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장 성경 말씀] 에스겔 네 생물 환상(겔1:1-28)

에스겔 1장 성경 말씀은 에스겔이 네 생물 환상을 본 성경 말씀이다. 네 생물은 각각 사자의 얼굴과 송아지의 얼굴과 사람의 얼굴과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네 생물은 신약 성경에서는 복음을 상징한다.

Ⅰ. 제사장 에스겔에게 환상이 임함 1:1-3

에스겔이 보았고 또 그 가운데서 사명을 위임받았던 환상에 대한 상황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 기록이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는가를 기록해두는 것은 대단히 쓸모있는 일이다.

(1)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시기는 ‘제 삼십년’이었다(1절). 어떤 사람들은 이 삼십년이라는 말이 에스겔의 나이 삼십 세 되는 해라고 생각한다. 즉 에스겔이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제사장직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삼십년이 느부갓네살의 부와 나보폴라살의 재위 삼십년 째 되는 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대아 역본에는 다른 시대로 봐서 ‘요시아 왕 시절에 한밤중 달이 뜬 후에 제사장 힐기야가 성소에서 율법서를 발견한 해로부터 삼십년 째 되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때는 6월에 해당하는 사월, 오일이었다(2절). 이 날은 아마도 안식일이었던 것 같다. 이는 3장 16절에 칠일의 마지막날(한글 개역은 ‘칠일 후’-역주) 즉 다음 안식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셨을 때 그는 음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여호야긴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학개 1장 성전재건 촉구 설교말씀

1) 당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갈대아인들의 땅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다. 유대국가의 몸체는 여전히 유대 땅에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들 초기에 포로가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매우 우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교훈의 말과 시정의 매는 서로 서로 보완해 가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교훈의 말은 매의 까닭을 설명해주며, 매는 훈계를 보강하여 주는 것이고 이 둘은 공히 지혜를 가져다 준다. 그들이 포로 있는 동안에는 그들 심령을 위한 일반 은총이 결핍될 수 밖에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 은총을 그들에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막히게 되면 다른 방법으로 교육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조국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예레미야가 있었으며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는 에스겔이 함께 하게 도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흩어져 있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는 마땅한 선생님을 세워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선지자는 그발강 가의 포로들 가운데 있었다. 성경 학자들도 이 그발강이 어떤 강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장 선량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공적 심판, 혹은 국가적인 심판을 함께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죄악을 전혀 짓지 않은 사람들도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이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자기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같이 슬픔을 나누는 사람의 훈계는 잘 받아들일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갇힌 자가 되었을 때도 복음은 자유로이 갈 길을 갔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폐되어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곳까지 그를 방문하셨었다.

(3)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1절). 하나님을 직접 보고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상, 곧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시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에스겔의 임무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이상을 보아야만 했다. 그러한 일을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 감동된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가 그 이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늘이 열렸다’. 즉 그가 그 이상을 가리고 있던 흑암의 격의(distance)가 물리쳐진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3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분명하게 임하였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앞으로 들을 내용을 위하여 그를 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의 말씀’, 곧 본질적인 말씀이요(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 자체가 말씀이신 그 분이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시기 위하여 임하셨다.

3) 환상을 보도록 두 눈을 여시고 말씀을 듣도록 두 귀를 여시며 그 모두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그는 느꼈다.

Ⅱ. 네 생물의 환상 1:4-14

이 환상의 모습과 의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지자가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보다 높고 존귀한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가 보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28절)이었다. 이와 같이 크신 하나님은 경건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둘째, 시온에 남아 있거나 이미 바벨론에 잡혀 왔으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죄인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 환상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은 43장 3절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권능의 손 아래 자기를 낮추는 자들에게 위로를 말씀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비록 바벨론에 잡혀와 포로의 신세가 되어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들과 가까이 계심을 알릴지니라. 즉 성소가 저들에게 없지만 성소의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심을 알릴지니라. 교회가 오랫 동안 이방 땅에 세워져 있는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한가운데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환상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일군인 수많은 천사들이 명령을 이행하고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면서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시중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1) 천사들에 대한 이 환상이 도입은 장엄하며 눈이 번쩍 뜨이게 한다(4절). 선지자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바라다 보았다. 그가 보니 앞에 가리우고 있는 안개를 내몰 듯 길을 훤히 내기 위하여 ‘북방에서부터 폭풍이’ 몰려 왔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사용하시사 하늘과 공기를 깨끗케 하시며 우리가 하늘과 교제를 나누기에 필수적인 마음의 청아함을 주실 수 있다. 이 폭풍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에스겔에게 다가왔다(엘리야에게도 이 일이 일어났었다, 왕상 19:11).

(2) 환상의 내용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계시는 궁창, 즉 하나님께서 타고 다니시는 병거는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시 18:11;104:3)이다. 구름에는 불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구름 사이에 거하고 계셨던 시내산 정상에도 불이 나타났었다. 그 여호와의 영광은 ‘맹렬한 불’과 같았다(출 24:16,17).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도 불타는 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그 불은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4절).

