자랑하고 뽐낼 것이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이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기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당황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의당 받아야 할 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받은 모든 것을 한마디로 종합하면 은혜라는 말이다. 은혜란 참으로 위대한 선물이요, 풍성한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크나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은혜라는 말은 ‘은혜 위의 은혜’라는 말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받은 축복 : 우리가 받은 축복이란 은혜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는 우리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선한 역사를 이루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받기에 합당하게 우리를 만드시는 것이다. 마치 저수지가 풍부한 수원으로부터 물을 받아 저장하며, 나뭇가지가 그 뿌리로부터 청청한 수액을 받고, 충만한 태양으로부터 대기가 빛을 받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2) 축복을 받는 양태 :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구절은 매우 독특하여 주석가마다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 해석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 ‘은혜 위에 은혜’란 은혜의 값없음을 가리킨다. 대가를 받지 않고 주는 이 은혜는 곧 은혜를 위한 은혜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지만 우리를 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까닭에 은혜는 우리에게 은혜가 된 것이다. (2) ‘은혜 위에 은혜’란 이 은혜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곧 은혜 위에 은혜가 쌓이는 은혜의 풍성함이다. 그런 은혜는 축복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그 축복은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은혜는 더욱 많은 은혜의 보증이다. (3) ‘은혜 위에 은혜’는 은혜의 봉사적 성격을 가리킨다. ‘은혜 위에 은혜’는 은혜를 촉진시키고 전진시키는 은혜이다. 은혜로운 실천을 하도록 은혜로 든든히 뒷받침해 주시는 것이다. 은혜란 호혜적인 달란트이다(롬 1:5; 엡 3:8; 벧전 4:10). (4) ‘은혜 위에 은혜’란 구약의 은혜를 대신하여 신약의 은혜가 등장했음을 가리킨다. 다음 17절에 이러한 의미가 곧 나타난다. 구약은 모형안에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신약은 진리 안에 은혜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5) 이 말은 은혜의 증대와 지속성을 표시한다. ‘은혜 위에 은혜’란 다른 은혜를 증대시키며 굳건히 할 뿐 아니라 완성시키는 은혜이다.
(6) ‘은혜 위에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응답하는 우리 속에 있는 은혜를 가리킨다. 클라크(clark)에 따르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은혜와 성도들 안에 간직하고 있는 은혜가 일치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우리 안에 있는 은혜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롬 15:49; 고전 15:49; 고후 3:18).
(2)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받았다(17절). 복음서 기록자인 요한은 14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쓰고나서 여기에서는 바로 그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 은혜를 받는다. 이 말이 요한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기쁨이 되었으며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없을 지경이다. 이 은혜에 관한 이 구절 안에서 그는 계속해서 두 가지 사실을 관찰하고 있다. (1)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은혜의 우위성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그것 역시 영광스런 계시였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욱 분명한 계시이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은 전적으로 위협적이요 두렵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온 것, 즉 복음은 율법의 온갖 유익한 용도를 지니고 있지만 공포가 아니라 은혜이다.
복음의 진수는 율법의 위협과 저주가 아니라 사랑의 친밀함이다. (2) 은혜와 진리의 상호 연관성 : 은혜와 진리의 복음은 의지와 사랑으로 포용해야 할 풍성한 은혜를 담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오성에 의해 포용해야 할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은혜와 진리는 모세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이란 구약의 모든 언약에 대한 이행이라는 점이며 둘째, 복은이란 구약의 모든 모형 내지 그림자의 본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요, 속좌 염소요, 참 만나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모사안에 은혜를 가졌으나 우리는 인격 안에, 사람 안에 은혜를 갖고 있다. 은혜와 진리가 ‘왔다’, 은혜와 진리가 ‘되었다’는 이 단어는 3절 ‘만물이 그리스도의 지으신 바’하는 구절에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바로 그에 의해 이 은혜와 진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한 계시를 주셨다는 사실이다(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1) 다른 계시의 불충분성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첫째, 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성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 필요가 있으며 그 믿음에 의해 우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히 11:27). 둘째,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구약에 드러내신 계시가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내신 계시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간략하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즉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에 의해 세워졌으며, 바로 이런 사실로 해서 우리에게 기독교란 독특한 종교인 것이다.
