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신 것을 증거 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 성도는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서 새 언약이신 예수님을 십자가 복음을 듣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Ⅲ. 제자 된 자들의 직분 5:13-16
그리스도께서는 이 설교를 하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주께서는 더 나아가서 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3)
제자들 앞에 있었던 선지자들 가나안 땅의 소금이었으나 사도들은 온 세상의 소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세상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넓은 온 세상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소금으로서 조용히 일하게 되면, 한 줌의 소금이 그 맛을 멀리 그리고 널리 퍼뜨릴 것이며, 아주 멀리까지 가서 누룩처럼(마 10:33) 서서히 그리고 저항할 수 없게 그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소금같이 스며들어 마음에 퍼진다(행 2:37). 소금은 깨끗케하며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한다. 영원한 언약은 ‘소금 언약'(민 18:19)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므로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소금은 모든 제사에 쓰여졌다. 그리스도인들과 특별히 목회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1)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들은 좋은 소금처럼 희고 작으며 여러 개로 쪼개져 있으나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존재가 된다.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들은 자신에 대해 어떠해야 하는가? 그들은 복음으로 즉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내야 된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막 9:50).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릴 수 없다. 둘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해야 하는가? 그들은 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 셋째,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무지와 사악함 속에 빠져 있는 인류는 산더미처럼 쌓여 곧 썩어 가는 맛 없는 폐품 덩어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생활고 교훈을 통해서, 인류를 지식과 은혜로써 맛을 내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도록 만드신다. 넷째, 그들은 어떻게 배치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그들은 고기에 뿌려진 소금처럼 여기 한 알, 저기 한 알 식으로 흩어져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금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을 세상은 어리석게도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나 사실은 이 소금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2)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목회자가 그렇다면 그의 상태는 매우 슬픈 현실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다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맛을 잃은 소금은 구제할 길이 없다. 둘째, 그는 쓸모 없기 때문이다. 이성 없는 사람이 무익하듯이 은혜 없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다. 셋째, 그는 파멸과 거절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토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4-16)
여기서 이 말씀은 그들이 소금처럼 유익하지만 (세상에 해와 소금처럼 유익한 것은 없다). 그보다는 더욱 더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나타낸다. 참으로 빛은 고마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천지 창조 첫날의 빛이 그러하였으며 매일 아침의 빛이 그러하고 복음이 그러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그러하다.
(1) 그들은 ‘세상의 빛’처럼 빛나고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표적이기(사 8:18; 슥 3:8) 때문에 모든 이웃들이 그들을 주목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감탄하고, 칭찬하며, 그들을 기뻐하여 본받으려고 애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비난하고, 그들을 비방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지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조심해서, 행동하기를 주의한다.
(2) 그들은 세상의 빛처럼 빛을 비추며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 주도록 되어 있다(15절). 그러므로 그들은 첫째 등불처럼 높이 세워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등불들을 켜서 말 아래 두시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그처럼 강렬한 빛이기 때문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울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그 자체의 증거를 풍성히 지니고 있다. 등불은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즉 등불 가까이로 올 사람들과 등불이 있는 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빛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 탓이다. 그들은 등불이 있는 집에 있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빛처럼 그들의 선한 설교로써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그것을 말 아래 두지 말고 퍼뜨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숙고와 겸손 혹은 자기 보존이라는 구실 아래 자신을 은밀하고 모호하게 감싸서는 안된다. 또 한편 그들은 선한 행실로써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들은 등불처럼 계속해서 타오르며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선한 활동들을 행함으로써 빛을 비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교회를 위해서 보여질 수 있도록 선한 활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웃들은 틀림없이 우리의 선한 말들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가? “이같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신앙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목표로 삼아야 할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찬양할 거리와 경건의 동기들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성도들의 거룩하고 정연하며 모범적인 대화는 죄인들의 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모범이 곧 선생이다. 경건한 대화 속에는 매력적인 미덕이 있다.
Ⅳ. 율법의 비준 5:17-20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은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규칙으로서 구약 성경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스도는 그 점에서 그들이 바른 위치에 있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모범”으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았는데 그리스도는 그 점에서 그들이 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1.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바로 세우고자 하신 규칙(17-19)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약’ 성경과 완전히 일치하게 세우고자 하신 규칙이 여기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이라고 불린다.
