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소식을 들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열심히 성령 받기를 기도했더니 두 사도가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했다.
하나님의 선물(사도행전 8:14-2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 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많은 토론과 많은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본문입니다. 물론 해석하기 어렵다고 해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해석이 분분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어떤 사람은 저렇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어느 한쪽 만을 옳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는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아주 귀한 교리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그 자체입니다. 그 성경을 우리가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다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 해석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다 옳게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다양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 가운데 요즘 보면 말씀에 해석이 붙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어느 출판회사의 성경책이 더 좋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그 역시 하나의 해석에 불과 한데 그것을 완전한 것인 양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언제 나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해석했지만, 내일은 다른 차원에서 좀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이해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좀 더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에 대하여 여러분의 노트에 따로 해석을 달아놓는 것은 좋지만 성경책 자체에 해석을 달아 인쇄를 했다면 성경책은 그로써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때문에 성경은 성경 그대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는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딸린 그 해석을 읽을 때에 ‘이것은 해석일 뿐이다. 상대적인 것이다’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성경에 같이 인쇄되어 나오고 보니 혹시라도 이것을 성경말씀처럼 생각하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경책은 적극적으로 추천할 마음이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해석자는 성령입니다.
성경에 두 가지의 해석자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성경의 가 장 권위 있는 해석자는 성경 자체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권위 있는 해석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 경험이 깊어지면서, 인생 경험이 깊어지면서, 좀 더 경륜이 쌓이면서 이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당장에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해석은 옳고, 저 해석은 그르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해가 잘 안될 때에는 그대로 두십시오. 뒤에 이해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유를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마치 생선을 먹는 것과 같이 읽는 것이 좋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선을 구울 때에 보십시오. 조급한 주부들은 자꾸 앞뒤로 뒤집어서 원형을 흐트러뜨립니다. 이리저리 들쑤셔서 말입니다. 생선을 불에 천천히 구워 가지고 원형을 다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요리 잘하는 사람입니다. 굽든지 지지든지 간에 어디가 머린지 꼬린 지를 구분할 수 없게 하는 사람은 영 재주 없는 사람입니다.
음식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음식 잘하는 사람은 원형 그대로, 색깔까지도 그대로인 채 잘 구워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천천히 불에 구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확 키워 놓은 가스 불에 놓고 자꾸 뒤집었다 엎었다 하니 모양은 모양대로 엉망이요, 색깔은 색깔대로 타서 거무죽죽합니다.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선을 먹을 때에 대가리부터 아작아작 씹어먹지는 않습니다. 부득불 먹을 수 있는 곳부터 먹습니다. 젓가락으로 살살 걷어 가지고 먹을 수 있는 부분만 먹고 가시는 앙상하게 남기는 것입니다. 가시까지 다 먹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가시를 먹어야 한다면 이것은 별도로 몇 번 더 씹어서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좀 더 지혜로우려면 그 가시를 한 번 더 바짝 구워 갈아서 국에 넣어 먹어야지요. 그렇게 하면 완전한 칼슘 식품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구운 생선을 먹을 때에는 가시는 살을 먹듯이 그렇게 먹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도 가시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꿀꺽 삼키려고 하면 목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되는 부분은 쉽게 이해되는 대로 이해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기다릴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 더 높은 시간에, 더 높은 신앙 체험이 있는 다음에, 좀 더 신령해진 다음에 이해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경말씀을 두고 틀렸다느니 어떻다느니 하고 비판하려는 것을 잘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의 난구절을 만날 때마다 온유, 겸손, 인내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좀 더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아 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구원받고, 내가 은혜 받기에는 충분합니다. 이것을 알고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충분합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스데반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사도들 외에는 다 이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때에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기왕에 집을 떠나서 위험한 길을 무릅썼으리만큼 그는 사마리아로 가서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의 전도역사를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 있습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권능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당시 인기가 있던 마술사 시몬도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세례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저들이 아직 성령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도 믿고 세례도 받았는데 아직 성령은 못 받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도 못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16절).”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을 내리신 일이 없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 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즈음에 사마리아사람들도 예수 믿게 되었다 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 로 옵니다.