2) 복음의 원 저자에 의해 복음 사건의 충족성이 입증됨 :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이 사실을 나타내기에 얼마나 적합하신 분이신가 살펴 보라.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성자만큼 누가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잘 알 수 있겠는가? 아니면 어느 누가 그 아들만큼 그 아버지를 잘 보여 주는 사람이 있겠는가?(마 11:27). 그는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다. 첫째,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그를 아끼는 특별한 사랑의 품 안에, 그리스도를 즐거워했던 그 분 안에 계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리시기에 가장 적합하신 분이시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가 이렇게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일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께서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속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 즉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하게 충분히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 성경을 읽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방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이것이 바로 진리니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Ⅳ. 세례 요한의 증거 1:19-28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증거에 접하게 되는데 이 증거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하고 시험해 볼 목적으로 파견된 사람들에게 요한이 답한 내용이다.
1. 파견한 자들과 파송된 자들(19)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 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서 유명한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자들이다. 이들은 유대교의 최고 재판관들로서 종교에 관계된 모든 문제를 심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혹자는 그 사람들이 메시야의 올 때가 다가왔음을 아는 만큼 때에 대하여 대단히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메시야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을 알았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 사람들은 요한을 반대 심문할 사자들을 보냈다. 세속적인 지식과 명예, 그리고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빛을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도 남겨 두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파송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다. 세례 요한 역시 아론의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으므로 제사장이 아닌 자들에게 조사받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둘째, 바리새파에 속한 자들로서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2. 파송된 목적(19, 25)
파송된 사자들의 임무는 요한과 그의 세례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청해 오지 않았다. 주변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여 요한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첫째, 그들의 질문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회개의 가르침이란 그들에게 낯선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둘째 목적은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세 번째 목적은 세례 요한을 억눌러 침묵시킬 속셈이었다.
3. 자신과 세례에 관한 요한의 답변(20-28)
(1) 자신에 관한 증거(20-23절) : 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네가 누구냐”고 묻고 있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의 정신이나 그의 언변, 그의 가르침은 설복과 존경을 불러 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결코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큰 인물로 그러내 보이려고 애쓰기 보다는 선한 일에 더욱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심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요한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 그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은 부당한 경멸 이상으로 부당한 존경에 대해서도 자기를 단속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은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 여기 이 말은 얼마나 명확하게 요한에 관해 말해 주고있는가. 그는 고백했다.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고백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러한 거절을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단호함과 지조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아니다. 올 때가 다 된 다른 이가 있으니 그가 그 사람이요 나는 아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는 태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을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일축시켜 버렸다(21절). 유대인들은 엘리야라는 인물이 다시 하늘에서 내려 올 것이라 기대했었다. 요한의 성품이나 가르침, 그의 세례에 대하여 들어 보고 그가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처럼 출현했다는 점을 살펴 보았다면 그 사람들이 요한을 엘리야라고 간주하려 했던 사실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명예 역시 거절했다. 그는 실로 엘리야라는 그 이름 하에 예언된 사람이었다(말 4:5). 그리고 그는 분명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으며(눅 1:17), ‘오리라한 그 엘리야’였으나(마 11:14) 승천했던 그 엘리야는 아니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엘리야였지 사람들이 어리석게 꿈꾸어 왔던 그 엘리야는 아니었다. 이렇듯 언약되었던 그 엘리야가 왔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마 17:12).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결코 언약하신 일이 없는 그런 엘리야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또 세례 요한은 ‘그 선지자’에 대해서도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로 그는 모세가 말한 바 ‘주께서 그들 형제들 가운데서 그를 위에 세우시리라’고 말한 그 선지자가 아니었다. 둘째로 그는 그 사람들이 기대하고 소망해 왔던 것처럼 대중의 문제를 떠맡고 로마 제국의 굴레에서 그들 백성을 구해 낼 그런 선지자는 아니었다. 