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설교 말씀은 하나님이 이단자들을 심판한다고 했다. 성도는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 유다서를 통해서 이단의 거짓 복음을 경계하고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다서는 성도가 신앙 생활을 잘하여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Ⅰ. 서언과 축복 1:1,2
1. 본 서신의 저자인 유다에 관한 기술 (1)
그는 구약에 나오는 족장 야곱의 아둘들 중 네 번째 아들인 유다와 그 이름이 같다. 그 이름은 가치있고 고귀하고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1) 하지만 그와 이름이 같은 사람으로 악인도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주님이시며 우리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던 가룟 유다가 바로 그였다. 이처럼 똑같은 이름이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도, 가장 악한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붙여질 수 있는 것이다. 아주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비록 우리 부모들이 우리가 어떤 인물이 되기를 바랬는가에 대해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의해 우리의 미래상에 관해 어떤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2) 본 서신의 저자인 유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배반자요 살인자인 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반자요 살인자인 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었다. 이 사도는 서신 가운데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것을 매우 명예로운 호칭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자기가 육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친척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그의 종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은 가장 겸손하며 신실한 사역자에게는 크나큰 명예이다(그리고 모든 고결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이다).
사도들은 사도이기 이전에 종들이었고, 여전히 종들일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야고보의 형제’였다. 야고보는 교부들이 예루살렘의 초대 감독으로 불렀던 사람이었다. 본 서신의 저자가 그 야고보와 형제라고 할 때 그 의미가 엄격한 의미로 적용되는지 아니면 보다 넓은 의미로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정짓지 않으려 한다.
2. 이 서신의 수신인(1)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1절).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란 ‘부르심을 입은 자’ 즉 세상에서부터 부르심을 입고,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성화되고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사랑을 얻고’로 되어 있음-역주).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성화되고. 유효하게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성화되었다.
우리의 성화는 우리들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타락과 부패는 우리들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우리의 성화와 갱생은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부르심을 입고 성화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는다.’ 주님께서는 시작하신 것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변하기 쉬우나 예수께서는 변치 않으신다.
3. 사도적 축복(2)
긍휼과 평강이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바라는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이며 근원이다. 긍휼 다음에는 평강이 있는데, 우리는 긍휼을 이미 소유했다는 생각을 통해 평강을 지니는 것이다. 긍휼에서 평강이 나오듯, 평강에서 사랑이 나온다. 그 사랑은 우리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고, 예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며,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애이다. 찌꺼기나 부스러기로써는 충족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Ⅱ. 일반적인 문안 1:3-7
1. 이 서신을 기록한 사도의 목적 (3)
그들을 기독교 신앙 안에 굳게 세우고 더 나아가 편안히 행하고 교제케 하며 또한 분명하고도 담대한 신앙 고백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적인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가장 진지하게 제시된 일반적인 구원이다. 스스로 포기하는 자 외에 아무도 이러한 은혜로운 제의와 초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제시되었다. 즉 강한 자에게도 약한 자에게도 제시되었다. 여기에 거하도록 하자. 이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내딛는 날이면 우리는 혼란되거나 유혹받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모두 우리에게 이 ‘일반적으로 얻은 구원’에 대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그들은 이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관해 개개인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믿고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밝혀 주었다. 사도는 (영감을 받았지만)이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했다. 거룩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항상 가장 공손하고 주의깊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 일반으로 얻은 구원의 교리를 받은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것을 옹호해야만 한다. 힘써하되 광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그것을 위해 끈기 있고 용기 있게 견디는 것이다.
2. 사도가 이점에 관해 기록한 목적 (4)
그릇된 풍습 때문에 좋은 법이 생겨나듯이, 위험한 실책들로 인해서 중요한 진리를 올바로 지킬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주어질 때가 종종 있다.