유대의 규례를 어기고 사마리아로 온 베드로와 요한이 그 들에게 안수합니다.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7절).” 두 사도의 안수를 받고 나서 비로소 저들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본문17절 말씀은 난구절입니다.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보십시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만으로는 안 된다, 안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수 (按手)’라고 하는 말에는 한마디로 견진적(堅振的) 의미가 있습니다.
Confirmation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형식적인 문제입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분명히 예수를 믿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 믿고 물로 세례 받은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불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이 와서 열심히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지만 저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한번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빌립은 누구고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만일 베드로를 성직자라 하고, 빌립을 집사라 한다면 이것은 집사의 전도로는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평신도가 전도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가서 안수해야만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이 평신도 전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냥 읽을 때에 는 괜찮게 들렸는데 생각하니까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이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지금은 들으면서 맞다 하겠지만 집에 돌아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하고 다시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적 경륜과 신학적 이해의 수준에 따라서 확실하게 이해될 수도 있고, 그저 한 절반 정도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해결이 다 안된 채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좀 더 기다릴 것입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복잡해진 이유는 빌립을 통해 예수 믿은 사마리아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전도만 받았으면 좋았을 것을 세례까지 받았거든요. 그리고 일심으로 쫓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의 문제가 나옵니다. 성령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를 놓고 구교인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례와 견진례를 별도로 봅니다.
세례의식이 있고, 칠성사 가운데 견진례라는 것이 별도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를 믿어서 세례를 받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에 얼마 동안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한 다음에 이제 좀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해서 confirmation이라고 하는 견진례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례나 견진례나 미사를 드리는 일인 것은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안수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소’하는 수준에서 세례 받는 것과 비슷한 예식인 견진례가 있지만 세례와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단계 의 견진례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세례와 견진례 를 구별해서 예배의 의식화하는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보라, 세례 주고 다음에 안수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수준에 도달해야 구원받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들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신교의 입장은 다릅니다. 이것은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화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례와 견진례의 문제는 별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순서 역시 세례하고 견진례하고, 견진례하고 세례하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두 의식이 성경에 나타나 있을 뿐이지 이것이 정격적인 교회의식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큰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메섹으로 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습니다.
안수를 받음으로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뜨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 세례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안수가 먼저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례가 먼저고 안수가 나중이었는데, 바울의 경우는 안수가 먼저고 세례가 뒤에 있습니다.
이외에도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안수냐 세례냐, 세례냐 안수냐, 어느 쪽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신교의 일반적인 이해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부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사건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두 가지 key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 즉 세례 받는다 하는 말이 의미요, 둘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행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예수믿는다는 말이 아닌 사도행전적 맥락에서 보는 바 예수 믿는다는 말과 특별히 성령 받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사도행전적 개념, 초대교회적 개념을 먼저 이해하면 이 문제는 풀립니다. 참으로 어렵지요. 그러나 자꾸 생각해보십시오. 이해할 날이 올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 강해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거듭 강조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권능을 보고 깜짝 놀라고, 일심으로 좇았다고 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믿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부분에 연결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4 절로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6절)” 보고, 듣고, 좇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이적을 보고는 깜짝 놀란 많은 사람들이 빌립을 좇았다고 합니다. 이적을 보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기 서 우리는 사마리아사람들이 빌립의 이적에 매료되어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몬을 보십시오. 시몬은 마술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술은 가짜입니다.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술이 가짜라 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속 아서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시몬을 따라다니지만 자기는 알거든요.