(1) 그리스도는 구약을 취소하며 약화시키는 사상을 반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이 말씀의 뜻은, 첫째 “율법과 선지자들을 흠모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아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싫어하고 그 멍에를 진저리내는 불경한 유대인들아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줄로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혼의 구주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폐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로부터 받은 탁월한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율법의 명령들을 순종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모든 점에서 율법에 순종하셨으며 그 중의 한 가지라도 결코 깨뜨리신 적이 없으셨다. 그는 율법의 약속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율법의 모형들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 그는 율법의 결점들을 보충하여 완성시키고자 오셨다. 작품의 대략의 윤곽만 보여주는 밑그림이 나중에 완성되듯이, 그리스도는 부가적인 말씀과 설명들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발전시키셨다. 그는 바로 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오셨다. 복음 시대는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개혁의 때(히 9:10)이며 또한 그것을 개선하여 확정하는 때이다.
(2) 그는 율법의 영속성을 주장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아멘이요 신실한 증인인 내가 너희에게 엄숙히 선언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말씀과 복음의 말씀이 모두 영원하다. 자신의 율법에 관한 하나님의 보호는 가장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까지도 미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여 그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보존될 것이다.
(3) 그는 율법을 그의 제자들에게 맡겨 조심스럽게 보존하도록 하시고 율법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의 위험을 그들에게 보이신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절). 물론 하나님의 명령들 가운데 어떤 명령들은 다른 것들보다 작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은 없다. 단지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다. 교리상이나 실제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효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 이상의 악한 행위이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는 행위이다(시 119:126). 그와 같은 부패가 더욱 퍼지면 퍼질수록 그 부패는 더욱 심각하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은 아주 건방진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훨씬 더 건방진 짓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즉 영광의 나라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참으로 존경받고 크게 평가되는 사람들은 선한 것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한 손으로 세운 것을 다른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설교한 대로 살고 경험으로부터 말하는 자들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다. 장차 그들은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규칙으로 말미암아 세우고자 하신 의(20)
그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야 한다. 이 교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신앙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자들로 간주한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대항하는 원수들이었으며 심한 압제자들이었다. 그럴지라도 그들에게 칭찬할 만한 어떤 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여기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그가 오셔서 세우신 종교는 단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해함을 배척하기만 하지 않고 그들의 선함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해야 하며 그들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단지 외형만을 신경썼으나 우리는 내부의 경건을 의식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찬양과 칭찬을 목표 삼았으나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목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해야 한다.
Ⅴ. 살인에 대한 재해석 5:21-26
그리스도는 몇 가지 특별한 경우들을 들어 율법을 해설하시는 데로 나아가신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어떤 것도 덧붙이시지 않고, 그동안 남용되어온 몇 가지 허용들을 제한하고 금하신다. 그리고 몇몇 계명들에 대해서는 그 계명의 적용 범위와 엄격함 그리고 영적 성격을 보여 주신다. 본문에서 그는 제 6계명의 율법을 그 계명의 참된 의도와 완전한 적용 범위에 따라 설명하신다.
1. 제 6계명 자체(21)
여기에 계명 자체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새로 갑자가 솟아난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법은 고대의 법이었지만 결코 낡아빠지거나 폐기처분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살인이 금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살인이란 자살과 직접 혹은 간접적인 타살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간에 살인 방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쳐놓으신 울타리이다.
2. 유대 교사들의 이 계명에 대한 해석(22)
그들의 해석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그릇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은 제 6계명의 율법이 단지 외적인 살인 행위만을 금하였고 그로부터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내부의 욕망들에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은 죄 받을 행위 만을 금지하였고 죄 된 생각은 금하지 않았다는 이러한 사고는 사실 유대의 교사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오류였다.
3. 이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석(22)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분별 없는 성냄은 마음의 살인이라고 말씀하신다. 까닭 없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제 6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화란 자연스러운 격정이다.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화에는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까닭 없이 화를 내면 그때는 그 화가 죄가 된다. 어떤 정당한 자극도 없이 화를 낼 때, 즉 아무런 이유나 좋은 목적 또는 중요하고 화를 낼 만한 근거도 없이 화를 낼 때 그것은 죄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근거없는 추측들에 대해서나 입에 올릴 만한 것도 못되는 하찮은 모욕에 대해서 화를 낼 때도 그렇다.