〔1〕경건치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교회의 평화에 있어 가장 큰 적이다. 본문에서는 믿음을 부인하거나 타락시키며 평화를 어지럽히는 부류들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부르고 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의혹을 불러 일으키고 문제를 야기시키고 분열을 가져오고 불과를 심화시킨다.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는 이상 어떤 것도 우리를 교회로부터 갈라놓지 못한다. 즉, 뚜렷한 불신앙과 불경건만이 교회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다. 하나님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 하나님과 양심에 대해 아랑곳 않는 사람들이 경건치 않은 자들이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놀랍도록 풍성하다고 해서 더욱 대담하게 죄를 짓는 용기를 갖는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못된 자들이다.
〔3〕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사람들은 사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를 모두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자연 종교의 기초를 건드리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에 계시종교의 모든 체계를 뒤집는 것이다. 이것들은 흥망을 함께 하며, 상호 간에 빛과 힘을 주는 것이다. 이것들만큼 서로 짝이 잘 맞는 것도 없다.
〔4〕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다. 그렇게 죄를 지는 사람들은 상처와 질병으로 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5〕우리는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들, 즉 믿음을 타락시키고 부패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그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사단의 도구들과 대리인들이 더욱 교활하고 분주할수록,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더욱 열심을 내야만 한다.
3. 사도의 적합한 경고(5-7)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단 믿음을 고백했다가 후에 변절해 버린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5절). 우리는 이미 알았던 것에 대해 계속해서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매번 새로운 것을 가르치도록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다시 생각나게’하며, 잊었던 것을 상기시키도록 되어있다. 이런 일들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더 잘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1〕믿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멸하심(5절): 그들은 많은 기적을 맛보았다. 매일의 양식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신앙 가운데서 죽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많은 잇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실수를 거울로 삼자.
〔2〕천사들의 타락(6절):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치 않으셨다. 자기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종이 되려 하지 않았던 자들은 그분의 공의의 포로가 되었고,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혔다. 듣고 떨지어다, 오 죄많은 인간들이여 !
〔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7절): 그들의 멸망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조심하고 그것에서부터 멀리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경계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동일하게 거룩하고 공의롭고 순수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순간적인 동물적 쾌락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 인간의 고통을 보상시킬 수 있겠는가?
Ⅲ. 거짓된 자들을 경계함 1:8-15
사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사기꾼들에 대하여 질책한다. 본 서신의 저자인 사도는 그들을 더러운 꿈을 꾸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미혹은 꿈이며, 부도덕의 시작이요 관문이요,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꿈을 꾸는 이 사람들은 지상의 허무맹랑한 낙원을 꿈꾸다가 마침내 진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1. 이 사기꾼들의 특징 (8-13)
〔1〕육체를 더럽히며(8절). 육체 혹은 육신은 많은 끔찍한 타락의 직접적인 부분으로, 때때로 타락을 자극하는 원인이 된다. 이런 타락은 육체 안에서 그리고 육체에 대적해서 행해졌을지라도, 영혼을 크게 더럽히고 심하게 상처 입히고 손상시킨다.
〔2〕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그와 같이 험담을 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권위를 무시하고 조롱하며 나아가 그것을 세상 밖으로 쫓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즉 양심의 규율이 되는 말씀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이다. 종교와 그 종교를 진정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험담을 들어 왔다.
사도는 천사장 미가엘의 예를 들고 있다(9절). 주석가들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감히 훼방하는’ 이라는 구절이 과연 여기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가 마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변론을 하면서 그런 식으로 해 나간다면 하나님께 누를 끼치게 될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변론가들이 명심할 점으로, 결코 변론 가운데 욕설을 끌어 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는 허위나 무례한 욕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그는 마귀와 변론하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의 경책은 요즘의 경솔한 신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다.