셋째로 그는 죽은 옛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이 죽음에서 부활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은 그들을 파견한 자들의 권위를 앞세워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22절). 세례 요한은 신실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었으므로 그가 자기들의 명백한 질문에 정확히 답변해 주리라고 그 사람들은 기대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성경이 자기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성경 말씀에서 자기의 답변을 찾았다. 그이 대답은 매우 겸손하며 예의 바르며 자기를 부인하는 말이었다. 그가 지극히 작은 자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성경 구절을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나는 그 소리(목소리), 단지 소리일 따름이다.” 그는 자신을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자로 설명한다. 즉 그는 소리(사 40:3),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 교훈을 주는 명료한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사역자들은 단지 소리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사용하시어 자신의 마음과 심정을 전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여기서 주의할 것 몇가지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그는 사람의 소리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천둥 소리에 의해 율법을 받을 준비를 했으나 이제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목소리, 아주 적은 소리에 의해 복음을 받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2) 그는 외치는 자, 부르짖는 자의 소리였다. ①이 말은 곧 요한의 열심과 끈기를 표시한다. 그는 아낌 없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렇게 진정으로 열심을 다해 설교해야 한다. 말하는 사람이 입 속에서 우물거리는 소리로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②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말은 그가 선포한 가르침이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가게 되었음을 표시한다.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3) 이 소리가 외쳐지고 있는 장소가 광야라는 사실이다. 광야라는 말은 침묵이 깔려 있는 호젓한 장소로서 세상의 소음과 각종 사업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장소를 나타낸다. (4) 그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외침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도에 관하여 백성들이 그릇 알고 있는 내용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왔다. 주의 도는 확실히 바르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릇 해석하여 그 백성들의 길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지금 백성들에게 본래의 법으로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다.
(2) 자신의 세례에 관한 요한 자신의 증거(25-28절)
1) 세례에 관한 조사단의 심문 :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그 사람들은 세례가 오염된 이전 상태에서 사람들을 씻어내는 의미를 가진 성결 의식이나 결례로 적절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고 있었다. 죄를 씻는 표시로 행하는 이러한 물 뿌리는 의식은 기독 교회안에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결코 진기한 것을 즐겨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그의 사역자들 역시 그래야 한다. 그 사람들은 메시야의 시대에 그 세례가 사용되리라 예견했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며'(슥 13:1), ‘맑은 물이 뿌려지리라'(겔 36:25)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엘리야 그리고 그 선지자가 더럽혀진 세상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올 때 세례를 베풀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신성한 은혜는 바야흐로 이 세상을 그 오염에서 새롭게 씻길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조사단은 요한이 무슨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지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자신이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는 요한의 대답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는 다음 질문에 귀결된다.
2) 그에 대한 요한의 설명(26,27절) : 요한은 자신이 단지 외적인 징표만 베푸는 사역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이다. 나는 그 징표가 의미하는 신령한 은혜는 줄 수 없다.”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자기보다 더 크며 자기가 해 줄 수 없는 일을 그들을 위해 하시게 될 한 사람을 가리켰다. 요한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해 왔던 말과 똑같은 말로 이 조사단에게 설명했다 :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 사람을 기리킴이라'(15절)
요한은 지금 이 시대에 그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현재에 대하여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26절). 그리스도께서는 평범한 백성들 가운데 서 계셨으며 평범한 사람으로 서 계셨다. 참된 가치는 대부분 이 세상에 숨어 있는 법이다. 흔히 실제로 좋은 것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 하나님 나라는 널리 퍼졌으며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다(눅 17:21). 세례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자기를 훨씬 뛰어 넘어 자기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그리스도는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요한같이 위대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영예조차 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우리같은 사람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일 것인가! 여러분 중 혹자는 당시에 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누구며 어디 있느냐고 당연히 물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요한에게 온 이유는 요한을 괴롭히고 방해하기 위함이었지 요한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으나, 알고자 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장소에 대하여 쓰고 있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28절). 베다니란 나그네의 집이라는 말뜻을 지니며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복음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이 활짝 열려져 있었던 것이다. 세례를 받으러 왔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그 장소에서 이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