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설교는 예수님이 간음과 이혼과 맹세와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법을 제시했다. 구약에서는 행동을 하면 간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간음이라고 정의했다. 이혼도 남자들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예수님이 새로운 법을 주셨다.
Ⅳ. 간음에 대하여 5:27-32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 7계명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이것은 전자의 율법을 따르는 부정에 대한 법이다. 전자의 율법이 죄악적인 격정에 대해 내려진 금지 조항이라면 이번 것은 죄악적인 욕망에 대해 내려진 율법이다.
1. 제 7계명 자체(17)
간음하지 말라. 이 법은 그 밖의 모든 부정한 행위와 욕망들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2. 제 7계명에 대한 엄격한 해석(18-32)
그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진다.
(1) 마음의 간음 즉 결코 간음이나 간통의 행위에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부정한 생각과 경향이 있다. 여자를(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려는 것처럼 단지 다른 사람들 아내 뿐만 아니라 아무 여자든지)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리라(28절). 이 계명은 간음과 간통의 행위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모든 욕망들까지도 금지하고 있다. 정욕이란 좌절되거나 치우친 양심이다. 여기서 치우쳤다는 것은 양심이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좌절되었다는 것은 양심이 말하는 바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계명은 간음을 향한 모든 접근을 금한다. 즉 금지된 열매를 봄으로써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눈을 이같은 종류의 수많은 악이 드나드는 통로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눈꺼풀을 가지고 있는가? 부패한 눈길을 금하고 마음을 더럽히는 인상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계명은 또한 정욕을 일으키는 그밖의 감각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부정한 마음을 통한 바라봄이 금지되었다면 이 지옥불의 연료와 풀무같은 부정한 이야기나 음탕한 장난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규례들은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울타리이다(8절). 보는 것이 정욕이 된다면 남에게 보이고 정욕을 일으키기 위하여 옷을 입고 자신을 꾸미고 노출시키는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이 죄를 짓지만 마귀들은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2) 그와 같은 바라봄이나 장난은 영혼에 매우 위험하며 파괴적이다. 계속해서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그처럼 죄를 범한 눈과 손을 잃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지킬 수 있으리요. 혈과 육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볼 때 쾌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대상을 갈망하며 희롱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할 길이 없다. 이같은 허영이 이성에 의해서는 거의 극복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물리쳐져야 한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살펴 보자.
1) 이러한 정욕들을 막기 위하여 여기에 규정된 시행은 끔찍한 것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즉 금지된 대상에 대하여 부정한 눈짓이나 눈길을 줌으로써 너로 하여금 범죄케 만들거든 그리고 그것을 억제할 다른 아무 방도가 없다면(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억제할 방도를 가지고 있다) 죄에 빠져 영혼의 파멸에 이르기 보다는 차라리 ‘눈을 빼어 내버리고’ ‘손을 찍어 내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러한 규정을 복종해야 한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펴서 마음 속에 정욕과 부패한 심정이 생기자마자 그것을 눌러 죄를 범할 기회를 피하고 그 시작부터 죄를 거절하려는 결심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른 손을 찍어 내버리거나 오른 눈을 빼어 버리는 것’ 은 곧 다음과 같은 행위이다.
즉 아무리 즐거운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올무가 될 사람들과의 교제는 거절하고,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시험거리가 되는 것을 발견할 때는 해로운 길을 피하고 조심하여 정당한 방법들 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그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에 의지하며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른 손을 찍어 내버리는거나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며 혈과 육을 크게 거스릴 것이다. 그것은 곧 옛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다.
2) 이러한 규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논증은 놀라운 것이다. 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다(29절).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에게는 지옥과 파멸을 설교하는 것이 부적당한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설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올 진노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무에 불성실한 태도이다. 그것은 제어될 수 없는 육체의 욕심들로서 다만 두려움에 의해 제어될 뿐이다.