〔3〕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10절). 만일 그들이 그것들을 알았더라면, 훨씬 좋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 대해 진정으로 이야기할 때는 선하고 탁월한 것외에는 이야기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잘 모르는 인물이나 사물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 하는 습성이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은인자 중에 심지어 어떤 정당한 비판으로부터도 감싸준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사도는 스스로 자신들을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한 부류는 아니라도 적어도 가장 기지가 넘치는 부류로 생각하여 뽐내는 자들을 ‘이성 없는 짐승’에다 견주었다. 저희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들의 허물이 무엇이든 간에 그 허물은 그들의 타락한 의지 가운데 놓여 있다.
〔4〕11절에서 사도는 그들을 가인의 후예로 나타낸다. 그리고 12, 13절에서는 무신론적이고 불경스런 사람들로, 다시 말하면 탐욕스럽고 욕심 많은 사람들, 즉 현재의 세속적인 이득만 얻기에 급급하여 내세의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고라’와 같이 필연코 멸망에 이르게 되는 짓에 뛰어든 사람들로 나타난다. 저희는…너희 애찬의 암초요(12절).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있어서 그러한 오점은 훌륭한 모임에도 예외없이 너무나도 흔한 것이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그들은 필시 악명 높은 폭식가들 즉, 자기네들의 식욕을 채우는 데만 정신이 팔린 자들이었다. 함께 먹고 마실 때는 경건한 주의가 필요하며 잔치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들은 물 없는 구름이요.
즉 가뭄 때, 비를 약속해 놓고서 그 약속을 전혀 이행치 못하는 구름이다. 형식적으로 믿음을 고백한 자들이 그런 경우이다. 바람에 불려가는. 즉 바람 부는 대로 쉽게 끌려 다니는 자들로, 속이 비고 근거가 없이 입으로만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 그 꼴이며, 그들은 아무 유혹자에게나 손쉽게 먹이가 된다. 사람들이 자기네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에 대해 좀더 잘 알거나 실제적으로 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그들은 주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나무이긴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다.
죽고 또 죽어.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연 상태로는 한 번 죽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고백하고 받아들일 때, 다시 살아나 소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들의 위선을 분명히 드러낸 증거에 의해서 다시 주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들 안에는 진정으로 생명력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뿌리까지 뽑힌. 우리는 죽은 나무를 대개 그렇게 처리한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열매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13절). 즉 쓸데없이 말만 많고 분쟁으로 가득한 물결이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즉 차분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에게 불편을 많이 끼친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들의 더 큰 수치와 그에 알맞는 책망만 일으킨다. 거친 물결은 항해 중인 여객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지만, 그들이 일단 항구에 도착하면 파도 따위는 잊혀지고, 그 소란과 공포는 영원히 끝이 난다. 유리하는 별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아주 생생한 상징이다. 그들이 어느 때는 이곳에, 어느 때는 저곳에 있어서 그들을 어디에 어떻게 고정시켜 놓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2. 이 사악한 사람들의 최후가 선포됨(14, 15)
거짓 교사들에게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 만일 이런 사실이 사역자와 회중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에녹의 예언(14, 15절)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언급된 것이 없다. 주께서…함께 임하셨나니. 주께서는 천사와 완전해진 의인들의 영혼을 포함한 수많은 거룩한 존재들과 함께 임하신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임하실 그 순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시간이 될까! 그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심판하고 또 정죄하려고 오신다. 그들은 대꾸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변명거리도 없기 때문에, 그때 감히 곁에 서 있을 수도 없고 감히 서려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경건치 않은’이란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어 강조된다는 점, 즉 자그마치 네 번이나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고 15절을 넘어갈 수는 없다. ‘경건치 않은 자’, ‘경건치 않은 죄인’, ‘경건치 않은 일’, 그리고 ‘경건치 않게 행한’, 이렇게 네 번이 나온다. 경건하다느니 경건치 않다느니 하는 말은 그 표현을 비웃고 조롱하는 일 말고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성령의 언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서로에게 강퍅한 말을 한 것은 특히 그것을 정당한 근거 없이 했을 때는,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 반드시 거론될 것이다.