아무런 좋은 목적도 없이 화를 낸다면 그 성냄은 헛되고 고통을 줄 뿐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화를 낸다면 그때는 언제든지 범법자를 일깨워 회개에 이르도록 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 화를 내야 한다. 화가 그 정도를 벗어났을 때 우리가 격분하여 난폭해졌을 때, 그리고 우리가 격분하여 난폭해졌을 때,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려고 할 때에 화를 내는 것은 죄가 된다. 이것은 제 6계명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자는 할 수만 있다면 살인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살인을 향해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형제를 ‘라가’ 혹은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즉 형제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혀로써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온유한 태도로 이같이 무례한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화에 그치지 않고 악의로까지 발전할 때 그것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의 연기와 같다. ‘라가’는 보통 경멸할 때 쓰는 말로서 교만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그 뜻은 ‘이 멍청한 녀석’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는 것이 그와 같은 말이다.
미련한 놈이란 말은 악의가 담긴 말로서 미움으로부터 나온다. 그 말은 상대방을 천하고 존경받지 못할 자고 볼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고 사랑 받지 못할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전자의 욕설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말하고 후자는 은혜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 비난이 상대의 영적 상태를 건드리는 것일수록 더욱 악한 것이다. 악의가 있는 비난과 비방은 은밀하게 그리고 서서히 죽이는 ‘혀 아래 감추인 독’이다. 그것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 그런 악의를 이웃에게 품는 것과 같다.
(3)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아무리 이러한 죄들을 가볍게 여길지라도 그 죄들은 반드시 헤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며,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을 욕했다는 이유로 산헤드린에 의해 처벌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놈이라고 즉 불경스러운 놈,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형제 보고 그리로 빠지라고 말한 바로 그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어떤 것이 가장 두려운 형벌인가를 보여 줌으로써 어떤 죄가 가장 악한 것인가를 가르치려고 하셨다.
4. 우리의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평을 보존함(23-26)
이 모든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화평을 보존해야 하며, 만일 어느 때라도 그것이 깨어지면 화해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왜냐하면 화해가 이루어 질 때까지는, 우리가 거룩한 의식들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적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다(23,24절). 만일 네게 네 형제에 대하여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문제를 없애라. 그를 용서하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막 11:25). 그가 네게 가한 손해를 용서하라. 그러나 만일 다툼이 네편에서 시작되었다면, 또한 잘못이 처음이든지 나중이든지 네게 있어서 네 형제와 다투었다면, 예물을 드리기 전에, 즉 네가 하나님 앞에 엄숙하게 나아오기 전에 먼저 가서 그와 화목하라.
우리가 무슨 신앙적인 행위든지 시작하려고 할 때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살피는 기회를 갖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만일 우리가 분을 품은 채 신앙적인 행위들을 실행한다면 그 행위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다. 분노중에 드리는 기도는 쓰디 쓰다(사 1:15; 58:4). 사랑과 자비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며 다투고 있는 동안에는 제물을 드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일을 연기하는 것을 하나님은 낫게 여기신다. 비록 우리가 형제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부적합할지라도 우리의 의무를 생략하거나 게을리하는 일이 결코 용서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친교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이유로서 이 사실을 드는데, 즉 그것은 그들이 다른 이웃들과 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한 죄가 또 다른 죄를 결코 변명해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죄만 배로 커질 뿐이다.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신앙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어서는 안된다. 자기 전에 우리는 기도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의 날인 안식일에 분을 품는 채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될 말이다.
(2) 화해를 할 때까지는 우리가 많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25,26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화해해야 한다.
첫째, 현실적인 이유에서 화해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형제에게 신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혹은 명예상의 어떤 잘못을 범해 그가 그에게 상당한 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한다면,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정당하고 만족스러운 화해를 통해 그 일을 막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가족에 대한 의무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그 문제를 법대로 처리하여 우리를 감옥에 집어 넣을 것이다. 법과 다투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우리가 법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힐 위험이 있다. 형제와 합의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법대로 하면 희생이 크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하지만 우리가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당해야 한다. 감옥은 그들 자신의 교만한 방탕, 고집과 어리석음 때문에 그곳에 들어 온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장소이다.
둘째, 영적인 이유에서 화해해야 한다. 가서 네 형제와 화목하라. 즉 그에 대해 정당한 태도를 취하라. 그와 친해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툼이 계속되는 한 너는 예물을 드리기에 부적합하며 하나님의 상에 나아오기에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화해하는 큰 일에도 적용된다. 네가 그와 함께 길에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유의해야 한다. 크신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의 원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리고 우리가 길에 있을 때 급히 이 일을 하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길에 와 있을 때란 곧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한다. 죽은 후에는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적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의 체포를 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 지옥은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적대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이 던져질 감옥이다. 죄인들은 영원히 그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들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