사람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여, 천하고 짐승 같은 정욕의 희열을 물리치기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파멸을 무릅쓰려고 한다. 혈과 육에는 가장 불쾌한 그런 의무들이 우리에게는 유익하다. 우리 주님은 다만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실을 알기 바랄 뿐이다.
(3) 간음한 연고 외에 싫어하기 때문이라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제7계명을 범하는 것이며 간음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31, 32절).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첫째, 이제 이 문제는 이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즉 이 말씀은 화가 나서 말로 이혼하겠다고 생각지 말고 엄숙히 그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율법은 경솔하고 성급한 이혼을 방지해 왔다.
둘째, 이 문제는 우리 구주에 의해서 개정되었다. 그리스도는 결혼 의식을 태초의 제도로 환원하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쉽게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혼은 결혼의 결혼의 서약을 깨뜨리는 간음의 연고 외에는 허락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떠한 핑계로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이같이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Ⅶ. 맹세에 대하여 5:33-37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계명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으로써 이 계명을 깨뜨리는 자가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죄없다고 아니하실 것이다.
1. 위증, 거짓 맹세, 맹세와 서약의 위반에 대한 금지(33)
위증은 양심의 빛에 의해 정죄되는 죄로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불경건의 씨앗이며 사람에 대해서는 물의의 씨앗으로 곧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굽어 살피소서’ 라고 말을 하지만, 만일 내가 거짓으로 맹세한다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결코 바랄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민족들이 그들이 어떤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엄숙히 하나님을 부른 뒤에 그 사실에 대하여 거짓을 말한다면 하나님께 그들을 저주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저주하도록 하였다.
2. 경솔하고 불필요한 맹세에 대한 금지(34-37)
이 계명은 거짓 맹세 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불필요한 모든 맹세도 금하고 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모든 맹세가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맹세가 바르게 지켜진다면 죄와 상관이 없이 그것은 종교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 된다. 우리는 맹세 속에서 하나님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맹세함으로써 알려진 어떤 것이 사실임을 보증하고 알려지지 않았거나 의심스러운 것을 확증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더 큰 지식에, 더 높은 법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지 하시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도무지 맹세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식으로 맹세하도록 요구 받았을 때, 그리고 우리의 형제에 대하여 자비나 고의를 베푸는 이에 있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맹세는 다툼의 최종적인 확정(히 6:16)을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에 의해 맹세를 요구 받을 수는 있으나 자진하여 맹세해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경솔하고 불경스럽게 맹세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계신 영광스런 임금께 장난스런 호소를 하는 것은 큰 죄이다. 그것은 변명하거나 덮어 줄 여지가 없는 죄이다. 그러한 맹세는 버릇없는 마음의 소치이다.
(3)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서약의 맹세를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맹세는 실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주 맹세를 하며 또 맹세를 요구하는 행위는, 그들의 평소의 온건한 말이 엄숙한 맹세만큼이나 신성하므로 그들의 성실함이 널리 인정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숙고할 만한 일이다.
(4)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해서(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 이름으로는 맹세를 하지 않고 하늘이나 땅 또는 그 밖의 것들을 들어 맹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걸고 모든 것은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여하 간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을 들어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들어 맹세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은 언제나 변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증거물은 증거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다음에서 살펴 보자.
첫째, 하늘로도 말라. 하늘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늘로 맹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소유자로 맹세하는 것이다.
셋째,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외에는 걸고 맹세할만한 거룩한 어떤 장소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숭앙했던 곳이다. 예루살렘은 큰 왕의 성(시48:2)이며 하나님의 성(시 46:4)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성과 관계를 맺고 계시며, 예루살렘을 들어 하는 모든 맹세에도 관계되신다.
넷째,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 네 머리는 네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으셨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기와 능력들을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네 자신이 타고난 본래의 능력으로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회거나 검게 그 색깔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네 머리의 생명이시며 네 머리를 드시는 자이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된다(시 3:33).