우리가 비록 그 불 속을 들여다 보지도 못하며 완전하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없으나 그 불 주위에 밝은 빛은 볼 수 있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은 뵙지 못하였었다. 하나님을 느끼기는 매우 쉽지만 그 분이 어떠하시다라고 묘사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 가운데에서 나온 생물들은 스랍(태우는 자)들로서 실제로 생물이 아니고(천사는 영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인도하시기에 적절한 형상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그 불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 환상에 대하여는 선지자가 직접 해설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참조. 겔 10:20).

그들은 생물, 곧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들이었다. 태양은 불덩어리로 둘러 싸인 화염이지만 생물은 아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하늘의 사방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참조. 마 24:31). 스가랴는 동서 남북을 향해 나아가는 네 대의 병거를 보았다(슥 6:1).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방에 보낼 심부름꾼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이들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었고 여호와의 등불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 이는 때라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그 형상으로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속성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네 생물 모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5절).

마가복음 3장 예수님의 12제자 설교말씀

그러나 그 외에도 사자, 소, 독수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종류별로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사나운 짐승에서는 사자를, 유순한 짐승 가운데에서는 소를, 날짐승 가운데에서는 독수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10절). 지상의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완전함이 하늘의 천사에게서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천사들은 사람의 명철을 갖고 있으나 실상은 훨씬 능가한다. 천사들은 또한 부드러움과 인간성에 있어서 사람과 비슷하다. 사자는 그 힘과 용감함에 있어서 사람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사자와 비슷한 천사들은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근면과 끈기에 있어서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는 천사들은 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독수리는 날렵함과 꿰뚫는 듯한 눈길, 치솟는 그 높이에 있어서 사람들을 능가한다. 따라서 위에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멀리까지 보는 천사들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6절). 신앙과 소망은 영혼의 날개로서 영혼은 그 날개로 치솟아 오른다. 또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랑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날개이다. 그들의 날개는 완전한 연합과 일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연결되어 있었다(9-11절). 그들의 날개 중 두 개는 그들의 몸 즉 그들이 입고 있던 영의 몸을 덮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의 다리는 곧았다(7절).

즉 그들은 바르고 확실하며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발은 날아 다녔다(70인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그들은 너무나 신속하여 마치 날아 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움직이기 위한 손도 가지고 있었다(8절).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 손은 봉사를 하기에 적합하도록 놀랍도록 잘 만들어졌고 이성과 명철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송아지의 발은 그들의 동작이 신속함을 의미한다. 그 생물들은 활동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봉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였다(9,10절). 만약 우리의 눈이 이와 같이 단 하나라면 우리의 몸 전체는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눈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마음의 진실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의 이를 향해 앞으로 곧게 나아갈 뿐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9,12절). 그것들의 마음은 분산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들은 돌이키지도 아니하였으며, 옆으로 비키지도 아니하였다.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12절). 하나님의 신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그것들은 나아갔다. 선지자는 그 생물들을 그것들 자체의 빛으로 말미암아 보게 되었다(13절). 그것들은 마치 불타는 ‘숯불’같은 모양이었다.

선지자는 ‘그 생물들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매우 발은 불을 보았는데, 그 빛으로 해서 생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명의 천사들은 언제나 빛 가운데 있으나 우리는 그들과 그들이 행하는 일들을 등불에 의해서 즉 그들 사이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등불의 희미한 빛에 의해서 볼 수 있을 뿐이다. 날이 밝고 어둠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그때 우리는 그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Ⅲ. 하나님의 병거 1:15-28

1. 바퀴의 환상(15-21)

하나님의 영광은 윗 세상의 광채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통치하고 계시는 여기 이 아랫 세상에서도 나타난다. 선지자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 환상이 그의 눈 앞에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시행되는 방식들이 여기에서는 바퀴들, 즉 병거의 바퀴에 비유되고 있다. 바퀴는 그 생물들같이 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바퀴들이 그 생물들 곁에 있다고 기룩되어 있다. 생물들과 바퀴 사이에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멈춘다.

생물들이 움직이면 바퀴가 그 곁에서 함께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일을 하실때에는 제2의 원인들 즉 부수적인 것들이 모두 그 일을 돕게끔 하신다. 만일 그 생물들이 땅에서 위로 올라가면 즉 자연의 추세를 뛰어 넘어 어떤 일을 하려 한다면, 바퀴도 그 생물들과 함께 움직여 그 뒤를 따라 올라간다(19-21절). 그 까닭은 그 ‘생물의 신’이 바퀴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천사들을 이끌고 통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권능, 성결이 아랫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의 모든 움직임도 똑같이 규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영혼으로서 윗 세상과 아랫 세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사, 마치 육체의 상체와 하체가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듯,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운행하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어디든지 신이 가려 하면'(즉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원하시고 뜻하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생물의 신’도 그 곳에 가도록 하신다. 바퀴는 각기 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다(15절).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동서 남북 어느 쪽에서도 행사되며, 가장 멀리 있는 구석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에스겔은 그것을 하나의 바퀴 곧 하나의 구체로 보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네 개이면서도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16절). 이것은 다양한 사건이 한 가지의 뜻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준다. 바퀴들의 형상과 구조는 ‘황옥’같았다. (어느 역본에는 ‘다시스의 색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바다색을 의미한다).