가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몬이 빌립을 보니 이것은 진짜거든요. 자기가 하는 마술은 굉장한 것 같지만 가짜인데 빌립의 이 적은 진짜란 말입니다. 그러니 시몬이 빌립을 따를 수밖에요.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13절)”하는 본문 말씀대로 시몬은 빌립의 이적을 보고는 야, 굉장하구나, 하고 깜짝 놀라 빌립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시몬이 빌립을 따르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왜 따르는 것입니까? 빌립의 표적은 어디까지나 진짜 마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가짜 마술인데 빌립이 하는 것은 진짜 마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빌립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아이쿠, 정말 대선배가 오셨구나! 나 같은 것은 어림도 없구나!’하고는 결국 빌립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후 배 마술사 된 입장에서 선배 마술사를 따른 것이지요.
빌립에 비하면 자기는 약과요 아무 것도 아니다, 해서 진짜 이적을 행하는 빌립 앞에 굴복하고 그를 열심히 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봅시다. 시몬이 빌립을 왜 따랐을 것 같습니까? 배우려 고 따른 것이지요. 자기의 하는 것은 시원찮은 마술인데 저쪽은 진짜 마술이거든요. 저것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으니 열심히 따를 밖에요.
이제 이 열심은 누구도 당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배워볼 생각으로 열심히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시몬은 꼭 알아낼 생각이었습니다. 빌립을 열심히 쫓아서 이적을 행하는 그 방법을 알아낼 요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직접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따랐습니다. 굉장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받으라면 당장에 받지요.
당장 마술을 배워야 할 판인데, 저 이적을 힘입어야 하는데, 지금 저 굉장한 이적을 보았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당장에 세례를 받지요. 그뿐입니까? 뭐든지 하지요.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금식하라면 금식하고, 철야하라면 철야하고, 세례 받으라면 세례 받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두 말씀을 해석해 낼 수 있는 요령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따를 때에 열심히 따랐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는 말씀대로 시몬을 따라다닐 때에도 하나 님의 사람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가짜를 보고 말이지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렇게 어수룩합니다. 마술사 시몬을 쫓아갈 때에도 하나님 의 능력인 줄 알고,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따랐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시몬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몬을 열심히 따르고 높이고 찬양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는 빌립을 따르게 됩니다. 시몬이 자기의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빌립을 따르자 시몬을 따르던 그 사람들 역시 빌립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마술사 따르던 그 마음으로 빌립을 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사람들이 외양상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세례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습 세례 같은 것을 거친 뒤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 세례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니까 빌립이 세례를 준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보니 이 사람들 의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좀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시몬에 대하여 놀라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 제는 빌립의 능력에 놀라서 그를 따릅니다. 한마디로 해서 그들의 신앙은 표적적 신앙입니다. 마술에 매혹 된 신앙입니다. 이적 자체에 놀라서 따라다니는, 그런 의미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구조를 지닌 신앙인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면 와하고 놀라서 따라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들의 믿음을 고작 이런 정도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얼핏보기에는 이것이 굉장한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인 것 같고, 뜨거운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시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시몬적 믿음’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표시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의미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는 참 믿음이 있어서 세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선 세례부터 받고 은혜는 뒤에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일 년에 한 천 명 정도 세례를 줍니다. 세례를 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보면 세례 받는 그 순간에 큰 은혜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하고 머리에 성수를 부을 때 얼굴에 흘러내리는 성수와 함께 눈물도 흐릅니다. 흐느껴 웁니다.
이렇듯 큰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에 영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세례를 받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한번 받아보자 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교인 명부에도 오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듯 세례 받을 때에 뭐가 뭔지 모르고 정신없이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굳이 세례를 한 번 더 받겠다고 합니다. 옛날에 세례를 받긴 받았지만 정신없이 받아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 다시 받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재세례파입니다.