다섯째,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대화 속에서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37).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은 곧 우리 주님의 ‘옳다 옳다’ 였다. 그처럼 만일 우리가 어떤 사실을 부인할 때는 단지 ‘아니다’ 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일 우리의 진실함이 알려진다면 그 말 한마디로도 우리는 충분히 신용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실성이 의심될지라도 맹세와 저주로써 우리가 말한 바를 후원하는 것은 오히려 그 말을 더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맹세를 금하신 그 이유는 이같이 분명하다. 즉 비록 그것이 맹세의 불법 행위나 다름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거짓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장이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불신하기 때문에 맹세 없이는 믿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맹세들을 사용한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맹세란 질병을 전제로 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Ⅷ. 보복에 대하여 5:38-42
본문에서는 보복에 대한 법이 설명된다.
1. 보복에 대한 구약의 허용(38)
구약의 법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와 같은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원한다면 정당하게 그 배상을 주장할 수 있었다.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정도 이상의 지나친 처벌을 주장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지침이며 금지 조항이었다. 그 법은 눈에는 생명을 이에는 손을 대신하도록 하지 않고 각각의 손해에 상응하는 비율에 유의한다.
지금까지도 이 법은, 그 나라의 선하고 건전한 법을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두려움을 주고 압박하는 자를 변호하기 위해 정의의 검을 사용하는 치안 판사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지침으로서 우리에게 유효하다. 또한 그것은 규칙을 따라 각각의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 규정들을 할당하고 마련하는 입법자들에게 하나의 규칙으로서도 유효하다.
2. 신약의 교훈 (39-42)
원고 자신에 대하여 신약이 가르치는 바는, 자신에게 가해진 손상을 용서하며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한 조처 이상의 어떤 처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신다.
(1)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서는 안된다(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악한자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악을 피할 수도 있고, 우리의 안전에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에서 악을 대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되며 악의를 품거나 보복해서도 안되고 우리를 불친절하게 대한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그들을 능가해야 한다. 보복의 법은 사랑의 법과 일치되어야 한다. 그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두 번째 다툼을 일으키는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을 압박하는 자들에게 끈기있게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특별히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실례로 든다.
첫째, 뺨을 때림으로써 내 몸에 직접 해를 가하는 경우가 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39절). 이것은 하나의 가해일 뿐만 아니라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동이다. 왼편도 돌려 대라. 즉 끈기있게 참으라. 그 무례한 사람이 네게 행한 대로 네가 되갚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너그럽게 용서하라.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뼈가 부러진 일도 없고 크게 해를 입은 것도 없으니 그만 용서하고 잊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오만한 바보들은 네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너의 태도를 비웃을지라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같이 현명한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를 보인데 대해 너를 존중하며 네게 경의를 표시할 것이다.
비록 이 말씀이 어떤 비열한 사람들에게는 다음에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무례를 가하도록 허용할 수가 있으며 또 사실 우리가 그렇게 왼편을 돌려 대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사실이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자. 필시 한 가지 손상에 대한 용서는 또 다른 손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손상에 대한 보복은 또 다른 손상을 가져올 뿐이다. 대항하면 더욱 더 격노한 사람들도 순복할 때는 누그러질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속옷을 가져가고자 함으로써 내게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다(40절).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비록 재판관이 공정하고 신중할지라도 악한 자가 거짓으로 맹세하고 위조 문서들을 꾸며댐으로써 법적 절차에 의해 강제로 상대방의 옷을 벗겨내게 할 수 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전 5:8).’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그것이 큰 물건이 아니라면 화평을 위해 그 요구에 순복하는 것이 유익하다. 새 옷을 하나 사는 값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는 데 드는 비용만큼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경우가 있다(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이 경우에 우리는 “나는 그렇게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자랑하고 보복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보다는 그를 봉사하는 것이 더 낫다. 이 모든 가르침의 총체는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소송하기를 좋아해서는 안되며, 작은 손해들은 감수하고 무시해버려야 한다. 만일 그 손해가 우리로 하여금 보상을 강구하도록 만드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면 보복할 생각으로 하지 말고 선한 목적을 위해서 보상을 강구해야 한다.