이 세상 만물의 본성은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유동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계속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고 밀려 나가듯, 섭리도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우리의 안목은 좁아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 수가 없다(전 3:11).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심히 세미한 소리’밖에 들을 수 없으므로(욥 26:14) 그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단지 푸르게만 보일 뿐이다. 그 행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이것은 감히 수치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방법은 언뜻 보기에 복잡하고 난해하며 헤아릴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결과를 보면 모두 지혜롭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바퀴들의 동작은 변동이 없고 지속적이다. 행할 때에는…돌이키지 않고 행하며(17절). 이는 그 바퀴들이 결코 일을 그르치는 적이 없을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면전에서 일을 처리하시며 계속 진행시키신다. 심지어 우리가 보기에는 뒤로 후퇴하는 것같이 보일 때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바퀴들은 신이 지시하시는 대로 행하기 때문에 돌이키는 법이 없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의 지시를 따른다면 뒤로 돌이키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어긋난 길로 갔을 때라도 회개함으로 다시 바른 길로 향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신(‘생물의 신’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이 바퀴 가운데 있어서 바퀴들을 용이하고 평탄하게 움직였다. 바퀴 주변에는 ‘눈’이 가득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는 무한한 지혜로 일일이 지시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만물의 결국은 눈먼 운수, 즉 행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며 모든 장소에 거하시면서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여호와의 눈동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2.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22-25)

선지자는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궁창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늘 아래서, 즉 하늘의 감시와 영향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정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그는 그 궁창의 광대함과 밝음으로 인해 크게 놀라 심히 큰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며 찬사들은 궁창 아래에 있다. 이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또한 천사들의 날개짓 소리를 들었다(24절). 이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궁창에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소리였다(25절). 선지자는 궁창에서 나오는 소리, 즉 보좌 위에 좌정하신 이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다(25절). 무감각한 세상을 일깨워 놓은 뒤에 천사들은 깊은 고요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보다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날개를 드리웠다.’ 하나님께서 미리 섭리하시는 이유는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Ⅳ.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1:26-28

에스겔이 본 환상의 다른 부분들은 이 부분에 대한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부분들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천사들의 주시오, 이 아랫 세상의 제반사에 대한 최고의 주재자로 나타내셨었다. 지금 선지자에게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생물들이나 바퀴들보다 더 위의 것들을 바라야 하고 영원한 말씀이신 분으로부터 계시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에스겔은 궁창에서 음성이 들려오자, 사도 요한이 그랬듯이 자기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쳐다보고 저기에서 ‘인자같은 이’를 보았다(계 1:12,13).

선지자가 본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던 궁창의 위에 있었다(26절). 구세주가 성육신하기 이전에 가지셨던 이 엄위과 권세는 성육신하시고 난 후의 그의 겸손을 훨씬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가 처음에 본 것은 ‘보좌’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왕의 권위를 지니고 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 사도 요한이 그의 환상 가운데에서 처음 본 것도 하늘에 있는 보좌였다(계 4:2). 그 보좌는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개선의 보좌, 통치의 보좌 그리고 심판의 보좌이다. 선지자는 그 보좌 위에서 사람같은 형상을 보았다. 궁창 위에 있는 보좌에 곧 그렇게 지고한 상태에서조차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가 앉아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 42대 설교말씀

선지자는 인간의 영광을 능가하는 왕이시며 심판자되신 이께서 보좌에 계신 것을 보았다(27절).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옷을 걸치듯 빛으로 옷을 입으신다. 허리 이상의 모양을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불이 속에 감싸여져 있었다. 허리 아래에 있는 불은 밖으로 비쳐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단쇠(흠정역에는 호박이라고 나와 있다)모양 안에 감추어져 있는 전자의 불이, 아무도 본 적이 없으며 볼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영광이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다름 아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인 것이다.

보좌는 무지개로 둘러 싸여 있다(28절). 이는 사도 요한의 환상에서도 그러하였다(계 4:3). 무지개는 위엄의 현시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보증이다. 무지개는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한 확증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모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레 26:42). 이 환상의 결론이 나온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처음부터 그랬듯이 선지자는 신중하게 하나님께 온갖 인간적인 상상을 배격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것이 바로 여호와이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이라.

여호와께서는 그 영광 안에서 자신이 영광스런 존재임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며, 그 영광을 미미하게 반사하고 있는 ‘영광의 형상’이라. 아니 ‘그 영광의 형상’도 부적절하며, ‘그 형상의 모양’ 즉 ‘참 형상’이 아니요 그 형상의 ‘그림자’라”(히 10:1).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선지자는 그 영광의 형상의 모양에 압도되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거룩한 경외감으로 가득찼다는 표시로 땅에 엎드렸다. 그가 본 이 모든 것은 앞으로 들어야 할 내용을 위해 그를 준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