Ⅳ. 마지막 권고 1:16-25
〔1〕여기서 사도는 이 사악한 사람들과 유혹자들의 특징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16절). 원망하며 불만으로 토하는 기질은 사람에게 아주 나쁜 성격을 갖게 만든다. 그들은 최소한 매우 박약하며, 대개의 경우 매우 사악하다.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화를 내며,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형편과 조건에 대해 만족하는 법이 없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족하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들의 의지, 취향, 상상만이 그들의 유일한 규율이다.
[2]사도는 자기의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경고와 훈계를 계속한다(17-23절).
1) 그는 그들에게 이미 경고받은 바에 대해 상기하라고 촉구한다(17절).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며, 결코 그 안에서 그들을 동요케 하거나 혼란케 하지는 않는다. 권고하는 사람은, 그들이 권고하려는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신랄한 말이나 강퍅한 태도로는 결코 납득시킬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구나 권고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모든 혼란 가운데서도 그의 교회를 유지시키시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되고, 그것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조롱받고 핍박을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굳게 잡고 지켜야 한다. 미리 경고를 받았다면, 우리는 미리 대비책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 일지라도 우리는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2) 그는 유혹자의 가증스러운 특징에 대해 좀 더 밝힘으로써 그들로 유혹자들에 대해 경계하도록 조심시킨다(19절). 육에 속한 자들은 성령, 즉 하나님과 예수의 영, 성결케 하는 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악할수록 우리는 더욱 선한 사람이 되고자 애써야 한다. 사단이 분주할수록 우리는 건전한 교리와 좋은 대화에 더욱 매달려야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진리와 거룩함 안에서 지조를 지킬 것을 권한다.
①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20절). 건전한 믿음 위에 우리의 기초를 잘 놓았거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건축해야만 한다. 또한 건축 재료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바른 원칙은 불같은 환난의 시련도 견딜 것이다.
② 성령으로 기도하며. 기도는 믿음의 유모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성령의 인도와 영향을 받으며, ‘성령으로 기도’할 때, 가장 크게 역사할 것이다.
③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21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있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자신을 지키라.
④ 긍휼을 기다리라. 영생은 오직 긍휼을 통해 바랄 수 있다. 긍휼은 우리가 간구할 것이지 당연히 받을 공로가 아니다. 그것은 구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통해야 한다. 천국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기에 이르는 것이다. 축복된 소망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들의 저주받은 욕정을 이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4) 그는 그들에게 잘못하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알려 준다(22, 23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마귀와 올가미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는 사람일 뿐 아니라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한, 형제를 기키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일은’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이행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당연한 자들과 고집쟁이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22절).
그들을 아주 다정하게 대하여야 하며, 그들을 책망할 때 쓸데없이 거칠고 모질게 굴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그들이 우리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한없이 그의 용서를 필요로 한다. 주의 두려우심을 그들에게 주장하면서, ‘어떤 자를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23절). “그들이 두려워함으로 스스로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라.
너희의 선한 의지가 좌절되지 않도록 두려움을 품으라. 개심시키되 모질게 대하지 말라.”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의도가 정직한 것이라고 확신할 때는 너무 과도하게 행하며 대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즉 악한 것이거나 악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하라.
〔3〕사도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장엄하게 영광돌리는 말로 서신을 끝맺고 있다(24, 25절).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서게’ 하실 수 있으며, 그럴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뜻을 지니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 영광 앞에 우리를 서게 하시되 우리를 전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자로서가 아니라 죄과가 없는 자로 서게 하신다. 주의 영광은 곧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현재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지만, 이후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즉 지금 믿고 있는 분을 곧 보게 된다는 말이다. 믿는 자들이 흠이 없이 그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은 즐거움으로 넘치는 것이 될 것이다. 거룩함이 완전하게 되는 곳에는 기쁨도 완전하게 될 것이다. 분명코, 이 모든 바를 행하실 수 있고 하실 의향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은 그분께 돌려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받기에 합당하시다. 아멘.