(2) 우리는 자비롭고 관대해야 한다(42절). 우리는 이웃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들에게 모든 유익을 베풀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어라. 네게 할 만한 능력이 있다면 가난한 자의 요구를, 그가 네게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서 생각하라. 그런데 우리의 자선 행위는, 게으른 자나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지 않도록 분별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움이 궁핍하고 또한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꾸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때때로 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자비의 한 행위로서, 꾸는 자들을 현재의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구출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준비와 근면과 성실에 이르도록 한다. 꾸려고 하는 자를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쉽게 접근하도록 하라. 비록 그가 수줍어 하며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은혜를 구할 만한 자신이 없을지라도 너는 그의 필요하 소원을 알아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이처럼 친절을 베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아시고 우리를 그의 선하신 복들로써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Ⅸ. 이웃 사랑에 대하여 5:43-48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주 근본적인 율법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보게 된다.
1. 이 계명에 대한 유대 교사들의 와전된 해석(43)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유대 교사들은 이웃이란 말을 그들의 친구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하여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의도하시지 않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원칙을 스스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그들의 원수로 간주하였다. 타락한 격정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며 기회를 노려 계명을 이용하는 데 적극적인가를 보라.
2. 주님의 명령에 의해 이 율법의 본의가 명백해짐(44-4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사람들 자신이 늘 그렇게 악하고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비열하게 악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종족과 동족들에게 지고 있는 커다란 사랑의 빚에서 우리를 면제 시키지는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진 큰 의무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악하고 불경한 사람을 우리가 즐거워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원수들일지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하고 좋은 점들은 기꺼이 후대 해야 하며 더 나아가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선한 뜻을 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듣는다.
(1)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좋게 말해야 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그들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욕설을 정중하고 친절한 말로써 답해야 하며, 욕으로써 욕을 갚아서는 안된다. 혀 안에 친절의 율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악한 말을 하는 자들에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다.
(2) 우리는 그들을 선하게 대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선한 행실은 선한 말보다 나은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실제적인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 준비를 하고 있으며,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기뻐하라.
(3)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너희를 악하게 대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모범을 보이셨다. 우리가 그러한 핍박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를 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보일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일 때문에 결코 그들이 재난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와 화해시키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두게 된다.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우리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함이다. 이같이 한즉 우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거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보다 더 나은 증거를 보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리한 자에게 내리신다(45절). 햇빛과 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세상에 주어지는 큰 축복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는 자비들은 그 속에서 자신을 관대한 수혜자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례와 증거들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같은 인간 섭리의 은사들은 선인과 악인에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가장 악한 자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생활을 즐긴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을 보여 주는 주목할 만한 예이다. 그를 거스려 반역하는 악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선물들은 우리에게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교훈을 가르친다. 그를 닮으려고 애쓰는, 특별히 그의 선하심을 닮으려고 애쓰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기 위함이다(46,47절). 먼저 세리들도 그들의 친구는 사랑한다. 사람의 본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며, 관심이 그렇게 하도록 지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는 인간애 이상의 어떤 것이다. 우리가 남보다 더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슨 뛰어난 일을 하는가? 이것은 자주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심각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사람들에게서보다 우리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우리가 이 세상 자녀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의 의가 세리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을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보상을 기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같은 권고와 함께 본 주제를 끝맺으신다(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먼저 대체로 우리는 모든 일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은혜와 거룩함 속에서 완전을 바라고 목표 삼으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다음으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특히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눅 6:36). 해를 끼치는 자들을 용서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선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는 것이 우리의 온전함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입고 있으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대하심 덕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 관대하심을 전적으로 본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