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서 사탄의 시험을 세 번 받게 된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로 들어간 것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미혹을 이기지 못했다. 후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때에(Τοτε 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 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귀(διαβολος 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שטן 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 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쟁이 (요 8:44)요, 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
시험을 받으러(πειρασθηναι 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πειραζω ‘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5)일 뿐 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시험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사십 일을 밤낮으로 –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예수께서는 40일 밤낮 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 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 시키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Godet).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시험하는 자(Ο πειραζων 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 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 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 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 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나아와서(προσελθων 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Ει)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 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은 예수의 메시야 성을 의심했다가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 문제(허기)를 해결하는데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양을 하던 그것은 손으로 집어들을 수 있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αρτοι 아르토이)은 유대인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loaves)을 가리키는 것 같다(Thayer).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기록되었으되(Γεγραπται 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 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 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ερχομηνος 에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Ό ανθρωπος 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Ουκ μονω 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생활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ρημα θεου 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마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데려가다(παραλαμβανει 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 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를 뜻하는 ‘프테뤼기온'(πτερυγιον)이 ‘작은 날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 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세우고(εστησιν 에스테신)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마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 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낚아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케 한다.
이 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마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Παλιν 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 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 사건에 근거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지극히 높은 산 – 누가복음에는 이 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 –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Clarke).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만국’을 지도 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초자연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 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고 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마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경배하면(προσκυνησης 프로스퀴네세스) –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네게 주리라 –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만국’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16:11), 공중의 권세 잡은(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 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이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단아 물러가라(Υπαγε Σατανα 휘파게 사타나) – 시리아 사본(Syrian)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소 무'(οπισω μου),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단'(Σατανα)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15;눅 22:3;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야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다(12:25-28;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섬기라 –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προσκυνησεις 프로스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 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 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λατρευσεις 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 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μονω 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마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위 앞에 마귀는 참패한 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서 ‘떠나고'(αφιησιν 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 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 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και ιδου)가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코눈'(διηκονουν)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계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25:44;27:55;왕상 19:6, 7). 따라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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