아무튼지 간에 이런 마음을 가질 만큼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일단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식이라는 것이 조용합니다. 화끈하지가 못합니다. 마치 결혼식과 같습니다. 정말 너 없으면 죽는다 할 정도의 화끈한 심사로 결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가 뭔지 잘 모르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우선 결혼식 해 놓고 사는 것입니다. 살다가 사랑하는 것이지요. 유행가 가사처럼 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고 보니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것이 정말로 사랑한 것입니까? 그럭저럭 산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같이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점점 사랑이 깊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십 년 살다 보니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좀 늦게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례식이라는 것이 결혼식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믿음의 간증은 없습니다. 그런 체험은 아직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복음서적으로 성령 받는다는 말과 사도행전적으로 성령 받는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틀립니다. 성경론적으로 볼 때에 엄격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의 고백도 바로 성령 받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신앙 고백 했으니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세례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안 받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역사에는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방언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적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못 알아듣는 방언은 고린도서적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알아듣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통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5개국이 넘는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멀뚱멀뚱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하다 보니 방언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실대로 하자면 베드로가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방언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가 알아듣는 것입니다. 통역 없이 전부가 알아들어요. 바로 그런 순간을 방언이라고, 성령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는 지는 묻지 맙시다.
우리가 듣는 말씀이 있어요. 그런데 좀처럼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 말씀이 믿어지고 납득하게 됩니다. 그 말씀에 내 생명을 위탁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엄청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그 때가 방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전적으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와서 부딪쳐요. 그래서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바의 성령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과 함께 빌립의 표적을 보고 놀라서 건성으로 그를 따라다니고 빌립 앞에 나와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비로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말 씀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성령 받았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의미에서 성령 받았다는 말을 이해하면 오늘의 본문은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유아세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에 무엇을 알고 받았습니까? 모르고 받았어요. 그 다음에 우리가 치르는 입교문답이 있습니다. 입교문답 할 때에 다시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견진례와 같습니다. 우리 신교의 견진례인 셈입니다. 자기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제부터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만 받은 사람은 아직 세례교인이 아닙니다. 입교문답을 하면서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세례를 받고, 성경을 배우고,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했다 하더라도 성령 못 받은 사람 많습니다. 중생 못한 사람 많아요. 오늘의 본문 역시 이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중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부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했다는 말씀은 다른 데에 뜻이 있지 않습니다. 교회 일치의 의미를,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수에는 병 고칠 때에 믿음을 돕기 위하여 하는 안수와 임직할 때에 하는 안수가 있습니다. 목사안수 같은 임직적인 의식의 안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바로 견진적인 의미의 안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시몬입니다. 두 사도가 저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께서 임하시는 굉장한 장면을 보고 시몬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돈 한 무더기 가져다 놓고 그 능력 나 좀 삽시다, 하고 나옵니다. 손만 딱 들어 올리면 방언 하는 것을 보고 아, 그 능력 좀 삽시다, 돈은 얼마든지 내겠소,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를 두고 베드로와 요한이 크게 책망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절).” 무서운 말씀으로 책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몬은 그 은사를 돈으로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요즘도 보십시오. 돈 외에 다른 방법으로 사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제로 사겠다는 사람도 있고, 금식으로 사겠다는 사람도 있고, 철야기도로 사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행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위적인 노력입니다. 굳이 시몬이 내놓은 돈만이 인위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인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사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여기에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의 은사를 사기 위한 이러한 인위적 노력으로 말미암아 함께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렇게 됩니다. 때문에 인본주의적인, 인간적인 노력은 하나님의 은사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든지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21절)”라고 본문을 말씀합니다. 경건을 수단으로 하고, 은사를 방편으로, 생활도구로 삼으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합니다. 오늘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순리 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은사를 도둑질하려고 한다던가, 은사를 강탈하려고 한다던가, 인간적으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약탈하려고 하는 행위는 예나 오늘이나 옳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겉으로는 예수 믿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신앙이었어요. 중생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의식과 순종과 세례와 봉사가 다 좋습니다. 반드시 이 위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함께 해야 참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깊이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